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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4)
본문: 고후 5:17-21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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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3)
4)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화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이 되는 인간이 자기 위치를 이탈함으로 질서가 파괴되고 화평이 깨지고 만 것이다. 창조 질서가 회복 되고 그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인간사회가 축복 속에서 행복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창1: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늘에서는 창조자에게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어야 한다(눅2: 14).
만유는 각자의 위치가 있음으로 질서가 유지 되고 질서가 있음으로 평화롭게 된다. 이중에 어느 하나라도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질서는 파괴 되고 화평이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만유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 있다 때문에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회복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바로에게 노예가 된 이스라엘은 어린양으로 구속하셨고, 사단에게 노예가 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은 사람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 것이다.
어린양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함
여호와의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러데 아담이 위치를 이탈함으로 땅은 저주를 받고 아담의 길은 가시밭길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부름받은 땅에서 여호와의 돌보심으로 안정을 얻었다. 그런데 양식 때문에 애급에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억류되어 그의 종이 되었고 그의 영광을 위해 국고성을 건축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어린양으로 구속을 이루시고 자기 백성이 되게하여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회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이 이루어진다.
왜 어린양인가?
짐승의 왕은 사자요, 그 먹이는 어린양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왕은 바로요 그의 양식은 노예다. 이 노예가 바로로부터 해방 되려면 죽음밖에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죽지 않고서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어린양은 한 가족을 위해 잡혀져서 그 피는 죽음을 표시하기 위해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졌고, 살코기는 방안에 들어가 있는 식구들의 탈출을 위한 양식이 되었다. 피를 발라 죽음을 면했고 고기를 먹고 그 힘으로 애급에서 탈출했던 것이다(출12:7참). 어린양의 고기는 고기 중에 최고라서 최고의 먹이감이 된다고 한다.
그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그 의미가 매우 심오하다. 사단에게 유린되어 그의 종이 된 인간이 해방 되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거룩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양식 때문에 억류 되었기에 살기 위해 빠져나올 수가 없었고, 인간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유린되었기 때문에 그 욕망에 끌려 붙잡지 않아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 된 줄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사역자가 되기 전에는 오히려 하나님 같이 되게 한다는 사단을 찬양하고, 내 백성이 되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저주하는 땅과 찌르는 가시가 있음으로 감사와 찬송이 없고, 뜻과 생각이 다름으로 화평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만족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완전함으로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미완성이며 답이 없는 것이다. 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친다. 죽는 날 까지 힘만 쓰고 있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저주와 같다고 할 것이다.
하늘이 풀려야 땅이 풀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어느 곳이나 다 사막이 되고, 물이 넘치면 땅은 다 없어지고 바다만 흉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여 안식할 때 인간에게는 축복이 오는 것이다(창2:3참).
화목을 위해 예수께서 오심
예수를 흔히 어린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구속(화목)을 위한 유월절 양이라는 뜻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에 의해서 종교적인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전 인류의 위치를 회복하는 구속을 이루시고 화목(만족)하심으로서 동산의 축복을 회복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화염검으로 막았던 동산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활짝 열어놓았다. 예수는 누구나 동산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열린 문이다. 화목한 관계에서는 닫힌 문이 없다. 새 예루살렘 성은 문은 있으나 밤낮 없이 열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서 문을 열었는가?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 같이 행세한다. 그래서 화목 대신에 진노하시고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았어도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앞에 섰던 것이다. 이것을 의롭다고 여겼고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닫았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진노하시고 문을 닫았던 동산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문을 여신 것이다(롬5:17참).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심
우리는 모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화목하게 된 자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이 화목 안으로 불러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화목을 얻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한 사람 예수의 화목 안에서 화목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사람의 화목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화목을 얻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직책을 주신 것은 은혜다.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했다면 모든 사람뿐 아니라 만유가 다 화목 안에서 열린 문으로 들며 나며 은혜를 입고 평화를 누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고 전파한다면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만유가 다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