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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본문: 갈2:19-21
설교자: 김치현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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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3.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갈2:19-2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 안에 포함됨
어떻게 예수 안에 포함될 것인가? 그가 죽을 때 나도 죽었고, 그가 살아날 때 나도 함께 살아나는 것,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 했다.”(히2:17).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으셨고 슬플 때 우셨으며 십자가의 잔을 받으면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할 수만 있으면…” 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는 우리와 같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분이셨다. 우리를 포함하기 위하여 그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 했다.
어떻게 우리 생명을 바꾸시는가?
선악과의 저주의 굴레에서 인간은 가르쳐도 훈련시켜도 안 되고 이래도 저래도 안 되기에 생명을 바꾸신다는 새 언약을 주셨다. “내 법을 저희 생각과 가슴에 두겠다. 말씀을 영으로 심비에 새기겠다. 내 생명을 주어 생명을 바꿔서 새 생명으로 살게 하겠다.” 약속하신 것이다. 어떻게 우리 생명을 바꾸신다는 것인가?
나를 먹으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였다(요3:3). 그 방법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다(요3:14-15).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살았듯이, 동산에서 뱀에 물린 아담과 하와로 인해 온 인류의 몸속에 선악과의 독이 흐르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3:16, 5:24).
그런데 예수를 믿지만 새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짓하던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생명이 바뀌는 궁극적인 변화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여전히 내 생명 밖에 믿음의 대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먹고 나를 마시라.” 말씀하신 것이다(요6:48-58). 먹으면 내 속에 들어와 내 생명이 된다. 어떻게 자기 살을 주어서 먹게 하며 자기 피를 마시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마지막 부활 후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 믿는 것보다 먹는 것이 구체적이고 먹고 마시는 것보다 숨을 쉬는 것이 더 쉽다. 그럼에도 먹고 호흡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생명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육신을 경험한 제자가 제시한 길이다.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과 이후 못 본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보편적 구원을 위해 바울이 필요했다.
함께 죽음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을 내놓았다.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6:6). 바울은 하나님도 사람도 버린 십자가의 예수가 만민을 포함하고 죽었다고 해석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후5:14).
예수를 본 일이 없는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힌 현장을 본 일이 없는 바울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말하는가?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보았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위치와 능력의 차이에 있다. 그러나 운명으로서 우리와 하나이다. 우리와 똑같은 운명으로 죽으신 것이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는 것이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5,47). 첫 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 예수로 청산되었다.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 죽었다. 선악과 먹은 인류의 대표자로 죽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었다.
부활은 둘째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죽었고, 예수 안에서 둘째 사람으로 살아났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생명이 되었다. 예수와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부활도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는가? 자기 안에 둘째 사람, 다시 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두 둘째 사람 안에서 쓴 말씀이다. 둘째 사람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우리는 둘째 사람 안에 사는 바울을 보고 베드로를 보고 있다. 이 사람이 진실이고 계시의 실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영생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다(요6:47).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내 죽음임을 믿는 것이다(고후5:14). 그의 죽음 안에서만 예수와 내가 연합하게 된다(롬6:4,5). 그의 죽음(운명)이 내 죽음(운명)임을 아는 것이다. 그가 죽음을 보고 ‘저것이 나구나.’ 알게 되면 그의 부활 안에서 우리도 함께 사는 것이다.
영생은 예수 안에 포함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영생이시다.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이 영생을 먹고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보면 영생의 열매가 나온다. 예수와 우리가 하나 되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온다. 예수의 죽음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위해서이다. 이 연합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다. 예수께서 죽음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무슨 행위를 가지고 연합하려 애썼을 것이다. 율법, 신비, 기도 등 무엇으로도 예수와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다. 그렇게 연합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이 죽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죽으심! 정말 특이한 일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그의 죽음 속에 내가 있기에 그의 부활에도 내가 있다.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이다. 거기는 차별이 전혀 없다. 영원한 생명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그 인격 안에서 나온다. 영생은 물건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