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자유 있는 여자
본문: 갈4:21-31
설교자: 김치현 목사 -
성경 본문
-
말씀 요약
4. 자유 있는 여자
(갈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두 언약의 비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 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자유한 여자에게서는 약속을 따라 났다. 이것은 두 언약의 비유이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하갈인데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시다.
하갈은 왜 종의 어미인가?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할 능력이 있을 때 자유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을 때 부자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정 반대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가능성이 있을 때 낳은 아들이다. 이것을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한다. 율법도 “우리가 지키겠나이다.” 할 때 주어졌다.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사람은 매이게 된다.
하갈은 시내 산에서 온 여자, 지금 예루살렘 같은 곳이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으로는 이삭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하갈의 후손, 종의 후손이 되어 있다. 신약의 교회라고 하는 기독교도 종의 후손이 될 수 있고 우리도 선 줄로 생각하면 종의 후손이 될 수 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을 같은 눈으로 보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종 된 적이 없다 하였고, 예수님은 너희가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선악과를 먹으면 자유자가 될 줄 알았는데 선악의 종이 되었다. 노아의 아들 함이 아버지의 벗었음을 판단하고 종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다.
사라는 왜 자유자인가?
사라는 자유자의 모태가 되었다. 자기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바울이 볼 때는 ‘자유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일이나 행위로써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해도 항상 2% 부족하게 느껴진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죄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가능성이 끝나면 사람들의 판단도 내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된다.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일이 내게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였다(고전4:3). 나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판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능성이 사라지면 얽어매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근심도 하게 된다. 미결수는 매우 고통스럽지만, 선고를 받은 자는 오히려 편하다. 전혀 무엇을 할 수 없으면 절망일 것 같은데, 진짜로 할 수 없으면 절망도 없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참 자유자인 것이다. 주제파악이 되면, 자기를 알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안 보여서 그렇다. 율법적인 사람은 자기가 그런 사람인 줄 착각하고 남을 판단한다. 항상 자기를 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업을 이을 아들
하나님은 자신의 유업을 맡을 자를 찾으신다.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어 아들을 주신 것은 이 사람을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통에 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도 100살에 낳은 아들이다.
100살에 낳은 아들, 성령으로 잉태한 아들, 모두 같은 성질이다. 사람의 생각과 상식에 없는 계열이지만, 이삭은 예수를 알고 예수는 이삭을 안다. 같은 성질, 같은 계열이기 때문이다.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것도 같은 성질이다. 하나님 아들, 독생자 등 사람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다. 훈련이나 교육으로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온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성경을 봐야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보인다. 이 사람을 알고 일을 해야 허공을 치듯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을 알면 성경도 인생도 모든 것이 쉬워진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찾고 계심을 안 후 모든 것이 청소되었고 쓸데없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참된 자유
“돌로 떡을 만들라.”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궁극적 소원이다. 육체로부터 자유자가 되기 위한 궁극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찾기 때문에 항상 부족하다. 온전한 감사가 나올 수 없다. “여한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 100% 감사뿐입니다.” 이것은 보통 말이 아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죽고 다시 산 그 속에만 참된 자유가 있다. 그에게 동일시되면 저것이 나구나 알게 되면 자유가 생긴다.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 아들을 보고 그것이 인간의 운명인 줄 알면 자유가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십자가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무엇에 매여 있었든지 간에 다 해방된다. 이것을 벗어나면 뭔가를 해야 한다. 뭔가를 해서 그런 척해야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그런 척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시인할 뿐이다. 자신을 시인하는데 자유가 생긴다. 자기를 감추려 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 바라보면 해방된다. 종교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를 찾고 있지만 답은 간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 보면 된다. 그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한다는 것은 그를 항상 바라보고 있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인생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될 사람인가? 인생을 한 대답으로 단순화하자. 예수의 십자가는 인생의 모든 풀리지 않는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이다. 이것만 있으면 내게 없던 것이 있고 내가 모르던 것을 다 알고 내가 안 되던 것이 되고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어떤 것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한다. 어떤 것도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참된 해방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이것만 우리에게 영원히 보여지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