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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건축을 위한 은사들(2)
본문: 고전12:1~14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 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12: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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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유일한 길
건축을 위한 은사들(2)
고전12:1~14: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들이 있었으나 통제하는 원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을 일으켰다. 은사들을 주신 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방주를 건축하는 것 같이 건축으로 이루어진다. 단번에 나타나는 기적이 아니다. 질서를 따라서 지어지는 것이다.
1. 은사들과 통제하는 원칙(1) 12:4~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함이라”하였다.(12:4~7)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다는 것이다. 셋이 한분이다. 그런데 왜 혼란이 왔을까? 주시는 이와 역사하게 하시는 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 한 성령 안에서 은사를 받았고 한 하나님의 역사하였다고 하지만 은사를 주시고 역사하신 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 자기의 것이 우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인간의 문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애급에서 구원받고 홍해와 광야를 거치면서 수많은 이적을 보고 그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 혜택을 주신 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곧 바로 바알 신을 섬겼고, 후에도 끊임없이 바알을 섬기는 일이 반복 되었던 것이다.
바알 신을 믿는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 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가나안의 풍요로움이고 그들의 신은 바알인지라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혼돈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기도하면서 대립하고, 한 성령을 따른 다는 사람들끼리 분열하면서 기도하는 일은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인은 성령도 하나님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각자의 생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인간의 필연적 운명인 것 같다(창2:17,3:17~19참).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자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동산(영역) 안에 생명나무를 두시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그 열매를 거절하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홀로서서 각자의 생각대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성령의 일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고 교정하려고 모세는 율법을 가져왔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으며, 교부들은 교리를 제정했지만 그런 노력들이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게 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방황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 사람 예수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가 우리 모든 사람을 포한한 위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옛것을 다 끝내셨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각자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해서 발생한 모든 문제를 끝내신 것이다.
내 생각, 네 생각, 내 지식, 네 지식, 내 경험, 네 경험이 다 그의 죽으심 안으로 삼켜지고 무능 무효화 되어 인생은 숨이 하나님께 달린 한 피조물로 폭로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 시인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결 되는 구속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과 연결 되면 연결 된 전선을 통해 전기가 들어오듯이 하나님의 공급이 들어오고 새 생명 안에서 살 게 된다.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님 안에서 구속함을 얻어 하나님의 동산으로 복귀하여 생명의 공급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물질적이며 영적인 많은 혜택을 받았으나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생명의 공급이 필요하다. 예수는 인생을 자신 안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동산,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옮기신 분이다.
구속 안에 길이 있다.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만질 수 없는 성령을 알게 되면 볼 필요도 없고 만질 필요도 없게 된다. 알기 때문이다(계22:4참).
우리에게는 구속하신 주님이 있다. 새로운 시작이시고 영원한 완성인신 주님이 계신다. 우리를 포함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우리 주님이 계신다. 밝히 우리 눈앞에 보인다(갈3:1이하 참). 성령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은 밝히 보인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시고 보증이시다. 답은 주 예수다. 주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산 혼인 인생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통하여 자신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속 받은 모든 인생의 대표자가 되셨다.
성령이 주신 은사는 주님이 보증이 되시고 그를 통하여 직임이 되면 그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보이지 않는 분이 주신 것(은사)은 보이는 분, 즉 주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 의해 직임으로 배정 되고 이 배정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은사와 역사하심은 주님이 중보와 보증 안에서 시행 된다.
은사를 주신 분이 있고 역사하는 분이 있지만 통제하는 권위는 주 예수님께 있는 것이다. 이 권위의 통제가 없는 은사는 보증 없는 수표와 같다. 누가 어떻게, 어떤 은사를 주었고 또 받았던지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중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주 예수뿐이다.
2. 통제하는 원칙(2) 12:12~30
은사에 대한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다. 또한 그의 몸인 교회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사에 대한 보증이다. 은사는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 주어진다.
몸은 지체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손은 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몸의 요구다. 다리는 둘만, 눈은 둘만,...지체로 몸이 이루어지지만 몸의 필요와 요구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지체들을 통제하는 원칙은 지체들이 아니라 몸이다.
은사는 몸의 필요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유익한 것이다. 자신의 기쁨이나 만족을 따르면 안 된다. 방주 건축의 목표는 판자들의 필요가 아니라 방주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다.”
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은 한 몸을 위한 것이며, 한 몸 안에서 한 성령을 마시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 못한다. 정해진 한 곳에서만 제물을 드리고 여호와께 나아온다. 정해진 곳이란 한 곳이다. 단은 정해진 곳이 아닌 다른 곳, 즉 자기가 쌓은 단에서 경배 드렸음으로 영원히 저주를 받고 그 백성 중에서 끊어졌다(삿18:30참). 그 백성은 유일한 하나의 몸이었다.
문제는 각자가 쌓은 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선물(은사)를 받았다는데 있다. 성령이 주신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 있지만 어느 한 지체도 자기가 스스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시고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아름다운 지체는 요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개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들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영광을 받으면 모들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하나님의 배정은 얼마나 적절하고 아름다운가!
육신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은사들을 통제하는 보증과 권위이듯이 지체들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몸 또한 은사들을 고르게 하는 생명인 것이다.
은사들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라고 하셨다(마18:18,19,행1:8). 주님이 오심으로 영원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의 몸인 교회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 되었다. 우주적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이 진실한 인간의 승리이며, 주 예수님의 영원한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