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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사도직에 대하여(1)
본문: 갈1:1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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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A. 사도직에 대하여
갈1:1
1)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사도직은 근원과 방법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했다.
여기 사람이란 위치를 이탈한 인간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다. 바울은 이런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과 방법에 따라 사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좋다는 교훈이 있다. 하지만 모두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혹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었다 해도 인간에게 맡겨지면 위치를 이탈한 인간성(죄)으로 인하여 다시 변질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연고로 종교마다 거룩하게 보이려는 제도와 직분을 만들고 그 근원을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꾸미지마는 아담으로부터 온 것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교회 안의 일부(유대주의자들)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단만을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됨을 깎아내리고 그가 전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증거는 그로 인하여 나타난 복음과 교회였던 것이다.
2)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님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손, 즉 어떤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단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제도에 의해서 임명되고 파송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격증과 임명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자격증도 없고 임명장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유대교의 공회(본부)로부터 파송을 받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를 삼을 만도 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때때로 인간이 정해놓은 제도나 생각이나 상식을 훌쩍 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경우였던 것이다. 그런즉 누가 무엇을 정해놓고 이것은 변개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던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사정과 상관없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의 기본 입장이며 자세인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움직임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또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정해진 제사는 단 지파처럼 다른 곳에서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움직이지만 제단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법궤는 움직일 수 있지만 제사는 하나다. 이와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이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지마는 그의 구속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얼마든지 믿는 자들에게로 움직여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규정되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 안에는 자유함이 있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직의 근원은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었던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됨
예수는 유대 종교와 세상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일으켜 주셔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자신을 주장했을까? 다메섹 사건(행9장 참조)에서 그는 옛것에 대하여 죽고 새것에 대하여 살아났다. 예수를 핍박하던 길은 끝이 났고, 예수를 증거하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옛것과 새것이 완전하게 갈라졌으며 이로 인하여 죽음과 삶이 갈라지고 온전하게 새것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는 사람으로 시작된 것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은 다 없어졌다. 오로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뿐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근거는 사람의 생각이나 방법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뿐이고 자신의 자랑도 이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핍박하는 사람을 불러 사람의 생각으로나, 그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에 속하지 않는 한 사람을 만들고 그를 사도로 세우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에게는 기준이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다. 생명 안에는 법이 있고 자유가 있다. 이율배반인 것처럼 보이나 살리는 것이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은 논리적이고 앞뒤가 맞는 것 같으나 살리는 자유가 없으므로 죽이게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논리가 없는 것 같으나 자유가 있으므로 살리는 것이다. 할렐루야!
죽고 다시 살아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은 보편적인 사실이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안에 우리 모두뿐 아니라 만유가 포함된다. 이 평범한 사실을 통하여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생에게 예고하고, 선고되었던(창2:17,3:19 )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아담을 대신하여 사형집행을 당하신 것이다(요19:30참).
아담은 이미 죽었다. 영원한 생명의 공급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살고 있었지 하나님 생명에서는 벌써 죽은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람들, 알 수 있는 사람들, 알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즉시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었고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빛이 없어져 버린 것과 같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다른 동물들은 천연적 생명으로 살다가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천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생은 동물 안에 포함되고, 동물은 인생 안에 포함된 것 외에는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동물 안에 포함된 것은 알고, 영원한 생명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흙으로 빚은 한 존재에게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다(창1:26,7참). 창조에 있어서는 동물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창조되지 않은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창1:26참).
그러므로 이 생명에서 끊어지면 “사람”으로서는 죽은 것이며 동물과 함께 천연적인 생명을 누리다가 그들과 함께 잠시 후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창3:19참).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나 신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 이런 사람들이 만든 방법에 의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증인으로서 사도는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직의 근거와 권위는 사람과 그의 손으로 하지 않는 권위로부터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