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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6년10월2일
제목: 3.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 같이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시131:1-3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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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016 가을 집회(9.30~10.3)
시편에서 보인 그리스도
3.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 같이(시131:1-3)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편).”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서 누리는 안식
시편 131편을 사람들은 겸손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겸손은 아름다운 덕목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겸손하려고 한다. 겸손하려면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겸손은 사람의 올바른 자리를 알면 당연하게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 시편을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 대한 말씀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자리에서 누리는 안식에 대한 말씀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여야 할 만큼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이것은 세상에는 없는 법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세상에 없는 법인 이유는 세상에는 안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안식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신 세계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안식을 찾고 있다. 종교, 명상, 수련 등을 통해 다 안식을 찾기 위해 자기를 끝없이 찾고 수련하고 개발한다. 그러나 자기로 시작된 길에서는 다른 것은 찾을 수 있는지 몰라도 안식은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창조를 마치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치신 날이 사람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안식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안식이 시작이다. 하나님이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주신 날이 안식이니 우리 노력으로 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 부모를 잘 만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처럼 인생을 시작하신 분을 알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시작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더 만들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우리도 쉬게 된다.
더 나아가 안식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는 일에 나도 즐겁고, 아버지가 근심하는 일에 나도 근심하는 사람이다. 마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다. 안식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말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에 이의가 없는 사람이고, 이끄심에 저항이 없는 사람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서 나온 고백이다. 눈이 높으면 만족이 없다. 잠언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인데, “교만한 눈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하였다. 눈이 높으면 사람 사이에서 먹을 양식이 없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한 때가 있었다. 아기스 신하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고 경계하자 다윗이 두려워하여 미친척하다가 쫓겨났는데, 이때 지은 시가 34편이다.
여기서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의인의 뼈를 꺾지 않으신다.”는 말이 나왔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간다면 얼마나 쪽팔리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어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듭니까? 할 자리인데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힘 있어 품위를 버리지 못하는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아무것도 아니어서 여호와가 아니면 안 되는 인생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있고, 미친 사람의 수준까지 내려가니 무엇이라도 가능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양식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정도는 돼야지 하는 사람은 인생에 좁은 영역밖에 살 수 없다. 원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내 인생에 주어진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을 직역하면 ‘나 이상’이란 뜻이고, ‘힘쓰지 않는다’는 ‘나아가지 않는다’로 “나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나 이상의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된 만큼 살아도 부족함이 없다. 인생이라고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만으로도 실로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시16:6).
세상은 결핍 의식 때문에 발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지으신 일을 마치셨다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에, 자족함이 출발이다. 결핍이 필요 때문에 생기는 줄 알지만 본분을 이탈해서 생기는 것이다. 결핍으로 내가 발전해 나가면 욕구를 채우는 삶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생에게 지키라고 주신 안식, “그가 일을 마치셨다.”는 것이 출발점이 되면 내게 주어진 모든 날을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쓰는 여력이 생긴다.
풍성함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족함에 있다. 많이 가진 사람보다 자족하는 사람이 부유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 풍부에 처하나 궁핍에 처하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4:12). 자기만큼 줄로 재어 준 구역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무궁한 복을 경작하고 캐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다.” 하셨다(딤전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시16:6) “사람이 무엇이기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지요?”(시8:4-5)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를 위한 일이 끝난다.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부름을 위해 쓸 수 있는 넉넉한 힘이 생긴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목적하신 그 한 가지만 생각하면 무엇이 부족해서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교만할 필요가 없고, 더 가지려 하지 않고, 눈이 높아 사람을 시시하게 보지 않고,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느라 인생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내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한다.”
직역하면 고요하다는 것은 지면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고, 평온하다는 것은 침묵케 한다는 뜻이다. 내 혼이 지면이 고름같이 고요해진다는 말이다.
이사야 40장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는 말이 나온다(사40:4). 내 앞에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고, 큰 것도 작은 것도,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들이 우리에게서 다 사라질 때 지면이 고름같이 그렇게 고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분요함과 마음이 시끄러운 것은 우리 앞에 무엇은 크고 무엇은 작고 이것은 좋아 보이고 저것은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울퉁불퉁한 것, 높고 낮은 것, 위대하고 천한 것 등, 이런 것이 많을수록 인생은 번잡해지고 분주한 사람이 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니라.” 하였다(슥4:7).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 오니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람을 나뉘게 하는 모든 차별이 다 사라졌다.
물론 잘하는 사람은 존경해 주어야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산들이 낮아지고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고 험한 곳이 다 평온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신 그 자리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내 인생에 온전한 축복으로 경험이 되면 더 이상 부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다.
그렇지 않을 때는 세상에서 조금만 잘난 사람을 만나도 나는 왜 이런가 하고 금방 기죽고, 가진 자를 보면 내가 초라해 보이고, 높은 산이 되었다가 골짜기로 떨어졌다 하는 일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자리를 알면 인생이 평지가 되어 인생이 다 하나로 보인다.
고요해졌다, 침묵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하시는 일에 이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속이 시끄러울 때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잠잠히 기다리게 된다. 내가 부정했던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내가 멸시했던 데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니,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되도 되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일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작품에 손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만들면 조잡한데 하나님이 나를 빚으시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작품이 나타나고, 고요하고 평온한데 너무나 빨리 주께로 직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젓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이며, 만족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다시 말해 욕구불만 제로인 상태이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상태로 있는 사람은 세상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구약 성경에 ‘전능자’라는 하나님 호칭은 ‘엘-샷다이’를 번역한 말이다. 이것은 ‘젖을 가진 어미’라는 뜻이다. 젖을 가진 어미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뜻으로 쓰인 호칭이다. 전능하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보다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기 위하여 엄마의 젖과 같은 완전한 공급을 하신다는 뜻이다.
충분한 수유로 고요하고 평온해진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시작하신 자리이다. 그래서 겸손하라 말할 필요가 없고, 고요하고 평온하기 위하여 명상에 힘쓰라 경건의 시간을 가지라 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시작과 위치를 알면 바로 교만하지 않고 눈이 높지 않으며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인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편의 결론과 같은 말씀이다. 사람은 행위나 결과에 주목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겸손한 사람이 되고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자기를 보고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보고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자기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려는 것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다르다.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려 하면 자기 의지를 동원해 만들게 되고 원천이 메마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보라’ 한 사람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원천이 있는 사람처럼 마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