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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19)
본문: 고후11:1~15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고후11:1-15
1.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6.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9.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13.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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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사역자들의 삶(19)
중매자로서(고후11:1~15)
사역자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그의 배필, 그의 백성이 되게 하는 중매자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주인의 명을 받고 먼 길을 가서 주인이 명한 대로 아들 이삭을 위한 신부를 데리고 왔었다.
그는 자기 주인이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부자인지, 신랑감은 또 어떤 사람인지를 잘 설명하고 귀중품들을 증거물로 내놓았다. 종의 말을 듣고 증거품을 본 처녀 리브가는 즉시 따라 나왔던 것이다. 가족들이 몇 날 더 머물다 가라는 만류마저도 물리치고 바로 집을 나선 것이다.
이 고사는 구약시대에 중매자의 본보기로서 하나님의 중매자들의 예표가 된다 할 수 있다. 그는 주인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기도했고 성심을 다해서 신랑에 대하여 증거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하고 좋은 결과를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역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그 아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거함으로써 아들의 배필들로서 그의 나라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아들을 전하고 왔는데 그 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갔으므로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려고 했다. 유대인 청년 결혼 준비에는 두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들이 결혼식을 위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신부의 순결을 지켜 보장하는 일이라 한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정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율법은 섞이는 것은 정결하지 못하다 했다. 생명은 섞이면 부정함으로 죽은 것이다.
다른 예수를 받아들임
예수님은 한 분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예수와 다른 사람들이 전한 예수가 달랐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사도들의 증거가 기준이었다.
지금 예수에 대한 정보는 성경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정통이라는 사람들도, 이단이라는 사람들도 다 성경을 주장한다. 그러나 서로는 다르다고 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혼란을 방지하려고 성경을 묶어 두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제들만 보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바티칸의 해석만을 기준으로 했던 것이다.(근래에는 많이 달라졌음)
개신교회는 성경을 만인 앞에 공개하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자부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는 또 다른 통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늘 불안하다. 그래서 특정한 교리로 표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믿으라 하며 각 교파마다 자신들의 신학을 세워 놓고 사람을 교육해서 사역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천 년 이상 가톨릭에 묶여 있던 성경은 아직도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자유롭게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교리에 제한되거나 신학에 의해서 가르쳐져서는 안 될 것이다.
믿어 보고 살아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잘못된 것은 사라질 것이고 옳은 것은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순리일 것이다(행5:34~40 참).
한 분이신 예수를 왜 다르게 보는가? 당시에 다른 예수란 누구를 보고 한 말인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바울과 사도들이 전하지 않는 다른 예수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사정과는 좀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 외의 다른 예수는 모르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사도들이 전해 주고 교회들이 선정한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성경에는 한 분 예수가 전부다. 하나의 성경, 한 분 예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각각이다. 이것을 통제하려고 가톨릭은 제도로, 개신교는 교리로 견고한 성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다양한 인간의 생각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선악과로 젖었고 유대주의, 희랍 철학, 지역적 관습, 교리와 신학 등이 다양하게 얽혀져서 하나를 보아도 다 하나로 볼 수가 없고 하나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늘에 속한 분을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 알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생명 없는 물질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른 느낌, 다른 생각,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하물며 생명의 영이신 예수를 온 인류가 다 같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예수 사역의 숙제라고 할 것이다.
예수는 살아 있는 인격이며 영이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다르게 전하게 된다 할 수 있다.
나는 열 살 때부터 교회에 참여했으니까 거의 평생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십 평생을 사역자의 삶을 쉬지 않았으니 어찌 하나님을 모른다 하며 예수를 모른다 하겠는가? 마는,
유일하신 구속의 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경험은 만인 앞에 내놓기가 어렵다. 다만 나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확실히 안다고 만방에 증거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그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그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메시야)라고 남은 목숨을 다해서 전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교훈이 많다. 인생을 복되게 한다는 많은 방법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인류 전체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고치는 것도 차별이 있고 깨닫는 것도 차별이 있다. 합격과 불합격, 구원과 멸망은 어디 가도 남는다. 이것은 완전한 대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2:4참)
예수는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 죽음에서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셨고 다시 살으심에서도 하나 되게 하셨다. 창조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것을 완전하게 회복하신 것이다.
그 안에 함께 누리는 축복이 있다. 혼자서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보좌에 우리와 함께 앉으셨다.
나는 나와 모든 인류를 새로 만드신 분을 안다. 그 누구도 이분의 구원을 모방할 수 없으며, 더욱이 가짜는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예수, 다른 그리스도는 있을 수가 없다.
속지 말아야 한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은 없다. 그와 함께 죽은 자가 그의 죽음의 증인이며, 그와 함께 다시 산 자가 그의 부활의 증인이다.
자신이 빠진 예수의 죽음 자신이 없는 예수의 부활을 전한다면 이런 것이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