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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6년3월13일
제목: 창조의 주 여호와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창1:1,계21:6,22:13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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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016 봄 집회(1)
5.창조의 주 여호와
(창1:1,계21:6,22:13)
성경은 맨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했다. ‘태초’란 ‘아무것도 없는 때’라는 뜻이고, ‘하나님’이란 ‘엘(EL)’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전능자’라는 뜻인데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며, ‘천지’란 ‘모든 것’이라는 말이며 ‘창조’란 ‘있게 하다’, 혹은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마디는 전능자가 모든 것을 있게 하고 시작하셨다는 말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없다. 무엇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모든 것은 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있다. 시작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면 시작하신 이는 언제부터 있었으며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바 된 것은 시작하신 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도 지은바 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를 지으신 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모르는 것이다. 가르쳐 주어야 알게 되고 남이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또 자기도 자식을 낳아 보고 미루어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말했는가? 누가 그 일을 봤으며 누가 그 일을 경험했다는 말인가?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백성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억류 되어 400년 동안 노예가 된 종들이었다. 그들은 힘으로는 바로의 손에서 해방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능력으로 바로를 제압하고 자기들을 해방시킨 어떤“힘”을 만난 것이다. 즉 그들은 ‘엘(전능자’을 만났던 것이다. 전능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자기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었겠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인도자 모세는 80세의 나이에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치기를 하던 중에 자기를 부르시고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6).” 하신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굴복하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는 여호와”라 하시더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는 …이다(I AM….)’라는 뜻으로서 전능자라는 뜻이다(출3:참).
그는 전능자를 만났으므로 그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바로와 맞섰다. 바로가 뉘기에 한낱 양치기 노인이 감히 왕과 맞설 수 있었던가? 전능자의 명(命)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결국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로 나와서 성막을 건축하고 광야 40년의 길을 인도했던 것이다.
이 역사는 그들의 시작이 되었고 기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출12:2참). 여호와는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라는 믿음은 이런 경험 위에 세워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이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하늘과 땅도 전능자에 의해서 창조 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이 믿음으로 살고 있고 소망을 얻고 있다. 전능자에 대한 믿음은 모든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될 삶의 기초다. 이 믿음 안에서 나로서는 불가능할지라도 전능하신 이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다(잠16:1).” 이러한 경험은 조급한 중에도 여유롭게 하는 것이다.
기초가 확실하고 튼튼해야 집이 튼튼하다.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시작이 있고 시작하신 이가 분명해야 목표가 있고 성취함이 있다
시작이 없다면 인생은 목표가 없으며 시작하신 이가 없다면 소망도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은 시작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망을 품은 백성이 된 것이다.
인생은 전능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나를 시작하신 이는 전능자다. 그러므로 전능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 전능자가 있다면 인생은 목적이 있는 것이다. 누가 목적 없이 무엇을 만들겠는가? 지으신 이에 의해서 시작되고 지으신 이에 의해서 지어진 인생은 목적이 있으므로 소망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목적 없는 인생으로 방황을 했었다. 목적이 없으니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우연히 생긴 것이니 목적이 없다. 그러므로 목적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살면 된다고 한다. 이것은 환경이 좋을 때 배부르고 등 따신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살기가 힘든 사람에게 “네 생각에 좋은 대로 살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된 것이니 악연을 끊고 좋은 인연을 만들라.’ 하고 아니면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인연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러나 목적이 없지 않는가? 지으신 이가 없다면 목적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목적이 없으면 모든 것은 다 허무한 것이다.
나는 목적이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기도했다. 나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에 있습니까? 그때 목적이 있는 분이 나를 부르셨던 것이다. 나는 목적 있는 분이 부르셨으므로 그가 세워 둔 인생의 목적을 얻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목적을 잃고 방황한 일이 없다. 세월이 지날수록 이 목적은 더 분명해지고 더 귀중해진다.
목적이 귀중해지니까 내 인생이 귀중해진다. 그 목적은 사람을 자신의 대리자로 삼아서 만유에게 창조자의 성품과 은혜를 분배하겠다는 것이다(창1:26,27참). 사람을 통해서 말 못하는 바위도 말을 하게 하고, 흐르는 강물도 춤을 추게 하겠다는 것이며, 바람으로도 그의 성품을 풍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만유는 지으신 이 안에서 부모 안에 있는 자녀처럼 다 아름답고 소중하다(창1:4~31참).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그를 대신하다니 이 얼마나 고귀한가!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이보다 더 크고 귀중한 목적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기쁘다! 나는 충만하다! 나는 자랑스럽다! 하나님 목적 안에서 나는 영광스럽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 그런데 목적의 주권자 되시는 분이 전능하신 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
전능자는 이 목적을 이루신다. 그는 전능자시다. 나는 잘 모르는 그 목적을 이루려고 힘을 쓰다가 지쳤다. 그의 목적은 그가 이루시는 것인데 나는 그 목적도 분명히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내가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많은 실패를 하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고 안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자신을 대신할 만큼 키우며, 신랑은 신부를 자신의 수준에 맞는 아내, 즉 배필로 만들어서 나라를 위해 동역할 만큼 깨끗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이다.(창2:23.엡5:25~27참).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를 자신을 대신할 만큼 키우시고 자신과 동역할 만큼 가꾸시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위해서 부름 받고 연단을 받아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이 있을 것이며(계14:1,22:4참), 그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계1:6참). 전능자에게는 시작이 있고 완성이 있다. 그러므로 전능자와 그 아들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17:3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