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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본문:막14:21
설교자: 정한성형제 -
성경 본문
(막14: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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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모든 만물은 기록된 대로 가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정해 놓으셨다. 사람의 목적과 용도를 정해 놓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사람이 지어진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통해서 만물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면 만물을 통치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이 통치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형상의 위치는 하나님 보좌 우편이다. 형상은 본체를 나타낸다. 광채는 영광을 나타낸다.
사탄은 이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창1:2). 형상이 없으면 하나님과 천사가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방해가 있어도 자기 형상을 창조하시는 분이고, 사람이 타락되었어도 자기의 형상의 자리로 회복시키고야 마는 분이다. 하나님의 전 사역은 자기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역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을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야곱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사람이다. 그때 그는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율법과 제사
구약의 두 축은 율법과 제사이다.
율법을 주신 것은 이탈한 아담의 정체를 폭로하여 심판하기 위함이다. ‘율법의 의(義)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 율법의 결론은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는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제단에서 죽은 제물의 피만이 언약궤(속죄소) 위에 뿌려질 수 있다. 양을 잡아서 번제단 위에서 태우면 향기는 위로 올라가고 재는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버려진다. 제물의 피는 휘장을 뚫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언약궤의 덮개 위(속죄소)에 발라진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께 갈 수 없다. 휘장을 뚫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오직 죽음(피)만이 속죄소 위에 발라질 수 있다.
이 죽음(피)은 무엇인가?
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창9장). 육체는 번제단에서 끝나고, 피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운명이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만족하신 것은 이 피를 통해서만 자기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해서 율법의 의(義)로서 하나님께 갈 육체가 없음을 계시하셨고, 동시에 어린양의 피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 계시가 분명하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제사의 의식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에게 이 계시가 명백하게 열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생은 번제단에서 지성소(속죄소)로 가는 길이었다(히9:12). 자기 길이 명백하게 보이면 반드시 그 길로 가게 되어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간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아버지께로 가는 운명(길)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14:6).”
선악과를 먹은 이후 생명 대신 지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마다 제각각의 길이 생겼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하나뿐이다. 이것은 탐구해서 가는 길도 아니고, 노력해서 가는 길도 아니다. 그 생명이니까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아들이면 아버지께 가는 것이고, 피조물이면 창조주에게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길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2-4).”
사랑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 외에는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살아도 나와 함께 있고, 죽어도 나와 함께 있다. 예수님이 나로 알기 전에는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나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나 자신으로 발견되는 자리는 어디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홀로 기도하셨다.
제자들을 깨웠지만 그들은 모두 잠을 잤다.
가야바 법정에서는 모두 도망갔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밖으로 나가서 통곡하였다.
십자가 밑에서 제자들은 뛰어내리기를 기대했다.
마지막까지 지켜보았으나 예수는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어디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신 자리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