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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2)
본문: 고후 4:7-12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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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2)
2) 예수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짐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삶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자랑하는 것이며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우리는 그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새 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부활의 삶이다. 새 언약의 사역은 이 생명을 만민에게 공급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 포로된 자들의 향기와 편지로서 전해지고, 보화를 담은 질그릇의 자랑과, 예수의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죽음의 선고를 무시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다. 아벨을 죽이고 네피림이 되어 바벨을 건설하려고 시날에 모였다. 흩어짐을 면하자, 하늘에 이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하면서 진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아올렸으나 그 성은 허물어지고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역사에 대한 총괄적 계시다.
인간들은 살아 움직이고 심지어 성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움직인다고 살아있는 것은 아니며 성을 건설한다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음으로 위임이 있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다.
탯줄은 끊어졌고 생명공급은 단절 되었다. 전선이 끊어지면 전등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생명의 공급이 끊어지면 창조목적 안에서 신성한 위임이 있는 인생은 이미 죽은 것이며 생물적 생명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생물적인 인생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다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선행이나 악행이나 다 하나님께는 죽은 것이다. 값을 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 이것들로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계3:1참)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살았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위한다 하고, 인간의 소원인 이상향을 사모하면서 천국을 사모한다고 하며, 바벨을 건설하면서 천국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미 죽은 아담의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지어 거룩한 위임을 주신 그 사람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으며, 네피림의 시대에서 노아를 구원하시고, 바벨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으며,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고,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우게 하셨으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미 죽은 아담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도 안 되고, 율법으로 가르쳐도 안 되며, 나라를 줘도 지키지 못한다. 핍박 중에도 안 되었으며 국교가 되었어도 더욱 안 되었다. 죽은 자는 오로지 죽음의 모양과 냄새만을 품어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런 과정들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은 완전하게 처리 되어야 할 존재다. 새 창조를 위해서 물러나야 할 존재다. 이 사람을 완전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까지 가야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도 인생, 즉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끊어지면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역력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 자리까지 가야했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이 사람의 죽음, 즉 완전하게 죽은 자를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이 죽음을 위한 피할 수 없는 담보물이다. 우리가 몸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도 피해서 갈 것이다. 확인하지 못함으로 또 다시 살았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죽을 몸이 있음으로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모든 인류는 죽었다. 팔백년을 살던 구백년을 살던 일반이다. 변명의 여지기 없다. 하나님의 위임이 끊어지고 그의 생명 공급이 끊어지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죽음, 즉 예수의 죽음, 만유를 포함한 이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지고 그 진실을 살아낸다. 주님은 죽으시고 새 생명을 가져왔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은 그의 사심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진 사람은 그 진실을 살아낼 때 주님의 새 생명, 주님의 부활생명이 몸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11) 하였다.
예수의 생명,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생명이 나타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생명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역사한다(12참). 그러면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우리도 다시 살리사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 하였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증거로 인하여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14참).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지고 그 죽음을 살아낸 사역자들에게 주신 상급이요 영광이다.
아담은 어떻게 하든 예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모든 방법을 연구하고 동원한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십자가의 도만을 따른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은 없으며 새 창조 없이 새 생명은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였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1:22~25)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