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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린도후서 서언(4)
본문: 고후1:12-2:4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고후 1장>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3.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2장>
1.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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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
고린도후서 서언(4)
1:12~2:4
1. 주의 신실하심으로 위로함
1) 은혜-양심의 자랑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음이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최종적으로는 너희도 우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육체의 지혜란 인간의 지혜로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반면 하나님의 은혜란 그의 단일하고 단순하심과 같이 단순함으로 행한 것으로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행한 것이다.
이 단순함은 살 소망까지 끊어진 자리에서 오로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으로 이것이 자신의 양심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는 평생을 자랑해도 자랑이 더해지고 감사와 만족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방문계획을 연기했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이해시키려고 글을 이어갔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신실한 한사람을 만나게 된다.
2)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연기했음
15~16절에 기록한 대로 고린도_마게도니아_고린도_유대 코스를 택하기 위해서 약속을 연기한 것은 한 번 더 고린도에 가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두 번 방문함으로서 두 배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15참). 주님 안에서는 만날수록 은혜가 더해지는 것이다.
3) 기쁨으로 만나려고 연기했음
23절에는“내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라고 하였다. 고린도교회는 첫 번째 편지를 받고 회개함으로써 큰 불은 꺼진 셈이지만 아직은 남은 불씨가 있었던 것이다. 악한 형제에 대한 용서가 아직 미진했던 것이다(2:6~10).
이런 경우 사도가 거기에 간다면 바울을 재판관으로 세우고 다시 송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예견한 바울은 자신이 재판관 됨을 피하고 사랑과 기쁨 안에서 만나기를 위하여 방문을 연기하고 은혜로 해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죄 범하고 심판 받은 사람을 더 이상 정죄하는 것은 잔인한 것으로써 서로가 다시 죄를 짓는 것이다. 그 자리에 사도가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또 편이 갈라지고 아물던 상처가 다시 부어오르게 될 것이다.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위로함으로써 너무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여 하나님의 치료하는 광선이 비취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말4:2참).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바울은 미진한 문제 때문에 슬픔을 지닌 체 형제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도들을 만날 때 부정적인 것으로 슬픔을 가진 체 만나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만남은 부활 안에 있는 잔치다(요11장참). 부활 안에는 부정적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 죽고 다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계시록 21: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나오는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더 이상 사망이 없고 슬픔이나 울부짖음이나 고통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라”하였다. 진실로 그러하다.
부정적인 모든 것은 사단으로부터 발원하여 아담을 통해 옛사람인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짊어지고 죽으셨다.
옛 사람을 대표했고, 또 옛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에게 동시에 사망선고를 받고 죽었다. 옛것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고 완전하게 소멸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지막 기대와 희망까지 절규로 토해내시고 죽었다.
하나님은 아들의 마지막 절규를 들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옛사람에 속한 모든 일을 끝내셨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의 원흉인 속이는 자를 또 다시 인정하고 그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그런 것으로 만날 필요가 없다. 이미 이천년 전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모든 긍정의 원천인 그 부활 안에서 만나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내가 슬픔을 지닌 채 또 다시 여러분에게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2:1~5참)라고 하였다. 그는 사단의 일을 끝내신 주님과 한 마음이었다.
2. 그리스도는“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음(1:15~22)
1) 그리스도는 “예”가 되심
바울은 자신이 방문을 연기할 때 경솔하였겠느냐고 반문하고(17), 또 이 일을 계획할 때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라고 하였다가 “아니요”라고 하였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전파 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라고 하셨다가 “아니요”라고 하신 분이 되지 않으셨음으로, 우리 또한 그 안에서 “예”라고 하고 아니라함이 없다 하였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같은 수도관의 상부와 하부처럼 연결되어 한 물이 흘러내림과 같았다. 신실하신 하나님, “예”이신 아들, 그 안에서 “예” 가 된 사도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무엇이나 다 “아니요”가 되었으나 예수 안에서는 다 “예”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다 “아니요”였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서는 하나님께 “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의 “예”는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모든 것이 “예”가 된다. 하나님은 많은 약속을 하셨으나 아담 안에서는 아무것도 성취 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할지라도 오르간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도록 연주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아들 안에서는 얼마든지 예가 된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예”가 됨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 견고하게 붙이시고 우리에게 기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21)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예”가 되고, 사도들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도들과 함께 견고하게 붙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묶었고 하나로 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가 되지 못한 우리를 하나님께 “예”가 되신 우리의 구속자 그리스도와, 그를 통하여 “예”가 된 사도들에게 붙여주심으로 “아멘”하게 하여,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시고 그 영을 우리 마음에 보증으로 주신 것이다.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표시를 하였다는 것이고, 보증으로 그 영을 주신 것은 자신이 우리의 몫이 되기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 되심 안에서 “예”하면 우리는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은 우리의 분깃이 되는 것이다(계21:3참).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도들 안에는 “예”하고 “아니라”함이 없음으로 우리를 함께 붙여서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것이다. 신실한 사도들에게 붙여 함께 아멘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