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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도후서 서언(2)
본문: 고후1:1-2:11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고후 1장>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3.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2장>
1.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찌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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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
고린도후서 서언(2)
1:1~2:11
1. 위로와 격려
1)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음을 인하여 위로 함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시고 지정한 제자들 외에는 사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타고 살며시 들어온 어떤 사람들이 사도직을 문제 삼아 바울을 교회에서 밀어내려고 하였기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밝혀서 교회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려 하였다.
교회를 선동하면 휘말려서 동조한 사람들도 있고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싸우게 되고 분열 되는 것이다. 주장이 있으면 동조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결과적으로는 피차 치유 받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정상으로 돌아온 이상 바울은 그들을 또 책망하기 보다는 위로함으로 덮어야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사도됨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증거이며, 그가 하는 일이 그 보증인 것이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예수밖에 없었고 그가 행한 일이 교회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됨의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씨를 뿌린 농부였다. 씨는 생명이다. 씨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 씨를 뿌린 농부는 하나님이 자신을 대신해서 보내신 사자들이다. 이런 사람이 사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자의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변명함으로서 혼란에 빠졌던 교회를 위로하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 즉 자의적인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으로 혼란을 일으켰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역자인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 안에서 새 언약을 선포함으로 모든 상처를 덮고도 남을 위로와 격려를 공급할 것이다.
2) 주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으로서 위로함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위로를 받는 것은 은사를 받는 것과 다르다. 은사는 소유에 관계 된 것이지만 위로는 생명에 새겨진 것이다. 은사는 소유이기 때문에 언젠가 없어질 것이지만 위로는 생명 안에 새겨졌음으로 생명과 함께한다.
하나님의 위로는 상처를 치료하고 새 살이 나게 한다.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위로함으로 살리셨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로 산다. 그의 위로가 없다면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족하에게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창13:9).” 하였다. 결과적으로 롯은 소돔 땅 기름지고 넓은 땅을 스스로 택하여 갔고, 아브람이 갈 곳은 메마른 산지, 버려진 땅밖에 없었던 것이다(13:12참).
그런데 아브라함이 족하 롯과 헤어진 후에 절망적인 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즉시 아브람을 위로하셨던 것이다. “너 서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네게 보이는 모든 땅을 네게 주리라....(13:15~18참)”하셨고 아브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을 때 그 자신으로 위로하시고 그 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성분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이 성숙의 결과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사역자가 되게 한 다.
일시적으로 받은 은사로는 사역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위로 받은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위로하며, 주님의성분이 없는 사람이 무엇으로 위로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사방이 막힌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바울은 살 소망까지 잃었었다고 했다. 그 환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외우내환이라고 하듯이 밖에서는 심하게 핍박을 받았고, 안으로는 교회, 특히 고린도교회가 흔들림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짐작 할 수 있다. 이 고통은 씨 뿌린 자의 고유한 고통이다.
대부분의 고통은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사람 따라서 느끼는 고통은 다르다. 바울의 고통은 주님의 일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핍박은 인간의 힘으로는 잠재울 수가 없고 교회가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면 인간의 방법으로는 평정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사단이 깊숙이 개입하고 선악과가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죽음을 경험한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밖에는 의지할 수가 없고, 그 안에서 살아나신 이 안에서 밖에는 위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길은 오로지 주님만, 즉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만 의뢰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만을 의뢰하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주님의 위로”는 주님이 위로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위로라는 것이다. 주님은 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주님은 죽었으나 사신분이다. 그러므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사람에게는 죽었으나 사신 주님이 위로가 된다.
바울은 이런 위로 안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주님이 교회를 평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이나 옹호했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의뢰한 주님의 위로로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새 언약, 새 생명으로 덮으려고 두 번쩨 편지를 쓴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옛 생명의 문제다. 그러므로 해답은 새 생명이고 새 생명은 새 언약의 내용이다. 바울 안에서는 새 언약이 움직였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바로 이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대책은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은 새 생명이다.
바울 자신은 살 소망까지 끊어진데서 주님의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편이 갈라져 싸우던 교회가 평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의 일들로 인한 상처는 마치 죽은 시체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를 살아나게 하려면 생명공급이 필요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님의 생명이 필요하다. 이 생명은 새 생명이며 새 언약의 내용이다. 이 생명이 들어오면 모든 문제가 일괄 정리 된다.
옛 생명 안에서의 시비는 일괄 무효화 된다. 새 생명, 즉 예레미야로 약속하셨고, 주 예수님의 육체 되심 안에서 성취 되었으며, 죽으심으로 옛 사람을 끝내고, 부활하심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가져오신 새 생명을 제시함으로서 상처를 덮어 위로하려고 한다.
상처는 더 나은 교리나 새로운 제도로 치료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또 다른 분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생명을 치료하는 것은 더 나은 생명이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즉 새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으로 위로를 받고 살아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