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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자로 오신 새 생명
본문:(요일1:1)
설교자: 이성규형제 -
성경 본문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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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 인자로 오신 새 생명
내려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것이었고 이것을 위해 아담을 지으시고 동산을 다스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땅을 통치하기 위해 하늘에서 산(시내산)으로, 장막 안으로, 사람 안으로 내려오셨고 최종적인 새 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도 엘로힘(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관계를 가지신 하나님)에서 아버지 하나님, 인자(사람됨)로 오신 하나님으로 땅으로 오심을 알 수 있다. 엘로힘의 하나님, 여호와의 하나님에서는 전능한 능력의 하나님으로 어려울 때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부분적인 표현이기에 예수님께서 최종적 표현인 인자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어 능력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옛사람은 인자로 오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아직도 엘로힘의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구약을 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을 잃어버리고 흙으로 지어진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땅을 저주하고 ‘어떻게 하면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꾸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내려오시고 오셔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모든 것을 경험하길 원하시지만 타락한 사람은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땀 흘리고 애를 쓰므로 서로 갈망하지만 만나지지 않는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됨으로 오신 완전한 구원
하나님의 능력은 천사나 사람을 통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사시고 표현되실 때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성품까지 완전히 드러날 수 있다. 많은 이적, 은사를 통해서 또는 성막, 성전,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부분적이었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완전하게 사시고 표현되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성품이 표현된 데서 인자처럼 온전한 피조물은 없음을 볼 수 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살리신 데서 율법을 뛰어넘어 살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율법으로는 살릴 수 없는 여자, 유대교의 전통으로 살릴 방법이 없는 여자인데 가난한 청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인자되심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 마음 앞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인자되신 예수를 누린 사도 요한은 태초의 생명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말하고 있다.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볼 수 있는 하나님,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 이것이 완전한 구원이고 구원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오랜 갈망이 인자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 인격이 새 생명이다. 사람됨 안에서 하나님의 어떠함이 드러나고 누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체험되어 검증되셨다. 하나님이 인자가 되시지 않으면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다. 인자 안에서만 당신 자신을 완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자가 될 때까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다루시고 경작하셔서 인자의 자리, 존재만 남은 참 형상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교회는 신령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해 새롭게 빚어진 새 사람이 모여 그 사람됨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누리는 곳이다.
인자(사람됨)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
하나님의 인자되심은 결국은 사람 되심이다. 사람됨이란 말은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아들이란 의미이고 머리가 있는 사람이란 뜻도 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머리를 부인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므로 평생 피곤한 인생이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수(인자)는 머리가 있는 분이어서 ‘머리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정해진 길, 십자가로 갔고 그 결과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이 길을 따라가면 아버지로 조성된 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참외 씨가 심겨져 참외 밭이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이 머리되신 ‘하나님의 몸’이 인자의 이름이다. 인자는 머리이신 하나님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이 표현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새 사람인 것이다. 인자는 하나님만 남을 것이다.
인자의 영광이 세상의 빛이다
‘인자의 영광’이란 말이 오해되고 있다. ‘인자(人子)’란 말 자체가 예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치 신의 아들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자를 위대한 존재로 알고 있으므로 크고 위대한 믿음을 가지려는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다.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어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 2:27)’라는 말씀도 자기의 깨달음과 행함이 기름부음이라 생각하여 누구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고 가난해져 하나님만 남은 사람이고 이 사람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 작아지고 태워진 재의 영광, 네피림의 바다에서 방주가 된 조각목의 영광이 기름 부음이다. 이 인자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인자는 작아서 냄새 같이 된 분이다. 이 인격을 먹고 마시면 그도 인자가 되고 그 사람이 되어 먹히고 마셔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자의 분배이고 하나님의 통치다.
인자를 영접하고 사는 교회생활
예수는 인자로서 아버지가 있는 아들이고 머리가 있는 몸이다. 이 인자 안에 영원한 축복이 있다. 씨의 풍요가 밭에 있음같이 하나님의 풍요는 인자 안에서 나타나고 이것이 기름 부음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인자에게 부어지고 이 축복은 인자를 통해 흐르는 것이다. 인자 안에 흐르는 축복과 영광을 보면 인자를 소망하게 되고 영접하게 된다. 아담이 멸시한 인자의 영광을 보게 됨이 구원의 시작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한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인자됨을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머리만 되려고 하는 우리에게 인자의 영광을 보이셔서 인자를 사모하게 하고 인자를 머리로 삼아 사는 사람, 형제를 따르고 형제를 영접하는 교회 인간이 되게 하셨다. 형제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자의 자리에서 연합이 이루어지고 몸 된 교회가 건축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인자를 영접하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누림으로 하나님의 깊은 모든 것이 경험되는 신약의 실재를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고 연약한 인자일 뿐이지만 그 인자(형제)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맛보고 있다.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를 보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마10:9,10).” 하셨다. 이것은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고 부서지고 작아져서 인자된 존재로 가라는 것이다. 복음은 자기 자신 이외의 무엇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회복된 인자의 위치가 복음이다. 우리가 세상에 가져갈 것은 인자로 조성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하나님이 빚으신 사람, 흙으로 지어진 사람, 고운 가루가 된 사람, 모든 것이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사람만 보내고 계신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가진 것은 나팔과 항아리 속에 감추어진 횃불이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미디안 족속을 진멸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얇은 흙덩어리에 감추어진 인격뿐이지만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 이 항아리 속 횃불처럼, 세상에 나가 보면 우리에게 있는 놀라운 무기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은 주시리니(마10:19)” 인자는 머리의 몸으로서 머리의 이야기만 할 것이다. 인자의 자리로 간다면 머리로부터 흐르는 기름 부음의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생수가 강 같이 흐를 것이다. 몸의 역할은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고 발로 걷는 것이고 입을 여는 것이다. 몸이 입을 열어야 누군가 말을 들을 것이고 몸이 표현을 해야 보고 듣고 만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횃불을 간직한, 깨져야 할 항아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추수할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핍박이 있으면 다른 동네로 가면 된다. 거기서 더 깊은 예수에게로 가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이 보냄 받은 걸음걸음 속에서 예수를 더 알아갈 것이다.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를 만날 것이다. 인자이신 예수를 더 깊이 알아 갈 것이고 이 인자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임을 더욱 깊이 알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