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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님을 섬기는 자유
본문: 고전7장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1.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4.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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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유일한 길
주님을 섬기는 자유(고전7장)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주님을 섬기는 자유만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결혼문제에 대한 질문들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고린도전서 7장은 전체가 그 교회가 보내 온 결혼에 관계된 질문들에 대하여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답을 하고 있다.
바울이 받은 질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좋으냐? 하지 않는 것이 좋으냐? 과부와 처녀는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으냐? 이혼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 종과 상전은 어떻게 지내야 하느냐? 등이었다. 이런 문제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인간 세상의 일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도시로서 혼잡한 문화 여건으로 인하여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다고 한다. 교회도 이런 환경 안에 있었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과 같은 문제들이 더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곳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답 대신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아담은 많은 자유 중에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자유를 택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산을 떠났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이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서 경작하고 지키는 자다. 그런데 아담은 모든 것을 자신이 시작하고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가인은 농사를 시작하고 그 결과(곡식)를 거두어 왔고 아벨은 양을 기르고 그 결과물(양)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며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셨다. 자기가 시작하고 자기가 마치려고 하면 만사에 땀이 흐르는 것이며 극단적으로는 남을 원망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더 원망하는 것이다.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해도 문제가 되고 안 해도 문제가 된다. 매사가 그렇다. 자기가 시작하면 자기에게 답이 있고 그 답은 그 사람 만큼인 것이다. 시작한 자가 답이다.
하나님은 시작하고 사람은 그것을 경작하고 지켜야 한다. 그러면 시작하신 이가 거둘 때 경작하는 사람에게는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저주가 없고 땀이 없다. 사람이 시작하면 사람이 답이고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하나님이 답이다.
고린도교회의 질문들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러면 이렇게 하고 저러면 저렇게 하라는 식이다. 사정과 형편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대로 그냥 지내라는 것이다. 사정과 형편을 바꾼다고 해서 사람이 그대로인데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아담이 어떤 곳에 가면 가시와 엉겅퀴가 없겠으며 어느 때라고 해서 땀이 흐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개가 있는 곳에 개의 문제가 있고 소가 있는 곳에 소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이 아담이 있는 곳에는 아담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과 사정에 있든지 할 수 있으면 그대로 있고, 할 수 없으면 바꾸라는 것이다. 또한 부르심이 있는 자들은 부르심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다. 종일 때에 부르심을 받았으면 종 그대로 있고, 주인일 때에 부름을 받았으면 주인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종이라도 하나님을 섬김에서 자유자고, 주인이라도 하나님을 섬김에서 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는 형편과 사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려 하면 모든 것이 다 장애물이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아내에게는 남편이, 종에게는 상전이, 상전에게는 종이 모두 방해가 되고 적이 된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원망이다. 이것이 사방에서 찌르는 가시와 엉겅퀴다.
나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행운을 얻었다. 서울에 올라간 후 나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다. 큰 축복이었다. 그 때까지의 인생에 황금기였다. 그런데 목회를 한답시고 내 뜻을 펼치려 하면서부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급기야 4년 만에 문제가 터졌는데 이로 인하여 4년을 뼈를 녹이는 고통을 겪고 마침내 나의 보금자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몇 사람을 심히 원망하고 그곳에서 밀려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를 붙들어 주셨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나는 낙동강에 떨어진 오리 알 신세가 되고, 길은 삼천포로 빠졌을 것이다.
자기 뜻이 있으면 땅(환경)은 저주를 받고 양식을 대신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다. 이래도 문제가 되고 저래도 문제가 된다. 뜻이 강할수록 문제도 강해진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리라 하고 그의 이끄심에 따라야 한다. 그러면 인생은 너무 쉬운 것이다(약4:14,15참).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만 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살기가 쉬운 일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끊임없이 문제가 있는 환경을 개선하고 그 속에 사는 지혜를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혜로 만든 것들은 더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 답을 하지 않았다.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대답이 아니다.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가를 배우려고 한다면 오히려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호랑이가 독수리의 날개침을 배우려고 한다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차라리 호랑이대로 그냥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담은 천사의 능력과 지혜를 얻으려 하다가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다.
바울은 주님께 속한 사람이었다. 절대적으로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혼할 수 있으면 하라. 해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고, 믿지 않는 남편이 이혼하자 하면하고, 같이 살자 하면 살라고 하였다. 네가 함께 삶으로 그 남편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어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자유다. 심지어 그는 주님이 오실 때가 임박했다고까지 말하면서 스스로 무엇을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그냥 있으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 이것이 전부인 사람에게 무엇이 어려운 것이 있으랴! 주님만을 섬기는 자유자는 형편과 사정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할 수도 있고 저러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