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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6년10월1일
제목: 2.우리 체질을 아심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시103:1-14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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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016 가을 집회(9.30~10.3)
시편에서 보인 그리스도
2. 우리 체질을 아심(시103:1-1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2~5절).”
이 말씀 한 대목 한 대목이 나의 간증이었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택을 일생 잊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모든 병을 고치시고 파멸에서 건지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그 길을 가게 하시는구나 생각하고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본문은 내 영혼에서 시작되는 찬송의 경험이 확대되어, 천군과 천사에게까지 여호와를 송축하고(20절),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이 찬송에 동참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나간다(22절). 내 인생의 찬송이 온 우주의 찬송이 되고, 내 인생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답이 온 우주의 대답이 된다는 것이다.
내게 일어난 일이 개인의 감사와 찬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찬송이 될 때, 주관적인 경험이 객관적으로 증거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내가 경험한 은혜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에 빚진 자이고 복음에 빚진 자이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절)
내 속에 있는 것, 오장육부가 다 찬송하고 오감과 육감이 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은 일을 보면 가슴이 뛰고 내 몸이 반응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내 전 존재가 그에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무엇에 반응하느냐가 그 사람의 현주소이다.
자신을 표현할 때 반응 잘하는 사람이 기쁨이 된다. 인생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반응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 죽은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대해 내 영혼이 즐거워하고 내 속에 있는 것들, 심장과 오장육부가 다 반응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것이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기 위한 그릇이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 완전한 자라.”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는 것은 은혜 입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기록한 것은 그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까지라도 다루어서 축복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다루어 쓰시는 하나님을 보면, 내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내 인생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 나의 어떠함에서 자유하게 된다. 내가 어떠한가보다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쓰시느냐가 중요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타락과 배반과 절망을 되풀이하며 살아왔다. 왜 마음과 뜻이 곧은 백성을 택하지 않으셨는가? 이집트나 바벨론 같은 위대한 왕국을 택하지 않고 왜 이런 보잘 것 없는 민족을 택하였는가?
그것은 이런 민족까지라도 하나님은 약속을 거두지 않고 성취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게 되면 땅의 사정이나 사람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이 덮이고 캄캄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은 빛을 비추시고 생명을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벤전3:19). 이들은 노아의 때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오래 참고 기다렸음에도 구원받지 못한 영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구제 불능의 인간까지라도 구원의 손길이 미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죽음이라는 말이다. 너저분한 인생이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은 인생 문제에서 해방되어 영원히 주님을 송축하는 사람이 된다.
깊은 어두움에 있을 때 나를 건지신 주님의 손길이 내게 각인되어 있어 그 모든 은택을 잊지 않는다면, 터널을 지나듯 어두움에서 나올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 하셨다. 은혜가 깨달아지면 그때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2-14절)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2절)
죄를 멀리 옮기셨다는 것은 죄에서 우리를 멀리 옮기신 것이다. 끝과 끝처럼 옛 세계를 멀리 옮기셨다. 구원은 세계가 바뀌는 경험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우리가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벧후3:12) 하였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하였다. 모두 세계가 바꿔진 경험이다.
시커먼 먼지가 나는 공장에서는 아무리 씻어도 다시 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구원은 그 공장에서 우리를 씻어 준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멀리 옮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회개’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는 돌아서게 한다는 뜻이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이 말씀이 더 근원적인 회개이다. 우리는 도가 통해서 문제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졌기 때문에 옛것이 문제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절)
‘체질’은 구조(프레임)라는 뜻이 있다. ‘먼지’는 ‘흙’과 같은 단어이다. 지으신 분이 내 구조를 아시고 재료를 아신다. 나를 어떻게 조성했는지 아신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갈4:9). 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를 보이는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나를 보이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제물을 보고 제물을 나로 아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나를 아신다. 잘잘못을 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체질임을 아시기에 긍휼로 오신다는 것이다.
나를 아시는 분 앞에서는 내 모습 그대로 내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지으신 분 앞에서 잘 보이려고 힘쓰고 애쓸 필요가 없다. 여기서 인생의 수고가 끝나게 된다. 우리 체질을 아시는 분 앞에서 내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 분 앞에서, 무엇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면, 자신도 용납되고 다른 사람도 용납이 된다.
연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강한 자 약한 자가 따로 있지 않고, 인생은 율법 앞에서 연약하다. 누구도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어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도 율법을 범했다는 이유로 정죄되었다. 예수께서 율법의 정죄를 받으셨다면,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3:21)고 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다.”고 번역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율법으로 당당해지는 것은 자기 의이고, 우리 체질, 우리 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새로운 의,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 체질, 약함을 가지면 누구하고도 복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보배로운 축복이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고, 마음이 흐를 수 있는 길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알기 때문에 잘잘못을 떠나 긍휼이 흐르게 되어 있다. 부모 마음은 긍휼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향해 자주 책망하지 않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우리를 설계하실 때 긍휼이 흐르도록 설계하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연합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티끌로 된 체질만으로도 긍휼과 인자하심을 대대로 누리고, 하나님을 송축하고 감사하는 사회로 부름 받았다. 이 구원의 사회를 열어가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고 우리가 부름 받은 세계의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