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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덕을 세움
본문: 고전8:1-13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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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유일한 길
덕을 세움
A. 제물을 먹는 문제(8:1~13)
결혼문제에 이어서 우상제물 먹는 문제를 다룬다. 결혼문제나 먹는 문제는 인간의 본능과 관계 되고 불가피한 문제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먹는 문제는 결혼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는 인간생활은 많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으로 그 신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고기(제물)는 도살 할 때부터 신에게 먼저 드려야 했고 시장에 서 판매되는 고기는 대부분 국가적 제사에서 나오는 제물임으로 다 신에게 드렸던 고기였다. 그러므로 신에게 드리지 않은 고기를 먹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런 제물로 잔치를 하면서 어떤 신의 이름으로 초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 우상숭배를 배격한 그리스도인들의 처신은 대단히 곤란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우상과 관련 된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교회 안에서 제기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제물이 우상과 관계 된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어서는 안 되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양심으로는 먹어도 되지만 남의 양심을 위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먹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양심에 거리낌으로 먹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또 나는 거리낌이 없다 하더라도 나의 거리낌 없이 먹음이 다른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먹는다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는데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밖에 없는 바울은 단호하게 내 자유로 먹는 것이 다른 형제에게 거리낌이 된다면 나는 영원히 제물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즉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형제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의 참된 자유다.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위와 같은 문제들은 오늘날에는 먼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이와 유사한 문제가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첫쩨는 조상제사 문제다. 이 문제 안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천주교는 이 문제로 100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고 목이 잘려 순교를 당했다. 할 수 없어서 교황청에서는 한국천주교회에게 제사를 허락한다는 칙령을 보내기 까지 했다고 한다.
개신교는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극심한 박해는 면했지만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상당한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회문화적 충돌이라고 할 수 있지마는 당시에 당사자들에게는 피차간에 생명을 건 싸움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제사는 조상신을 섬기는 것으로서 인륜의 근본인 효도라고 믿었고, 교회는 이것은 우상숭배로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요 모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인지가 발달하여 조상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대부분 조상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내 생각으로는 이런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다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문제로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쩨는 술과 담배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 역시 역사가 오래 되었고 많은 문제들이 있었으나 아직도 온전하게 해결 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술과 담배문제는 한국에 온 개신교 초기선교사들에 의해서 금령으로 선포된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관점에는 술과 담배는 경건한 신앙생활에 큰 장애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계율적인 사람들은 절대 불가를 주장하고 자유주의 일부에서는 적당히 하는 것은 용납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계율적이냐 자유주의냐를 떠나서 술과 담배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특히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이 술과 담배를 할 경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의 신앙심을 비웃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좋은 전통으로 지켜 온 것을 교회가 다시 세상풍조에 맞출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에, 사업상 손님접대에, 친구관계에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복음전파와 교회건축을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기왕의 좋은 것을 지키면서 보다 전진적으로 더 좋은 풍습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다. 지식이 많으면 자유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형제를 판단하고 실족하게 한다면 그 자유는 무익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형제를 살려주고 세워준다.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너희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알기 때문에 자유 한다는 사람이 술을 먹고 있으면 그것을 본 믿음이 약한 사람도 담력을 얻어 술을 먹을 것임으로 조심하라는 것이다. 아이들 보는 대서는 냉수도 함부로 마시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는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다. 그러므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그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하였다.
남의 양심을 위하여 나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덕이 세워지는 곳에 교회가 세워진다.
주님과 그의 사도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었고 의문이 없었다. 하나님을 시험할 일이 없고 사람들과 불화할 일이 없었다. 덕을 세우지 못할 일이 없었고 교회를 위하지 못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