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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본문:요한복음 8장 31~40절
설교자: 김치현목사 -
성경 본문
요한복음 8장 31~40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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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020 특별 집회] 주제: "해방"
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참 단순하고 쉬운 말씀으로 들린다. 진리와 자유는 모든 사람이 귀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모두 좋아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가,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인가 생각하면 그리 간단한 말씀이 아니다.
자유를 알자면 종이 되어 매인 상태를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종이 된 적이 없다 했지만, 예수는 육신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된 것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처럼 행할텐데, 미움과 살인과 거역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종이라고 말씀했다.
창세기는 선악과를 먹고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아브라함을 통해 불러내신 인류 구속의 역사이고, 출애굽기는 애굽의 종된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해 애굽을 나오게 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사이다. 아브라함의 출향은 인간 회복의 기점이 되었고, 모세의 출애굽은 하나님 나라의 기점이 되었다.
사람이 원하는 자유
인간은 자유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인간이 갈망하는 자유는 독립을 의미한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가인의 미움과 살인, 네피림의 포악함, 그리고 바벨탑의 자기 영광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이 찾은 자유는 또 다른 속박이었다. 선악과를 먹고 그것이 체질이 된 인간은 악한 본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하였다.
사람은 형상으로 지어졌다. 자신이 스스로 무엇일 수 없고 무언가를 위하도록 설계되었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다른 모든 것에서 자유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자면 모든 것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이라 하였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유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다시 하나님의 목적에 귀속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붙잡힌 바 됨으로써 얽매이게 했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신다.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란 뜻이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아버지였고 그의 일생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알아가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시하시는 문제는 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일의 근원이다. 아브라함은 일생을 통해 그가 일을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시작하시도록 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 땅을 업으로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 질문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하고 그 중간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게 하시고, 캄캄할 때 그 사이로 연기 나는 화덕과 타는 횃불이 지나가는 것을 보이셨다. 이것은 죽음을 거치고 십자가를 거친다는 말이다.
하나님 역사의 성취 여부는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의 자손이 나중에 이 땅에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를 본 사람은 캄캄함이 임하여 자신에게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실패를 경험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할례는 천연적인 힘과 자랑을 끝내는 것이다. 그것이 깨끗함이다. 자기 힘이 있어서 하는 것은, 아무리 영적이고 하나님 뜻을 따른다 해도 결국 자기 영광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순도를 알려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얼마이고 자신에게서 난 것이 얼마인지를 보아야 한다. 할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손 대대로 하나님 언약의 표징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끝났을 때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태가 끊겼을 때 ‘자유 있는 여자’로 불렸다(갈 4:30). 이스마엘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천연적인 힘에서 벗어나 자유자가 되었다.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이삭은 약속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다. 그런데 약속을 따라 얻은 것까지도 육의 손으로 붙잡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도 육이었고 이삭을 붙잡는 것도 육이다.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하실 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육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받은 것에 집착하고 도취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사명과 우리가 하는 일,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뜻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온전한 그릇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난 사람의 자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 형상’의 증거가 된 사람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생명의 순도 100%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찾아가면 누구나 거할 곳이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십자가를 아는 것이다.
죄의 본성에 매여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길밖에 없다. 나의 모든 가능성이 끝나서 하나님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능동적이 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수동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말씀하셨다. 이것이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