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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7월 27일
제목: 1. 새롭게 함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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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말씀 요약
Ⅰ. 새롭게 함
서언 :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하셨다. 전능자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람을 통하여 새롭게 하려고 하셨다. 새롭게 함이란 용도와 목적을 지으신 이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새롭게 됨으로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롬8:19~21).
‘만물’이란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이다. 성경은 “태초에 전능자가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보라, 내가(예수)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22:13).”로 마쳤다. 전능자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신 것이다.
창조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고 새롭게 하는 것은 있는 것의 의미와 용도를 바꾸는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기계적이고 숙명적이다. 그러나 새로워지면 의미와 용도가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창조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새롭게 할 자로 인간을 지으셨다(창1:26,27참).
그러므로 기계적이고 숙명적인 피조물들은 인간을 통해서 창조자의 좋으신 뜻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됨으로 새롭게 되어 피조물의 영광에 이른다(롬8:21참).
여기에 인간의 사명과 책임이 있다. 인간이 창조자의 좋으신 뜻을 알고 순종하면 만물은 영광을 받고 우주는 평화로워지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반대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이 사명을 저버렸으므로 만물이 탄식하게 된 것이다(롬8:22참).
1. 새롭게 하기 위해 구속이 필요함
그러므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먼저 인격의 회복이 필요하다. 예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격으로서 본분에서 이탈한 인간을 새롭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인간이 새로워지면 만유가 새로워진다.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개선해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훈으로 가르쳐 왔지만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치가 이탈된 상태를 그대로 둔 채로 개선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무슨 방법이든지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위치를 바르게 해야 한다.
가. 구속은 위치를 바꾸는 것임
여호와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선하면 된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만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교육을 받으면, 수양을 하면, 종교를 믿으면 개선될 수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다. 개선을 위한 노력 이전에 구속을 받아야 한다. 타락한 인생은 구속을 통해서만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으로 들어오는 길을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막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막아 놓으신 것을 누가 무슨 방법으로 열 수 있단 말인가? 구속을 받지 않고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생은 구속을 통해서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고 그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동산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계2:7참).
나도 전에는 왜 구속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왜 내 죄 때문에, 구속을 위해 죽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하나님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개선되어야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아들을 희생시켜야 될 만큼 죽어 마땅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목회를 하면서도, 누구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구속을 받아야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종교 안에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기독교는 믿음과 기도라는 방법으로,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는 방법으로, 유교는 덕을 행하는 것으로, 불교는 진리를 깨닫고 선행을 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개선해 보려는 것이다.
종교 안에 있는 목표는 표현은 달라도 다 하나님의 동산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길을 막아놓으셨다(창3:24참).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속 안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동산에 갈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동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 죽음으로 구속함
1) 억류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방법으로도 애굽에서 나올 수 없었다. 사백 년 간 애굽에 억류되어 종 되었던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길은 범죄한 인간이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에게 사로잡힌 인간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그의 손을 벗어나서 에덴으로 돌아갈 길은 없었던 것이다(빠져나갈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단지 양의 피로 구속을 받고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나왔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구약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인격으로 회복됨으로써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사단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위의 두 사건은 하나는 육신적이고 역사적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서 구원의 같은 유형인 것이다. 그때 어린양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었고, 지금 예수는 인류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바로의 손에서, 지금 우리는 사단의 손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나보다 강한 자에게 붙잡혔을 경우에는 죽지 않고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 바로의 손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었다면 애초에 바로에게 억류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단의 손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다면 처음부터 그에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는 이스라엘보다 강하고 사단은 인류보다 강한 자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억류되었고 인류는 사단에게 억류되었다. 바로는 사단의 상징이다. 우리는 바로에게 억류된 일이 없지만 사단에게 억류되었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자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구속이라는 신기한 방법으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았던 것처럼 인류는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억류에서 해방을 받는 것이다(고전5:7참).
