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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4년3월1일
제목: 2.교리:도의 초보에서 완전한 데로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히6:1-3 -
성경 본문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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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교리: 도의 초보에서 완전한 데로
히6:1~3
회개와 신앙,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은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주제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말씀한다. 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하나님 말씀의 최종적 형태이며 믿음의 길의 최종 열매로써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히1:2, 12:2)
생명으로 조성되는 세계는 선악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세계와 창조적 긴장관계를 가지고 발전해 왔다.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선악과로 만들어진 세계가 우리 앞에 있기에 그것을 이용하여 더 완전한 자리로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양육하였고, 바벨론과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사람 막대기와 인간 채찍으로 사용하여 연단하였다.
생명의 주관적 경험
생명은 내율이며 주관적 경험의 세계이다. 외율은 획일화되게 하지만, 생명의 내율은 각 사람의 특성 속에서 다양하게 경험되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하여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단절이 생길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처럼 서로 못알아 듣는 말을 하면 분파와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체험은 같은 길을 지나온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개인의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인 성경 속에서 증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100%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광야의 길을 지나게 하시고 나라의 멸망을 통해 겪어야했던 모든 과정의 열매인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교리화의 길
초대교회는 율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라와 백성과 족속과 방언으로 퍼져 나가면서 무엇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며 어디까지 교회라고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스라엘 공동체로 살기 위해 율법이 필요했다면, 그리스도 공동체로 살기 위해 교리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 틀 속에 담기 시작했다. 히브리적 경험을 헬라적 사고로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교리는 체험을 지성으로 정리한 것이기에 체험이 빠지면 죽은 것이 된다. 몸의 각질과 오래된 화석처럼 생명의 흔적은 있지만 죽은 것이 되어버린다. 마치 날아가는 새를 정확하게 그렸지만 살아있는 새는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교리는 틀린 것이 없지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같은 경험이 발생하면 죽은 교리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 표현으로
그러나 내 경험만 중요시해서도 안된다. 경험만을 잣대로 가지면 시대와 개인의 한계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이 되어버린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자." 내 경험 밖의 것은 틀렸다 말하지 말고 그냥 두자. 좀더 적극적으로 모르는 것은 믿자.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 이해보다 크신 분이다.(요14:2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지식이 모두 필요하다. 이것은 생명나무와 선악의 지식의 나무가 동산에 함께 있어야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지식이 생명의 경험을 통제하면 생명은 위축된다. 지식은 생명을 따라가야하고, 종은 아들의 통제아래, 능력은 인격의 통제아래 있어야 우주적 질서가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의 성품을 상속한 아들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롬8:19~22)
이단을 배격하기 위해
객관적 교리는 어떤 도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초대교회의 도전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율법주의가 배격되는 것은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지, 왜 이것을 적그리스도라고까지 하는지 아는 사람은 적다. 왜 이런 교리를 말하게 되었는지 알자면 영지주의 문제를 알아야 된다.
하나님이 하시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듯 하나님 말씀이 현실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영을 개발하면 현실과 분리되어 하나님과 방불한 자가 된다. 영을 참 나라고 생각하면 현실은 허상이 되어 분리된다. 현실이 없는 속에서 얼마든지 평안과 행복, 요동치 않는 자리를 말할 수 있다. 율법주의는 욕망의 기초위에 자기 의를 세워 거짓된 망상을 갖는 것이지만, 영지주의는 현실을 배제해 버림으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러나 우리는 인터넷 서언에서와 같이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진실이 폭로된 사람 안에서 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인생은 하늘로 높여도 올라갈 수 없고, 땅으로 끌어내리려 해도 더 내려갈 수도 없다. 확실하게 자기 가능성이 끝나고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람이며, 기독교가 세상에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