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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들을 나타내심
본문: 갈1:15-17
설교자: 김치현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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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 아들을 나타내심
(갈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과 같다. 내 생명 속에 독생자를 주려 하셨다는 것이다. 내 속에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는 아들을 전할 수 없다.
아들은 생명의 복사판이고 아버지 생명의 재현이다. 성육신, 화신, 아바타 등 모든 종교의 목표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 아들인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누가 하나님 아들이냐는 누가 영광스러운가의 싸움이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지킬 것인가?
구약에서 하나님 아들은 천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자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쫓겨나고 그룹(케루빔)이라는 천사가 동산을 지키게 되었고 지성소의 휘장과 법궤 위에도 그룹이라는 천사가 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지키는 자가 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임에도 천사를 부러워하고 천사가 인간의 꿈이 되었다. 사람은 연약함과 죽음이라는 운명 때문에 일생 생존에 급급하며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다.
연약함과 죽음의 운명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연약함과 죽음을 가지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육체는 나를 위해 살자면 한없이 불만스럽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면 천사까지도 흠모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회복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셔야 하셨다(히2:17). 예수와 우리를 너무 이질적으로 분리하면 그가 내 생명이 될 수 없고 내 속에 나타내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후13:4). 십자가는 약하기 때문에 잔을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세상은 운명을 벗어나는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사는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 완전히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아들을 나타내심
v 예수는 인류를 근본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구속자가 되셨다. 죄사함, 의롭다 함, 거룩함은 다 같은 말이다. 원위치로 돌아온 사람의 결과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듯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쉽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그에게로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데서 사람의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하였다. 인류 역사에서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이런 말은 없었다. “이제는 자고 쉬라.” 이렇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책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서 ‘아, 내가 죽었구나!’ 이렇게 깨달았다. 그의 죽음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일이 없어도 선악이 내 속에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지 못해도 나도 함께 죽었다.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을 봐야 하는가? 공동묘지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공동묘지의 죽은 사람에게서는 허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에서는 내 운명과 더불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을 본다. 육신이 살다가 죽는 것은 어떤 죽음에서도 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고 사는 것은 예수 없이 볼 수 없다.
그에게서 우리는 가장 완전하게 나 자신과 온 인류를 볼 수 있다. 숨어 있는 인류,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다 볼 수 있다. 나도 나를 다 모른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나님같이 되려 했다는 것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끝내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 끝나면 완전하게 끝난다. 어디서 평등을 찾겠는가? 세상 어딜 가도 차별화되어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만 똑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