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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22)
본문: 고후11:1~12:10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고후 1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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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의 사역자의 삶(22)
중매자로서(4)
자랑함으로(11:1~12:~10)
중매자는 당연히 주님을 자랑해야 하지만 자신도 자랑하여야 한다.
처녀는 아직 신랑을 본 바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랑을 자랑해도 중매자의 어떠함을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매자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신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행1:8). 복음은 예수 증거다.
교리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다. 복음은 율법 아래서 죽임당하시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사신 예수 자신이다.
이것은 죄와 율법 아래서 죽임당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분을 자랑하고 소개하는 사람은 이분이 자랑스러운 만큼 자신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분은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 신랑으로서 자랑스럽고, 나는 그의 신부 됨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세상도 자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아담은 독립을 자랑하고 싶었으나 두려움이 먼저 왔다(창3:8~10).
연합을 거부하니 외로움이 오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 두려운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눠질수록 외롭고 높아질수록 두려운 것이다. 왜 땅(제1 환경)은 나를 저주하고, 왜 앞길(소원)은 가시덤불이 가로막으며, 왜 이마(자랑)에는 땀이 흐르는가? 길을 이탈했기 때문이다(창3:17~19).
자랑하고 살려는 것이 인생의 소원이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거짓 자랑뿐이고 참 자랑은 없는 것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나 쭉정이뿐이고 열심히 살았으나 허무뿐이다. 그러나 사역자에게는 참 된 자랑이 있다. 바울은 자랑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자랑함 바울은 주로 유대인 사역자들이라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했다. 이들은 예수를 믿되 유대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선택받은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그 전통과 율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초기에는 대부분 구성원이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조상의 전통을 끊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 유대교는 천 년을 지배했다. 그 전통, 그 의식, 그 관습이 그들의 뼛속까지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복음은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위에 새로 주신 것이라고 하니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를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과 같지만 더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일꾼 됨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조상들은 열매를 기대하고 수고했으나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더욱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계주경기에서 마지막 주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았고 죽음 직전까지 위험을 겪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받은 상급이 귀하기 때문이다.
연약하므로 자랑함(12:1~10) 그는 환상과 계시를 봄으로써 삼층천의 경험을 한 한 사람(자신)을 자랑할 수 있으나(12:1~2) 자신은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하였다.
놀라운 환상과 계시를 본 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보여 주신 이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은혜는 나의 어떠함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베푸신 이의 선물인 것이다(엡2:8).
그러므로 은혜는 참 되다. 내가 쟁취한 것은 불법한 것이다(가인). 그러나 받은 것은 참 된 것이다.
그는 오히려 고통으로 인하여 주께 구하였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는 답을 얻었으므로 크게 기쁘다는 것이다(9).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아담은 강해지려고 선악과를 먹었으나 사단의 능력만 넘쳐났다(창6:1~4). 바벨을 건설하여 하나님을 거역했고 애굽을 세워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연약함은 자랑이 되는 것이다.
교회를 사랑하므로 자랑함(12:11~21) 바울은 그의 사역생활 대부분이 일해서 생활하는 자비량이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받았으나 또 다른 교회에서는 받지 않았다. 고린도교회는 후자에 속한다. 사정과 형편이 달랐을 것이다.
돈이란 묘한 것이다. 내도 받지 못할 것이 있는가 하면 받았어도 돌려줘야 할 것도 있고, 반대로 좀 내라고 해서 받아야 할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재물을 따라서 복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한다.”고 하였고 “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나 자신까지도 허비하리라(14,15)." 하였다.
고린도교회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이 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에 관례상으로는 가르치는 자는 수고비를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마음은 교회가 무리 없이 성장하기를 바란 것이다. 자신이 노력해서 자비량하더라도 교회가 세워지기만을 바랐기 때문이었다(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