가) 바로에게서 풀려나오기 위하여 유월절 양이 죽었음
죽음의 사자는 문에 발린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다고 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장자를 멸하러 왔던 사자가 이미 죽은 집을 다시 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다르게 보면 바로도 피(죽음)를 보고 놓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도 사람도 죽은 자를 다시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쓸모가 있어서 붙잡았고 사단은 인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린한 것이다. 그러니까 힘이 없어서 붙잡힌 자는 죽어서 쓸모가 없어져야 놓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로에게 쓸모가 없어져서 풀려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인류를 사단에게서 해방하려고 예수는 죄에 대하여 죽으셨음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붙잡혔던 것은 양식 때문이었고 인류가 사단에게 유린된 것은 지식으로 하나님같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이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6:10).” 라 하였다. 하나님같이 된 죄는 죽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2) 해방된 백성
이스라엘은 바로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거처인 성막을 건축했으며 그의 통치를 위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이 죄에서 해방된 인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몸인 교회를 건축한다. 바로의 종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듯이 사단의 종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 이것이 새로워 진 것이다.
가) 생명의 말씀을 먹고 삶
예수의 구속 안으로 돌아오면 생명나무 열매인 말씀을 먹는다. 하나님 말씀을 훌륭한 교훈으로 들으면 도움은 되지만 생명나무에 이를 수는 없다. 구속 안에서 들어야 하나님 말씀이 생명나무가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들어야 생명나무가 된다. 구속 안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다. 그러면 교회가 되고 교회는 왕국이 되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
나) 예수의 왕 되심을 믿음
구속 안에서 보기 전에는 성경의 결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어떻게 어린양이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가 돌아오겠는가? 어린양이 우주를 통치하는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호랑이나 사자의 통치로도 안 되는데 어떻게 어린양의 통치가 이루어지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왕이 되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인가.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민족은 없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영광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타고 돌아오는 다윗과 같은 왕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런 왕은 오지 않았고.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가? 왕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왕이라고 하니까 저주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어린양 예수의 구속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왕국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통곡의 벽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양이 세상의 왕이 되겠는가? 이것이 모순이다. 그렇지만 구속 안에서는 어린양이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게 믿어진다. 이것이 비밀이다. 내 생명이 바뀌어 목표와 입장과 신분과 체질이 바뀌고 내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류가 볼 때 어린양은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다. 구속을 통해서 비로소 어린양이 왕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부르짖고 죽은 예수가 진리(참)의 사람, 새 인류의 조상, 영원한 왕이라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 예수의 부활을 믿음
그런즉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을 믿을 것인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요1 5:5참조).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1 4:15참조).
그러므로 이 사람을 믿으면, 이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영광스러운 분으로 믿는다면 인생과 세계가 달라지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요1 5:5참) 생각하고 보는 것이 달라지고 견해가 달라지고 소망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진다. 새것이 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사람을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하였다.
2. 창조와 구속으로 새롭게 함
하나님은 그의 경륜 안에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셨다.
가. 전능자가 능력으로 만유를 창조하심
하나님이란 전능자의 칭호다. 성경은 맨 처음에 그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는데(창1:1참), 인간은 이미 천지가 창조된 후에 지어졌다. 그러니까 창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보고 전능자가 창조했다고 한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이것이 창조 신앙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고 지식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한심한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도 만들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전능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고 진실이다. 젊었을 때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번민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혼자서 번뇌하거나 말거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여전히 있었다. 나는 홀로 우주를 짊어지고 망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천지는 창조되었다. 창조라는 말이 부담스러우면 천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면 된다. 그것이 창조를 믿는 것이다. 어차피 아무도 더 이상 알 수 없으니까 그 정도나 저 정도나 같은 수준이다. 다만 이 천지는 전능자가 창조한 것이며, 이 우주를 있도록 한 이는 전능자인 것이다.
나. 사람에게 만유를 새롭게 하도록 위임함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말씀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1장 2절부터는 전능자가 만물을 지으신 것을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다. 계시는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린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것도 많다는 것이다.
이 계시는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데로, 새롭게 하는 것을 알려 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데서 “빛이 있으라…….”는 데로 진보하는 것이다. 이 창조는 전능자가 무엇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함을 받았어도 피조물인 만유는 모두 기계적이고 숙명적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는 기계적이고 숙명적인 피조물들을 창조자의 기뻐하신 뜻대로 그의 자유를 위해 새롭게 할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만물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다. 이름은 그것의 의미와 용도를 정의하고 표시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름을 지은 대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인간의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시고 인간은 사용자인 셈이다. 기계는 만드는 사람이 있고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만든 자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서 사용하면 그 기계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아담은 스스로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사단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만물은 더 이상 새로워 지지 못하고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롬8:19참).
