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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건축을 위한 은사들(3)
본문: 고전13장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고전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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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유일한 길
건축을 위한 은사들(3)
제일 좋은 길(고전 13장)
은사들이 난무함으로 시끄러워진 고린도교회를 바로잡기 위하여 은사들은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말한 후에 제일 좋은 길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 간단하게 정리 된다.
그러나 정리만 된다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은사들은 기능에 관계 되지만 사랑은 생명과 관계 되고 생명이 있는 곳에 함께 한다. 교회는 기능의 집합체가 아니다. 생명의 유기체다. 생명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생명을 온전케 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숨 쉬고 먹고 움직이는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다. 산다는 것의 고봉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이유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오래 사느냐? 건강하게 사느냐? 는 생물학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교회는 생명체다. 죽음을 거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림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산물이다. 생명 창조의 목표는 연합에 의한 사랑이다. 연합은 왜 필요한가?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왜 만물 외에 자신의 배필로서 사람을 지으셨는가? 왜 그를 자신의 동산에 두셨으며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 하셨는가? 연합하여 사랑하기 위함이다(창2:24참).
배필이란 동역자 만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동역은 적을 물리치고 사랑의 나라를 갖기 위한 것이다. 에덴동산은 사랑의 동산이었고 새 예루살렘도 사랑의 도성이다. 동산에 들어온 적을 완전히 퇴치하는 날, 배필의 옷을 벗고 동산에서보다 더 성숙되고 아름다운 신부로서 단장된 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계21:1,2보).
교회는 사랑하기 위한 연합체다. 처음도 나중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했었다. 아무 다른 목적이 없었다. c.c.c 에서 나온 후 우리는 이유도 없었고 방향도 없고 목표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좋아해서 모여 살았던 것이다.
해어지기가 싫었기 때문에 머물렀던 것이며,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모였던 것이다. 생명이 그렇게 이끌었다. 우리들 안에는 다만 어떤 한 생명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중 한 사람에게도 무슨 은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생명-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일 좋은 길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었고 생각지도 않았었다. 다만 우리가 서로 좋아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알지 못한 한 생명이 그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끌리고 있었다. 만나고 싶었고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생명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명이다. 우리는 어떤 생명에 이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고린도 전서를 말하면서 13장에 와서 사랑은 생명이라고 말했다. 생명 아닌 것과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읽었다. “생명은 오래 참고, 생명은 온유하며,......읽기에는 좀 낯 설었지만 그냥 “사랑은..”.이라고 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오래 참아졌고,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해졌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무례히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한 항목도 율법적으로 지켜본 일이 없다. 배운 일도 없고 본받은 것도 없고 지켜본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에 바울이 말한 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은 신기하다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생명이 알고 이끌어준다. 생명은 솟아오르는 샘물 같고, 흐르는 강물 같으며, 넓은 바다와 같다. 끊이지 않고 솟아나며, 힘이 없지만 움직이고, 그릇으로 기를 수는 있지만 헤아릴 수는 없다. 길이 없지만 길이 있고, 다리가 있고 터널이 있다. 알아서 길을 찾아간다. 생각이 없지만 뜻이 있고, 말이 없지만 느낌이 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말을 한다. 진실을 말하고 있고 사랑을 풍기고 있다. 신기하다. 우리는 울고 있지 않다. 하나로 느끼고 있고 사랑으로 충만하다. 누가 주님 같은 이가 있는가? 나를 나 되게 하신 이, 나를 찾아주신 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신이,.......
주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거리가 없어진다. 정죄가 없어지고 친근함이 있다. 태고 적부터 함께 있던 분이며 모태와 같이 평안하다. 우리는 이렇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였다. 한때는 내가 이것들을 찾아 갈망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니까 부분적이던 것들이 다 폐하여졌다. 객관적으로는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턱도 없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한다.
생명의 신비함을 경험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아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집회를 했지만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았고, 다섯 시간씩 집회를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순회를 했고 매일 같이 집회를 했는데 피곤해서 쉬어본 일이 없었다. 내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나보다 이십년씩이나 젊은이들도 따라다니며 힘들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생명의 이끄심, 생명에 이끌림,......
억지로 한 것이 없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 필요 없었고, 예언하고 모든 비밀을 알 필요도 없었으며,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털어 구제할 필요도 없었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아무것도 쥐어 짜낼 필요가 없었다. 필요만큼 있었고 생각이상으로 있었다.
오래 참게 되고 온유하게 되며, 투기하지 않게 되고 자랑하지 않게 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되었다. 일부러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셈이 솟듯이 솟아났고, 물이 흐르듯 흘러갔다. 어느 사이 어린아이의 일이 사라졌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장차는 분명하게 보일 것이 알아졌다.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나도 주님을 그렇게 알아질 것이 소망 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 할 수 없다. 인간이 가기고 있는 측량의 도구로서는 계측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 이전이며 율법 이전이기 때문이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도 아니며 온유한 것이 사랑도 아니다. 다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 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은 흐른다. 그러나 흐른다고 다 물은 아닌 것처럼 사랑은 자기 몸을 불사를게 내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다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1요4:7). 인간에게서 나타나지만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게 하실 때 사랑하자! 그러면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타내심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사람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요4:7~12)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