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심
본문: 디모데후서1:9~12절
설교자: 김치현목사 -
성경 본문
(디모데후서1:9~12절)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말씀 요약
5.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였다. 모든 사람이 구원과 진리에 이르자면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렇게 되도록 길을 여셨을 것이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1:7) 하였다. 예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날 때 모든 사람이 그 영광을 보게 되고 그를 반대하던 자들까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왜 죽었는가?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제자들의 해석과 교리적인 이해 이전에 그분의 참 모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죄목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불렀다는 것과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요5:18).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 말 속에 안식일이 재해석되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규정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죽음 이전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때문에 받은 죽음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를 보고 우리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왜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나?
만약 예수가 석가모니처럼 자연사 하였거나 사고로 죽었다 해도 여전히 나의 구원자인가? 다른 한편 예수 처형 당시 똑같은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는데 두 개의 십자가는 왜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예수의 십자가를 표방하는 좌우 두 진영이 있다. 오른 쪽 십자가는 교권주의 십자가라면, 좌편 십자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십자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운데 있는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말씀과 삶의 집약이고 절정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말씀)’이라고 한다(고전2:4). 예수의 피를 보배로운 피, 구속의 피로 만든 것은 그의 죽음의 방식 때문이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생애와 인격의 성질 때문이다. 예수의 피는 세상의 어떤 죽음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다(히12:24).
예수의 삶의 성격은 무엇인가?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 말씀은 예수의 사역의 성질을 가장 잘 말해 주는 말씀이며(요4:34, 요5:19, 요10:30), 자기가 없는 사람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사람에게 당신의 생명과 본성을 주어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같이 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과 한 호흡처럼 일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이런 생명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의 삶이 어디서 나오는지 드러나기 시작한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 기름 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면서 극도의 연약함을 보이셨다. 그리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이 말을 토하셨다. 이것은 그분의 삶이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깊은 생명의 표출이었다. 삶은 매 순간 결정이고 선택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강한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에게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연약함을 보았다면, 십자가에서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운명을 보게 되었다. 십자가는 연약함을 인해 고난과 죽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의 숙명이었다(히2:9,14,15). 그래서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었다(빌3:9). 우리를 대표하신 분의 죽음, 우리를 포함한 죽음이라고 고백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행위가 아닌 은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서 위대한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올바른 자리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시기 전에 은혜 받을 위치에 있기를 원하신다. 은혜가 모든 행위의 마중물이 된다. 이 자리에 서면 판단과 자랑과 다투는 모든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고전4:7).
사망을 폐하심
부활에 대한 소망은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고전5:54). 내가 사망을 맛보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명약으로 쓰이게 된다(고후4:12). 예수의 죽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원망과 억울함과 불행을 축복으로 바꾸는 해독제와 같다(막16:17,18).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심
내가 시작했다면 결과가 나의 어떠함에 달렸지만, 그가 시작하신 일은 그의 성실하심에 달렸다(빌1:6, 애3:22,23). 우리가 할 일은 그가 하시는 일을 지켜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섬기는 것일 뿐이다(엡3:7). 거룩한 부르심을 일을 할 때는 땀이 나지 않는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