다. 예수는 죽으심과 부활로 인류를 새롭게 함
창조 안의 영원한 경륜은 아담을 통하여 만유를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사용될 때까지 새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이탈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예수는 중단 된 하나님의 경륜을 그의 기뻐하신 뜻대로 회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려고 오신 분이다.
1) 죽으심으로 구속하심
아담이 이탈함으로 만유의 새롭게 됨이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아담을 원위치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하여 아담의 죄와 같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 그는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 같은 능력도 가지신 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같이 되려고 금지한 과실을 먹고 어설프게 하나님같이 되어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예수는 실제로 자연을 정복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가 인생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려 보라는 인간들의 요청과 시험이 있었음에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죽으신 것이다.
그 자리에는 예수가 속히 죽어 버리기를 기다리는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자기들의 주님이 살아나기를 고대하는 제자들도 함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확실하게 예수는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요19:34,35참)
이로써 예수 안에서 보여진 인간은 무슨 온전함이나 지식이나 능력을 가진다 해도 사단이 말한 것과 같은 전능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실한 사람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심판하시고 구속하셨다.
이제 하나님 앞에는 이 사람밖에 없다. 사단의 말을 듣고 그를 추종하던 인간은 심판 받고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 예수 안에서만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시고 그의 모든 말씀을 이르시고 그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형편과 사정에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심판 받았고, 그 피로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1:7,골1:14참). 나는 그대로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새사람으로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는 이제 예수 안에서 새사람만을 상대하신다.
2) 부활로 새 생명을 주심
예수는 나를 아담의 죄 가운데서 해방시켜 원래의 인간으로 위치를 회복시켜 주셨다. 헛된 소망으로 자고했던 나는 할 말이 없게 되었고 지식과 능력으로 부풀어졌던 몸집은 풍선처럼 쪼그라졌다. 이것이 갈릴리로 다시 내려갔던 제자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이 새 힘을 얻고 주님을 새롭게 증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선을 얻어먹은 사람, 친히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 본 사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사람…….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있지만 우리는 그 현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자들이 놀랍도록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오순절을 겪으면서 완전히 변해서 물불을 모르고 예수께서 다시 사셨음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졌고 세계가 달라졌다. 부활한 사람이 온 것이다. 예수가 왔을 때 성육신 한 사람이 왔고, 죽으셨을 때 진실한 사람이 나타났으며, 부활하셨을 때 새사람이 온 것이다. 빛이 오고 땅이 물에서 드러나서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새사람, 새 세계가 온 것이다.
그의 죽으심은 위치를 이탈했던 인간을 원위치로 회복시켜 주었고,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의 죽으심은 만인이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부활은 경험적 사건이므로 본 사람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사람은 왔고 그 세계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고전 15:20,21참).
그러므로 우리가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한 사람으로 살면 부활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사도들과 같은 경험은 물론 더 나은 부활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빌3:10,11참). 우리는 지금 새 시대에 있고 새사람 안에 있다.
3. 한 새사람에 참여함
가.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한 연합체임
에베소서 4장 24절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진실)의 거룩함(순수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였다. ‘입으라.’는 ‘건축 안에 있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고 ‘내가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헛된 길에서 자고했다고 알았으면 새사람 안으로, 새로운 연합체, 즉 사회 안으로 돌아와서 그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새사람은 생명으로 말하면 연합체이고, 건축으로 말하면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 안에는 지체들이 있고 건축 안에는 재료들이 있다.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신비롭게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고, 집에는 여러 가지 재료들이 공학적으로 연결되어 한 집으로 건축되어 있다. 예수로 인해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도 하나의 인격으로 연합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 서로 다르나 한 연합체요 한 건축물임
골로새서 3장 9~11절에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거기에는 아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하였다.
