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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아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
본문: 갈2:16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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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아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
갈2: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생이 그 지으신 분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믿지 않고, 그의 말씀을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째 조건은 그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던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히11장 참조). 그런데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야 한다는 어떤 이들의 교훈에 휘말린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법은 중요하지만 믿음은 율법 이전에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에게 친히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보다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은 무슨 율법의 행위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이다(창15:5,6 참). 믿음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온전한 관계의 최우선은 믿음이다(히11장 참조).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모든 관계는 열리고 문제는 해결된다. 왜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온 세상을 단번에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전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믿음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 편으로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하나님 편으로 보면 사람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유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공급하고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표현하는 생명연합의 구조에서 어느 한편이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소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은 믿음이 없어서 권리를 포기했으므로 동산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믿음의 회복을 시작하셨으나 그 믿음이 아직 다 회복되지 못했기에 몽학선생 격인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보여준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왜 그 사이에 율법을 주셨으며 이제 다시 아들을 믿어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인가?
율법을 주시기 전 시대는 관계가 개인적이었다. 그러나 광야에 나온 백성은 단체적이었다. 개인은 각자의 과정에서 믿음이 필요할 때 믿음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단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킬 수 있는 일률적인 법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인간의 완악함이 드러났다. 일률적인 법이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형식적인 법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완악함을 해결하고 더 깊은 관계를 위해서 근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것이다. 노아의 때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믿음의 요구는 일방적이었다. “방주를 만들어서 홍수를 대비하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내 백성을 인도하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믿고 따랐으므로 약속을 받았고 후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 왕노릇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일한 아들을 주셨고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다. (요3:16참) 그러면 아들이라는 분으로서 예수는 어떤 분인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 안에서 알 수 있는 그분은 유대인으로 낳으셨고, 이런저런 이적들을 행하심을 본 목격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 아들,...... 등으로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이며,...
그런데 마지막에는 유대공회의 분노를 샀고 그들의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한 자”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분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을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어 그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의 나라가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같이 되려고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인간의 문제의 근원은 위치이탈이다. 그 위치를 인격이라 한다면 인격을 이탈한 것이다.
만유는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다 쓸모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 무용해지고 방해자가 되어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는 물론 만유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다. 창조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만유를 중보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중보자가 이탈되었으면 모든 것이 다 비정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제 위치로 돌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했던 것처럼 인류를 본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다. 인격회복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기 위해서 사람에게서 이 인격을 유린한 것이다.
이 인격의 회복(구속)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절대적 위치에 있다. 역사 이래로 많은 스승들이 있었으나 다 수리하려 하는 사람들이었지 회복하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수는 수리하는 자가 아니다. 바꾸어 회복하는 자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믿어야 한다. 유린 당하여 잃어버렸던 우리 인격으로, 인간 원형으로, 참사람으로, 하나님 아들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로,..... 믿으면 바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아들을 본다. 아브라함은 약속(아들)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으나 우리는 지금 그 약속의 실재(아들)를 보고 있다. 마귀가 유린했던 잃어버린 우리의 인격을 이 사람 아들에게서 다시 받고,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다(갈2:20참).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