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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계명을 통한 인격 회복
본문: 신5:6-15
설교자: 김치현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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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1. 십계명을 통한 인격 회복(신5:6-15)
십계명은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기 위해 주신 것이다. 올바른 위치로 돌아와,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를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켜서, 나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된 메시지가 유대인들의 잘못된 이해로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말씀이 되어버렸다. 본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도록 재해석하여 완전케 하셨다.
모든 구약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통과할 때, 참 뜻이 드러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어 흐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은 축복의 원천이 되고, 만민에게 복이 흐르는 물길이 되도록 주신 말씀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생겨났다. 노예 상태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웠다. 그들로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었다. “아, 여호와가 함께 계셨구나.” “당신이셨군요.”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에겐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얻은 결론이 아니다. 그들의 역사적 체험이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말씀은 사람의 올바른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며,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선포이다.
내가 피조물임을 안다는 것은 주권이 내게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은 무엇이 되려했던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목숨이든 자존심이든 자기를 지키려 하던 모든 것에서 놓여나게 된다. 자신에 대해 성공했다 실패했다 할 것이 없고 잘했다 못했다 할 것이 없다. 주신 잔을 받을 뿐이고 감사할 일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겐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지만, 우리에겐 혼란과 허무와 어두움이 깊을 때, 빛을 주시고 ‘하나님 형상’이라는 고귀한 목적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자의 형상이 되고 표현이 되게 하겠다는 분을 만나는 것은 삶의 내용을 최고의 질로 채우는 축복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내게 이름을 줄 자가 있는 것이다. 목적을 가지신 분 앞에 설 때 삶의 의미가 생겨난다. 나를 시작한 분이 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토대이다. 나를 지으신 분 앞에 서는 것, 내게 목적을 가지신 분 앞에 서는 것이 사람의 근본 위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고(요4:3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다(요9:4). 그에게는 보내신 이의 일 밖에 없었다. 이것이 첫 계명의 실재이다.
인생에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삶을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주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는 귀중한 축복이다. 내게 절대적인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면 되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절대적일수록 좋은 것이다. 사람의 올바른 위치에 서면, 우리 존재가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고 잔치가 된다. 우리가 있으면 잔치가 벌어지는 그런 사람이 된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이 말씀은 너는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위치가 회복되면, 가치가 회복된다. 사람은 우상을 섬겨야 할 존재가 아니고, 천사에게까지 섬김을 받아야할 존재가 된다.
내가 섬기는 것이 많을수록 존재 가치는 떨어지고, 섬기는 것이 적을수록 존재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위할 것이 하나밖에 없다면 존재 가치가 그만큼 절대적으로 존귀한 것이다.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사람은 위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위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한 가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다른 많은 것에서 자유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서야할 올바른 위치이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다. 형상이 없는 분을 따라가자면 형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규정지으려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앞서 그림을 그리고 만들려 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라는 말씀이 나온다(계14:1,4). 어떤 계획을 미리 가지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이렇게 정의내릴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한가? 그렇게 하면 형상이 없으신 분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무엇이든 형상화 하려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은 틀을 만든다. 틀이 있으면 모든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그 틀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이상적인 교회를 그리고 교회가 이래야 한다고 하면 그 이상 속에 갇혀버린다. 좋은 것 속에는 더 머무르기 쉽다. 그러면 고정되고 쉽게 굳어져버린다. 내가 만든 이상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 아무 것도 모른다. 예수님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하셨다. 예수님이 모르는 것이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올바른 위치이다. 그래서 매일 길을 묻는 사람으로, 매일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이 하나님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라 부르지 않고, 글자만 네 글자를 쓰고 주(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여호와란 발음을 하지 말란 말인가?
야곱은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하였다(창48:15-16).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셨다(요17:3). 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아 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계시록에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하였고,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하였다(계22:4). 이마에(가슴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 하나님이 조성하신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여호와 자신을 지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말씀이다. 나는 오직 너를 통해서 내 이름이 일컬어지기를 원한다. 너를 통해 나타나기를 원한다. 이런 말씀이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어질 사람이기 때문이고, 우리를 망령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려는 말씀이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것과, 안식일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게 하였고, 참으로 안식을 지키셨다. 어떻게 안식을 지키셨는가?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하여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다. 이것이 동산의 생활이었다.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고, 동산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관계는 올바른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식을 완성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은 구속을 다 이루셨다. 사람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으로 회복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십자가는 이탈한 모든 것을 끝내신 자리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정욕을 끝내셨다. 모든 것이 끝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다시 안식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안식을 되찾았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과 만유가 안식하는 그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