‘옛 사람과 그 행위’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바벨을 쌓은 그 행위다.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구속 받은 생명으로 새로운 한 몸이 되었으니 거기는 아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사람 안에서는 그 지식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었으나 구속 안에 있는 새사람 안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하였다. 손도 발도 다 한 몸이며, 기둥도 서까래도 다 한 건물이듯이 한 새사람은 다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이다.
분열은 선악과로 인한 지식의 결과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서로 판단함으로 분열을 일으킨다. 사단의 첫째 목표는 분열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하여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 안에는 차별이 없고 새 생명 안에는 분열이 없다. 생명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 손과 발은 다르지만 서로 필요하다. 다른 것이 곧 필요한 것이고 내게 없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다.
건축(교회) 안에는 차별이 없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할례당이든 무할례당이든 아무 차별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이 안에는 여러 가지 재료들이 있지만 집을 위한 것이고 나타나는 것은 집뿐이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 온 사람들은 서까래나 기둥을 보지 않고 오로지 이 강당만을 본다. 이 안에 철근이 들었는지 나무가 들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속 받은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나 어떤 모양으로나 건축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2) 새사람은 연합으로 생활함
고전 13;27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였다. 몸은 지체로 구성 되고 지체로서 산다. 서로 연합되어 사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요 새사람의 생활이다. 옛 사람은 각자가 하나님 같이 되어 연합이 불가능하고 바벨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려고” 한 몸으로 연합하여 사는 것이다(엡4;12,15참).
3) 서로 다를지라도 건축으로서 서로 존중함
새로운 구조물이요 생명의 연합체인 교회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안에는 서로 다를지라도 차별이 없고 다 필요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은사들 때문에 시끄러웠고 그것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는 못했지만 바울이 그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은 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서 분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를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아껴야 한다.
나. 연합하여 세상을 정복함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다(창1:27). ‘번성하여’란 단체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땅(세상)은 단체로써만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단체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는 아무리 새사람이라고 해도 그 세상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은 한 새사람이 되여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혼자서 신앙생활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짜이려면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있으면 세상에 이용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는 무용한 사람이 되어 마치 건축에 쓰이지 못한 재료처럼 폐기되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새사람이 되어 “저 사람은 뭔가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너무 그런 것에 관심 갖지 말기 바란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면 넘어진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내가 얼마나 변화되었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분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서까래로 만들 수도 있고 기둥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서까래로 만들었다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적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기둥이나 서까래나 차별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서까래든 기둥이든 교회를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는 새로운 구조물이다. 바벨의 구조물이었던 우리가 새로운 구조물이 되었다. 한 새사람이 된 것이다. 바벨의 사람이 교회의 사람으로, 분열하던 사람이 연합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옛 사람의 종착점은 바벨이고 새사람의 종착점은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은 보석과 진주와 황금의 연합체다. 이 보석들은 모두 구속을 받은 후 연합을 위해 연단을 받은 성도들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연단을 받았고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연단을 받는다. 구속을 받은 사람은 연단을 통해 새 예루살렘의 건축으로 간다. 새로운 길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류는 바벨로 갔다. 바벨로 가는 길은 옛 길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새 길이다. 바벨로 가는 사람은 옛 사람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은 새사람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구속하여 한 새사람이 되게 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어도 되고 믿음이 없어도 되고 충성이 없어도 되지만 바벨로 가면 안 된다. 신학적으로 유식하고 신앙적인 경험이 풍부해도 바벨로 가면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안에 있는 연합 이외의 다른 것에 더 비중을 두다 보면 분열이 생긴다. 일부러 분열하려고 하는 경우는 없다. 다만 다른 것에 더 비중을 두다 보면 분열로 가는 것이다. 정의, 공의, 심지어 사랑, 봉사, 희생 다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 비중을 두다 보면 연합은 무시되고 교회는 분열된다.
새사람은 절대적인 비중이 바뀐 사람이다. 연합하는 한 새사람으로 비중이 바뀐 사람, 이 사람이 바벨로 부터 구속받은 새사람이다. 인생은 애굽(육신적 세상)으로부터, 바벨(분열적 세상)로부터 구속받아 새사람, 새 인류가 되어 한 새사람(교회-사회)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