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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4)
본문: 고후7:2-16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성경 본문2.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14.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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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4)
함께 죽고 함께 삶
(고후 7:2~16.)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구속 안으로 인도하여 옛 사람을 끝나게 하고 부활로 인도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한 후에 교회로 건축 되게 하여 그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산다.
바울은 이런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첫 번째 서신을 보내고 초조한 마음으로 그 결과를 기다리다가 디도의 편에 온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하였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교회와 함께 산다. 새 언약에 대한 땅에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얻은 새 생명으로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자신의 집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제사장이 성막과 함께 살았던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어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로 인하여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교회가 그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함께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생명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 그리고 가까이 사는 사이에 인정상으로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경우는 많은 것이다. 가족 간에, 친구 간에, 혹은 교우 간에,.....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교우간이다. 어찌 이런 일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인간관계 와 그 감정 안에서의 일이라면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는 무관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한 일이면서도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육정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은 타고난 육정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신 그리스도 안에서다. 우리가 시공간적으로 함께 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 모두를 포함한 사람으로서 함께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생명이 발현된 것이다. 그가 교회와 함께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인정에 관한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소위 정이 많다는 사람도 있고 냉정하다는 사람도 있다. 다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개개인 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분이 “나는 사랑의 은사를 받은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는 누구를 보면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사님은 참 좋은 은사를 받으셨습니다.”라고 격려했던 일이 있었다.
이런 것은 인정이 많은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런 감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울에게서 나왔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어떤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제한하거나 변색시켜서는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구성요소인 새 생명은 옛 생명과 다르다. 옛 생명 안에도 얼마든지 좋게 보이는 것, 필요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시고 생활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교회가 지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정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이 충만했던 사람이 증오도 충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심은 조석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인심 속에 하나님의 거처가 마련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교회를 대했지만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으려고 결심해서가 아니라 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궤는 조각목에 금을 입혀 만들었던 것이다.
나무는 변한다. 그러나 금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변하는 나무위에 금으로 완전하게 입혔던 것이다. 이것은 부활 생명과 같다. 인생은 인생인데 새 생명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창조 된 인간이나 이탈한 인간이나 다 그 누구와도 함께 죽고 함께 살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함께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식 대신에 자기를 대려가 달라고 통곡하는 부모를 보면 안타까울 뿐인 것이다.
하물며 형제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이 몇 사람에게나 가능하겠는가? 바울이 만일 그런 사람으로서 한 말이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죄아래 처해지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멸망하게 하는 것인 줄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지 못했던 것이다. 육신 밖에 아닌 인간은 그 특성상 “함께”가 불가능하다. 한날 한 시 에 한 장소에서 서로 붙들고 죽는다 해도 실제로는 각자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주님이 나를 포함한 자리에 우리도 형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가 죽었음으로 나도 죽은 것 같이 형제가 죽는데 나도 죽는 것이며, 형제가 영광을 받는데 나도 영광을 받고, 형제가 욕을 먹으면 나도 함께 먹는 것이다.
옛 사람 안에서는 우리는 모두 각자였으나 새 사람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는 것이며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인 것이다. 혼자로서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다. 우리는 모두 교회와 함께, 즉 형제와 함께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