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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주님이 주신 자유
본문: 갈2:4~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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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F. 주님이 주신 자유
갈2:4~
사람은 여러 부분에서 자유를 구하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 자유 외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자유 등, 그런데 모든 자유는 다 무한정할 수가 없고 또 무재한적일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한 면으로는 제한적이다. 제한 없는 자유는 없다는 것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지만 그 이전에 자유를 얻고 누리려면 제한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도 그렇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자유다. 그래서 이 믿음을 통일시키고 통젱하려고 신조를 만들고 조직을 만들며 제도를 운영한다.
그런데 우리의 구속자로서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실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그 사람이다. 뛰어내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자유)은 예수께서 극도의 제한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졌다.(사 53;참)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달아놓았던 놋 뱀은 죽었음으로 독(뛰어내릴 힘)이 없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뱀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지 못하고 그 주변만 돌고 있는 것은 이 뱀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다른 뱀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이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 고향, 즉 버리고 왔다고 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뛰어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사단은 여기까지 따라와서 또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예수,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예수를 믿고 있고, 어떤 이들은 그 예수를 자신이 잘 아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예수를 만난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죽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어서 얻고 누리려고 했던 모든 욕망을 다 채울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속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고 부활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며, 돌로 떡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하는 양식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즉 생명의 공급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동산(세계)을 관리하도록 맡기셨고, 깊이 잠든 아담의 갈빗대를 빼내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하와를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자신의 가능성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 아들의 형상으로서 이삭을 주셨고, 야곱의 욕망이 끊어졌을 때 세상을 지배하는 자의 영광을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제한 속에 주어진 다는 것이다.
아담은 제한 속의 자유가 싫었기 때문에 사단의 말을 믿게 된 것이다. 사람은 그 때부터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믿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였던 것이다.
만물은 각기 자기에게 적당한 자유 안에서 생존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은 무한정한 욕망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지금 사람들은 옛날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엄청나게 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인간의 문제는 여전하다. 참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이다(창1:26,7참). 그런데 동산을 떠났음으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나무 뒤에 숨었었고, 말마다 옹색한 변명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위치를 벗어났음으로 자유를 잃은 것이다. 생명의 공급은 받지 못하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고 보니 그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위치를 잃었으니 불안하고 직임을 버렸으니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율법을 시인하고 지키겠다고 받았다. 법을 지키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 법이 올무가 되어 더욱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었으나 길이 좋은 만큼 올무도 확실해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율법은 좋은 것이라고 양심이 인정한다. 그러므로 지키지 못하면 그 짐은 더욱 무거워지고, 버리면 야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였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을 바라봄으로서 인간 본연의 위치로 돌아감으로서 받는 것이다. 이 위치를 떠나면 얽매이기 쉬운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그를 찾으려고 만들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람에게 올가미가 된다. 율법과 계율을 지키고 종교적인 명령들을 수행하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든가, 인간을 수양하면 하나님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든가...... 이런 것들로 얽어매어 종을 삼는 것이다.
아담의 소원은 돌로 떡을 만들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소원을 이루려고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선악과를 먹고, 다시 잘 해 보려고 율법을 받아들이고 종교적 관습을 행하였지마는 온 인류를 포함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를 뛰어내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으심 안에서 아담의 소원과 기대는 완전하게 끝이 났고, 우리를 얽매이던 모든 것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 즉 새 생명이 시작 된 것이다.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고전15:20,23,약1:18참). 얽매이던 모든 것들이 끝이 나고 새 생명이 왔다. 새 생명으로 사니 자유다. ( 롬 6:4참) 이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받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