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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새 언약(6)
본문: 히1:3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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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언약(6)
아들로 말씀하심(5)
2. 후사로서의 아들로 말씀하심
4) 보좌 우편의 통치
보좌는 왕의 자리로서 권세 그 자체이고 그 우편은 통치의 권위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아들로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통치의 권위를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는 아들에 의해서 행사되고 확고하게 보증된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에서 만물을 다스릴 자로 택하여 지어진 자다(창1:26,7 참). 그런데 아담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그 권위를 잃은 것이다.
아담은 생명의 하나님에게서 독립함으로 권세의 원천(보좌)으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에서 끊어졌다. 끊어진 것은 죽은 것이다. 죽었으므로 권위도 함께 없어졌다. 소중한 위임을 잃은 것이다.
부름을 받았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가 있는가 하면 택함은 받았으나 또 위임은 받지 못한 자가 있다. 아담은 부름받고 택함받았으나 권세를 위임받지 못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신성한 위임을 잃은 아담은 세상 권세를 얻고자 사단에게 절하며(마4:8) 헛되이 인생을 소모하지만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또 답이 아닌 종교나 철학 같은 것들을 찾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이 위임을 회복할 것인가?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고 원인을 알려면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근원으로부터 온 자라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므로 아버지께로 간다.” 하였고(요7;28)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므로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요8:28).” 하셨다. 그는 나온 곳과 돌아갈 곳을 아신 분이다.
인류의 지도자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예수와 같이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이미 발생 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여러 가지 묘법들을 제시하고 인간의 노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원을 모르면 노력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병의 근원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근원이 있고 근원에서 왔다 하였으며 근원을 인정하고 복종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생의 근원을 아는 사람으로서 병의 근원도 알아 해결하는 탁월한 의사이시고 구원자시다.
나는 이분을 만나자마자 알려 하면 알려 할수록, 풀어 보려 하면 풀어 볼수록 더 어려워졌던 문제들이 단순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끼었던 하늘이 청명하게 드러났으므로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던 내 인생의 근원이 밝히 드러났다.
이제는 의심도 없어졌고 헤매고 찾을 것도 없어졌다. 방황도 분요함도 다 없어졌다. 근원으로 연결되니까 단순한 답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아버지께로 가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간다 하였으나 그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버지께로 간 것인가? 유대인의 신앙으로, 희랍인의 지혜로 이것을 믿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유대인들은 해방을 위해서 문설주에 바를 양의 피가 필요했고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서 제단에서 흘린 동물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으로는 접하고 있었으나 아버지께로 가는 길, 즉 근원으로 가는 길이 십자가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도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야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한 인간의 상상은 매우 영화롭고 신비로울 것이라는 것이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했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갔다 했으며 모세는 무덤이 없다 했던 유대인들로서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근원에서 길을 잃어버린 인류와 함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 이 길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길을 잃었으면 거꾸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나온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담이 어디 있었든지? 그 과일이 무슨 과일인지? 왜 먹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십자가를 보니 나의 본 자리, 인간 본연의 위치. 깜깜해서 보이지 않던 그 자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단지 흙으로 빚어져서 숨이 불어넣어진 피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 사람, 무엇을 위해서 지어졌는지 지으신 이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인생,.........
이것을 알고 보니 인생이 너무 단순해졌다. 지으신 이의 통치를 따라서 사는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닌가? 진실이다.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당당해졌다.
예수께서는 왜 당당하셨던가? 그의 말씀은 왜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었던가 (마7:29, 막1:22).
알았다! 권세는 정해진 위치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은 사람으로서, 정해진 위치에서 권세가 나온다. 사람은 정해진 위치를 이탈했으므로 무엇을 해도 거역이고 무엇을 말해도 거짓인 것이다. 권세가 없고 공허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우편에서 말씀하신다. 그래서 권세가 있다. 그는 이 위치를 회복하여 말씀하시고 그 권세를 인생과 함께한다.
아담은 스스로 보좌에서 통치하는 자가 되려 하다가 사단의 종이 되었다.
사람에게 '~케 하라(창1:27참)'는 것은 왕의 명령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명을 받아서 일하도록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꾸미느라고 중국에서는 왕이 되면 천명을 받았다 하였으나 왕권을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불교에서는 아예 천명이라는 사상이 없다. 자아 중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까지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셨고 히브리서에는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하였으며, 계시록 마지막에도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하였다.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치는 영원히 보좌 우편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가 없이는 되어진 것이 없다(요1:3).” 하였으나 그가 만물을 지었다 하지는 않았다.
선악과로 인하여 분열된 인간은 무슨 이유, 무슨 형태로든지 다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었다는 것이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인간은 아버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므로 스스로 그 우편에 계신 아들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 위치와 그 영광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이고 선물이다.
이 영광스런 위치를 예수께서 회복하신 것이다. 아담은 아들이 되도록 모든 조건을 다 받았으나 생명의 열매를 거부함으로써 아들의 위치를 잃었다.
예수는 생명의 열매를 먹고 그 길을 따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아들의 위치를 확보하셨다. 아들은 우리 주님이시고 인류의 구속자시다.
아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만유를 포함하심으로 우리는 그의 구속에 참여하고 값없이 이 영광을 그와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 어떠한 복음인가! 그가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이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심은 아들로 통치하심이다.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하였다.
아들은 인간 본연의 위치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아들이 되어 말씀하심으로 그의 말씀하심은 곧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것이며 말씀하심은 곧 통치하심이다.
말씀하심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셨다. 장막(성막-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장막, 곧 지성소에서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죄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혔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게 되며, 지성소를 가렸던 휘장은 찢어졌고 새롭고도 산길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