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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7)
본문: 고후10:1~6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1.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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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7)
온유와 관용으로 권고함
(고후10:1~6)
바울의 편지는 9장까지에서 일단락 된 것 같았다. 고린도 교회가 평정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위로를 받고 심히 기쁜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에 대해서까지 감사를 표했으니 이제 인사말로 편지를 마무리할 순서인데 갑자기 옛날 일을 꺼내면서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이다(10,11장).
이 일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다 추측일 뿐이지만 맨 처음에 할 말을 맨 나중에 했다는 해석도 있고 편집하면서 잘못 끼워 넣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여간에 이 편지를 통하여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교회의 갖가지 상황에 대하여 사역자의 마음과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사도의 태도
온유와 관용으로 권고함
바울을 헐뜯는 사람들은 바울은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교회를 가르친다고 비난했던 것 같다. 이런 말은 바울을 모욕하고 그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감정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와 관용으로 권고하고 있다.
사전적인 뜻으로 보면
온유(prautes)란 자신의 분노를 지배, 통제하는 것이며, 관용이란(epieikeia)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음, 법적인 문제를 고집하지 않음, 규칙이나 규정에 매이지 않음, 가장 순수한 인간적인 정의까지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처리함...... 등의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패거리다.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눅7:34참).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다.
사역자들의 삶이 때로는 상식적으로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율법이나 규율과 상반 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며, 말로는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과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부득이 한 경우를 위해서 법이 있고 규율과 규정이 있겠지마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법과 다르고 규정이나 규율로 정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살리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법과 규정은 살리기 위한 것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죽은 자들까지도 살리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바르게 함이 우선이 아니다.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더욱이 사람을 죽여서 종교를 세우는 것은 사단의 교묘한 계략인 것이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종교)을 세우려고 아우를 죽였고, 그 후예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세우고 지키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가인의 종교는 얼마나 잔인하게 계속 아우를 핍박하고 죽이면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까지도 회개함은 없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길을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다 보면 지식과 충돌하고, 종교와 대립되기가 쉽다. 특히 교리, 계율, 관습, 제도를 어긴 경우 한편에서는 생명이 우선이라 하고 다른 편에서는 법과 제도가 중요하다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핍박을 받으셨고 바울에게도 육체를 따라 행하고, 인간적인 정리로 행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마귀와 싸우는 무기
그래서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다. 견고한 성을 파하는 능력이요,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며, 생각을 사로잡아 주께 복종하게 한다고 하였다.
마귀와 싸워 이기려면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생명의 영, 인격이 필요하다. 마귀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리는 것 외에는 다 할 수 있는 자다. 무슨 수로 대항하는가? 십자가만이 유일한 무기다. 아담은 십자가가 없었기에 패했고 예수는 십자가로 이긴 것이다. 십자가는 생명나무의 길이며 마귀를 이기는 유일한 능력이다
견고한 성을 파하는 강력
가인의 후예들은 곧바로 성을 쌓았다. 자기만의 성을 쌓은 것이다(창4:17참). 성(단절),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생존본성이다. 살기 위해 성을 쌓지만(죄) 하나님과의 생명이 단절됨으로 그 결국은 사망인 것이다.
십자가는 아담이 쌓은 견고한 단절의 성벽을 파하고 관계를 연결함으로 생명을 공급한다. 이것이 생명의 소식이요 복음이다.
모든 이론을 파함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은 이론이다. 생명 없이 이론으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론도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이론은 생명과 무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서 어떤 이론도 세우지 않았다 단순히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뿐이다. 아담은 이론으로 죽음을 은폐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의 죽음을 폭로하고 다시 산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린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함 아담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안다 하고 스스로 높아져 있다. 하나님을 구조까지 다 파악했다고 자랑하고 주장한다.
사람은 무엇이나 구조를 파악하면 다시 만드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십자가 안에서만 경험하는 것이다.
모세는 호렙산 흑암 속에서 여호와를 만났고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안다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함 아담은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산다. 그래서 복종할 수가 없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이 어떻게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제행무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만이 삶의 이유다. 기름부음이 없으면 바로 죽은 것이다. 유가에서는 도를 배우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 했고 불가에서는 깨닫지 못하면 윤회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위임이 없으면 이러나저러나 다 죽은 것이다.
생각은 근거가 없다
오직 위임, 즉 기름부음이 삶의 근거다. 십자가는 인생을 위임 안으로 이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위임에 복종케 하고 창조의 목적과 그 축복 안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