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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유일한 복음의 사역자(1)
본문: 갈1:1~10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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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B. 유일한 복음의 사역자
갈1:1~10
죽고 다시 사신 이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돌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인간성의 한계 위에 내려진 마지막 선물이다.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는 새 창조에 속한 유일한 길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선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영원한 생명이 없고, 사탄과 연결되어 그를 따르고 표현하는 선악을 아는 생명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고기의 생명으로는 공중을 나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들은 가르치려 했고, 정치가들은 다스리려 했으나 다 불가능했다. 생명은 고칠 수가 없다. 바꾸어야 한다. 바꾸는 일은 창조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은 자만이 다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창조자의 손에 붙잡혔다.
율법에 정해진 대로, 혹은 규례대로 살던 사람이 죽고 다시 사신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이다. 새로운 사람은 새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신다.
새 생명 안에는 선악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고 사람이 따르는 법이 있다. 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은(딤후 2:8참)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그에게 다른 복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언약(구약)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고 다른 길은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고 다시 사신이의 부름을 받고 그의 사도가 된 것이다.
이 사람, 자신이 본성적으로 증오하는 한 사람, 바로 아담이 싫어했던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주여 뉘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앞이 캄캄해졌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덮어버린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믿고 추종했던 모든 것이 먹통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어찌 하오리까?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참).” 이래서 그는 오던 길에 대하여는 죽고, 주님이 지시하신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길은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제도, 즉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단(본부)으로부터 파송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즉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은(딤전2:8참)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분이다.”
여기 악한 세대란 아담의 세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모든 세대들을 포함하며, 이 세대의 주관자는 아담을 인격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여 신격에 도전하게 하는 사단이다(엡6:12참).
또 우리 죄들이란 아담의 죄로부터 율법으로 증명된 모든 죄를 포함한 것들로서 선악과를 먹고 위치를 이탈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혹 율법을 통하여 안다 해도 따를 수 없는 사람 자신(본성-존재)과 그의 행위이다(롬7:17참).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이며 그 나라다. 그런데 아담은 이 죄로 인하여 그 동산을 잃었고 우리는 그의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 즉 본성적으로 불가능한 인간을 건져내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복원시키려고 세상에 오셨고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드리신 분이다.
인생이 자기 위치에 있다면 안정과 평안을 얻을 것이며, 합당하게 쓰인다면 만족과 감사가 있을 것이며 영광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위치가 없으니 불안정하여 평안이 없고, 쓰일 일에 쓰이지 못하니 허무하고 불만과 치욕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문제다. 그런데 헛되이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인도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한 어떤 사람은 여기 ‘내가’ 곧 인간 각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나도 어렸을 때 헤매던 중에 문듯 이런 생각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었는데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있다면 왜 방황했겠는가?
나 홀로 사는 길...은 있었으나 아버지께로 가는 길, 아버지를 아는 그 진실, 아버지와 연합하는 그 생명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보니 그는 그 길, 그 진실, 그 생명이고, 그의 길은 내가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이며, 그 진실은 내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위치이며, 그 생명은 내가 아버지와 연합할 수 있는 인격이며 본성이었다.
나는 유대교로부터 버림받고 로마 정권에 의해 처형된, 즉 이탈자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람 예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안에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으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했던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류 구원의 원본으로서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진실한 나라가 있다.
구원된 인생의 원본으로서 복음 자체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이 사람과 하나가 되는가? 바울은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죽은 이 사람 안에 포함되었고, 그가 죽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히9:17참)
제자들은 그를 알고 그와 함께 행하려고 열심히 따라다녔으나 그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것을 보고 그를 버려두고 다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포함하고 죽은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을 때 제자들도 함께 죽었고, 우리도 함께 죽었으며,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죽은 것이다.
아담은 죽었다. 아담의 마지막 소망은 예수께서 뛰어내리지 못함으로 끝이 났다.
사람이 뛰어내려 사는 것,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이도록 한, 사단이 말했던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끝이 났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던 사람도 뛰어내려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면 사단의 거짓말은 폭로되었고, 아담은 끝이 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고했고(창2:17,3:19참) 예수는 집행을 당함으로 완전하게 다 끝이 난 것이다(요19:30참).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 안에 포함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같은 모양)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하였다.
아담은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선악과를 먹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예수는 또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사형집행을 당한 후에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어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대표자가 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면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참)”
바울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사역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