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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새 언약 사역(3)
본문: 고후3:1-5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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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
3.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3:1~5
새 언약은 종이로 쓴 문서가 아니고 심비에 새긴 언약이다. 모세는 돌비에 새긴 언약을 가지고 와서 그 내용을 설명하고 전달했으나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살과 피로 제자들의 심비에 언약을 새겼다. 문서에 새기지 않고 심비에 새긴 것이다.
새 언약은 객관적으로 된 문서가 아니라 존재 안에 새긴 것으로서 존재적 언약이다. 때문에 그 사역은 당연히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제자들은 삼년 반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배웠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자 모든 것은 백지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존재가 사라지고 그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역사가 일시에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문서로 새길 것이 다 지워져 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졌다. 돌비나 문서에 새긴 것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효화 되는 것처럼 스승의 존재가 사라지고 역사가 지워지고 나니 할 말도 없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 초창기 국회의원 선거 합동 연설장에서 일어난 웃지도 못할 사건이 있었다. 돈은 많은 후보자인데 무식했고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후보는 학교 운동장 연단에서 자기 차례에 따라서 참모가 써 준 연설문을 펴놓고 그것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 문서를 날려버렸던 것이다. 연설 내용이 자기 심비에는 없고 원고지에만 있었음으로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군중들에게 야유만 당하고 단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새 언약은 돌비나 문서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영적인 빛이 나왔다면서 사진을 크게 찍어서 벽에 붙여 놓고 사람들을 모아서 대규모 집회를 한 일이 있었다. 참으로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사진기에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끼리 속이고 속은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가는 곳마다 문서에 기록되고 사진기에 찍힌 것밖에 알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사도의 자격에 대한 힐문을 당해야 했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예수님의 사도라 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 생전에 그를 보고 따르던 사람들로 한정했다고 한다.
바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고린도교회의 대부분은 다시 교정되었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또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없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다시 “누구의 추천서를 가지고 너희를 보러 가야 하겠느냐? 너희가 나의 추천서가 아니냐? 너희는 나로 인하여 새겨진 편지가 아니냐?”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라고 하였다.
즉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고 너희는 나의 편지라는 것이다. 나는 먹으로 종이에 쓴 추천서를 가지고 너희에게 가지 않았고 영으로 심비에 새긴 그리스도의 편지로써 너희에게 갔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돌비에 새겨 주신 말씀판을 증거로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의 명을 전했는데 이스라엘은 이 돌비를 대대로 영원히 간직하고 율법을 지켰던 것이다. 돌비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증거인 동시에 하나님이 모세를 백성의 인도자로 세웠다는 신임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를 만나는 것을 직접 보았기에(출19장참) 그가 가지고 내려온 돌 판을 보고 모세와 그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역시 형식은 다르지만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년 반이나 따르면서 모든 일을 직접 목격했음으로 사도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가시적이고 객관성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아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는 그들이 말한 대로 객관적인 증거가 없었다. 그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고 명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주관적이다. 객관적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행9:3~7참).
그는 단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신임장(편지)은 돌비에 새길 수도 없고 먹으로 종이에 기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으로 심비에 기록한 것이다.
그런즉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나의 증거가 아니냐?”고 했다. 그렇다. 복음을 듣고 받은 자가 증거다. 복음은 죽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를 사람들의 심비에 새겼다면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의 심비에 새겨진 사람인 것이다. 옛 언약은 문서가 보증이 되지만 새 언약은 심비에 새겨진 것, 즉 그 영-인격이 보증인 것이다.
새 언약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고전2:9참). 역사적이지 않다. 물고기와 떡을 먹었던 그 사람들만도 오천이 넘는다고 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역사-육체대로는 부활을 알 수 없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벧전3:18).
사도의 자격은 영으로 알고 심비에 새겨져야 한다. 그리고 그 새겨진 그리스도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새길 수 있어야 한다. 눈으로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다. 바울은 눈으로 예수를 본 일이 없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대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고전 9:1참), 교회의 안수를 받고 눈에 비늘이 벗겨졌으며,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함으로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심비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말씀을 듣는 자들의 심비에 새겨 교회로 건축되게 하였다.
그는 사도 중에 사도였고 후세를 살게 된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사도가 되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눈으로 봄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들이라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가 되었음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는 오고 오는 세대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도되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사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 즉 새 언약의 사도됨은 문서나 기타의 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심비에 그리스도가 새겨져야 하다는 사실을 증거 했음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