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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6)
본문: 고후8장~9장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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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6)
은혜를 고르게 함
고후8장~9장
바울은 가난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교회들에게 일 년 동안 헌금을 준비하게 하고 그것을 모아서 형제들 편으로 보내면서 헌금한 교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주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에 일어난 역사상 처음 발생한 교회다.
그러나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교회를 도와서 받은 은혜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움직였던 것이다. 이 중에 고린도교회도 포함되었으므로 이 편지에 언급하게 된 것이다.
사역자들의 마음은 모든 교회가 다 평안 중에 복음이 진보하기를 바라며, 받은 은혜를 고르게 나누고 누리기를 원한다.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헌금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우리도 이 문제를 집고 가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세상이든 교회이든 다 돈이 필요하다. 어느 한 면에서만 본다면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 24시간 중에 최소한 8시간은 돈을 버는 데 써야 한다. 나머지 8시간은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 하고 결국 남은 시간은 8시간밖에 없는 것이다.
90년을 산다고 해도 자기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30년뿐이다. 30년을 살기 위해서 30년은 자고 30년은 일을 한 셈이다. 그러니 돈의 비중은 단순 계산으로 인생 1/3이다. 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에게 돈이 없으면 당장에 생존이 불가능하다. 교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살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형편과 사정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이 있을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의 예는 좋은 교감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역사와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지만 생활이 있기 때문에 그 중심에는 경제생활이 있다.
그 경제생활에는 국가를 위한 것과, 성전 봉사를 위한 것이 있는데 교회의 헌금은 성전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애굽에서 다시 출발한 백성이다.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관습은 이 절대적 시작에서 출발되었다.
원론적으로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간은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경험했는가?
아무도 모른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낱 이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확실하게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유월절에 전능자의 힘으로 애굽을 나온 것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창조적인 일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창조와 출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들의 창조 신앙은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원론적인 이론에 의한 것도 아니며, 명상, 깨달음, 꿈, 신비 같은 것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와 헌신과 헌금은 당위성과 감사에서 나온 것이다.
애굽의 초태생이 죽을 때 자신들의 초태생이 구원받았으므로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임으로 그에게 드린다는 것이며, 레위인에게는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 기업지를 분배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지파가 그들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헌금에는 당위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헌금의 생활이 그들의 경제생활의 중심에 있으므로 모든 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엮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 생활에서 경제생활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경제생활이 하나님과 엮어지면 모든 생활도 따라서 엮어지므로 거룩한 생활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헌금은 여기에서 발원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은 새 생명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감사, 복음 전파를 위한 헌신, 교회 봉사자들에 대한 후원, 교회 운영에 대한 협력,....
이런 일들은 교회를 삶의 거점으로 사는 성도들의 당연한 생활이요 참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때 그때 일어나는 감사에 대한 표현,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모금 등등... 필요한 일들은 많다.
돈은 살기 위해서도 벌어야 하지만 쓰기 위해서도 벌어야 한다. 절대적인 빈곤의 시대에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 벌기만도 바빴었지만 경제성장의 혜택이 단순히 생존과 평안을 위한 것만 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은 잘 쓰고 살아야 하는데 어느 때,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다. 잘 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인 것이다.
경제생활이 반듯하면 생활도 반듯하다. 경제생활에서 거룩한 소원을 둔다면 삶이 거룩해지는 것은 당연한 축복이다. 거룩한 삶은 거룩한 헌신으로 이루어지고 헌신은 물질적인 것을 수반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 수양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에 정진하면서 헌신이 없는 것은 인생을 기만하고 허비하는 것이 아닐까?
축복된 삶은 축복된 경제생활과 엮여 있다. 재물이 많고 적음에 축복과 저주가 갈리지 않는다. 돈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어느 때에 어디에서 어떻게 벌며, 어느 때에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은 사도의 소원과 교회들의 협력으로 인하여 은혜를 고르게 하고 축복을 더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