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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참사람의 자리로 위치 회복
본문:
설교자: 이민재형제 -
성경 본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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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4.참사람의 자리로 위치 회복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봄
말씀 하나님을 봄(들음)
누가 우리에게 왔는가? 말씀 하나님이 왔다. 사람은 태초에 계신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육체가 되신 인격을 봤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말씀은 하나님을 운반하는 도구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요 3:14-15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말씀을 보고 먹고 믿는 우리에게 씨(생명)가 되어서 새 창조가 발생했고, 그 결과 새로운 인격(열매가)이 산출되었다. 이 새로운 씨의 번식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교회다.
그러나 이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은 창세 이래로 아담-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세계를 만들어 언제나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해 왔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특별한 대책을 세워서 이탈한 인간을 회복하셨다. 이 대책이 바로 말씀이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다.
연합의 계시를 봄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호흡(생기)을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하셨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들었으며, 아브라함은 백세에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얻었고, 예수는 말씀이 육체가 된 한 인격으로 오셨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계21:3). 이와 같이 형상과 실제는 연합하여 한 실체를 이룬다.
하나님은 지으신 그 사람 안에서 함께 연합을 이루시려고 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연합을 방해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으며 인생은 동산을 떠난 후부터 혼란이 왔고 방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과 연합을 위한 종교적 제물을 드리는 데서 더욱 불행이 왔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롭고도 산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 안으로 모든 인류를 불러 모았으며,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운명의 제한 안에 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옛사람-아담을 끝내셨다. 또한 그가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그의 부활에 참예시키셨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구속(회복)의 인격을 봄
하나님과 사람은 어디서 만나는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도 끝나는 자리고 사람도 끝나는 자리다. 하나님은 자기의 위치를 포기하고 지성소 안으로 오셨고 인생도 번제단을 통해서만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탈된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와 죽음이 필요하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뛰어내릴 수 없는 인생의 운명을 모든 인류에게 전시함으로써 거역한 사람을 근본 안으로 회복하셨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구속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구속을 가져왔다. 구속이란? 원 위치로의 환원이다. 이것은 생명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흙의 회복이고 땅의 회복이며 위치의 회복이고 진실의 회복이다. 예수는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인생을 원형 안으로 회복했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행위를 만들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교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었기 때문에 새 언약의 성취로서 예수가 온 것이다.
회복된 교회를 봄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나온 그 인격(생명)으로 말미암아 건축된 것이 교회다. 교회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으로 시작되었으며 마침내는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열매를 맺고 경작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자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고 궁극적 소원은 하나 됨으로써 교회를 이루는 일이다. 이미 창조 안에서 둘이 합해 하나 되게 했고, 역사 안에서 본성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도록 했다. 에베소서와 계시록은 신랑과 신부의 연합으로서 최종완성을 말하고 있다. 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교회의 소원이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의 경주는 연합의 경주다.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봄
이스라엘은 택하신 백성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놀라운 인도를 받은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여 언제나 소화불량으로 원망하였으며, 자기들대로 소화하려고 가짜 소화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먹을수록 더욱 괴로움에 처했고, 오히려 십자가가 왜곡되어 인간의 미덕을 산출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하여버렸다.
예수는 실종되고 십자가는 왜곡되었으며, 생명은 선악과로 대치되었고, 교회는 종교의 길을 걷고 쇠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교회는 어쩌면 예수로 포장된 세상 중의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기독교회는 회복하지 못할 중병에 걸려있다. 그러나 이 질병에 탁월한 처방약이 개발되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제조된 운명의 약이다. 최신 개발된 소화효소이고 만병통치약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 구속을 위한 최종적인 복음이다. 이 자리를 잃어버리면 도로 옛날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교훈에 끌려가면 안 된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