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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말씀요약
본문:
설교자: 김진희 형제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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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갈라디아서(이제까지의 말씀 요약)
김진희 형제
1. 부정적인 상황
갈라디아서는 바울과 그의 복음이 유대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쓰였다. 가장 부정적인 문제(사도직, 다른 복음, 종교의식)를 통해서 가장 긍정적인 계시가 나왔다. 생명은 어려운 환경에 들어갈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이끄심(다메섹 사건)이라고 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
성경은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것이 나온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많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다른 민족보다 잘나고 우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정적인 요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요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사람의 것과 다르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상황을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의 완전함을 증명하신다.
2. 유일한 복음
유일하다고 해서 내 것만 옳고 다른 건 다 틀렸다고 주장하라는 것이 아니다. 호롱불 시절에는 그 불도 밝았지만, 전기가 들어온 후로는 어두운 것이 되고 만다. 약이 없으면 온갖 약이 다 있지만, 특효약이 오면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율법적인 종교가 다시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대체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유대교에서 교회로 들어온 자들이 예전 것을 100%버리지 않았다. 바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십자가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선물이다. 그래서 유일하다. 가르치고 고쳐서 될 일이면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겠는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바울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보았고, 거기서 자기도 끝났음을 알았다. 그의 복음은 죽은 나를 살리신 예수, 한 분에게 고정되어 있다. 다른 복음을 섞지 않았다.
3. 율법
유대인들의 율법은 지금도 완전하다. 이것을 왜 폐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왜 문제인가? 바울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체하고 빗나가게 하기 때문에 우려한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율법은 눈에 보인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가기 마련이다. 문화나 종교나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것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좋게 보이고 그것에 끌려가게 된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갈2:16) 되지 않은 일을 계속하는 게 저주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저주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모든 인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쳐놓고 내가 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내 의를 쌓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니까 끝내고 다시 시작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를 버리고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끊어지면 인간적인 방법이 나온다. 그러면 저주다.
하나님은 멀고 율법은 가깝다. 사람은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으로 고정시키려 한다. 교리를 만들고 제도를 세워서 자기 집을 지으려고 한다.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하나님께 말한다. 성경 이외엔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가 만든 교리와 제도 속에 가만히 계세요.
기독교는 정통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교리와 규례의 담장을 높였으나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머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만나도 하루 이상 머물면 썩는다.
신앙은 혁명적인 것이다. 정치는 보수적이어도 되지만, 교회는 보수적이면 망한다. 교회로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 갈아엎는 것이다. 수리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도 은혜지만 복음은 은혜 위에 은혜다. 예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4. 자유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옛날에 비하면 자유가 많아졌는데도 왜 만족함이 없을까? 물을 떠난 고기처럼 신성한 위임을 버렸고 동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런 제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도 자유가 없다.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죄 사함을 받았어도, 범법자가 아니라고 해도 자유가 없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다니고, 의식과 교리를 따르지만 자유롭지 않다.
사라(이삭)는 자유자이지만, 하갈(이스마엘)은 종이다. 자유는 정의나 상식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내 노력과 땀이 들어간 곳에는 자유가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세계에 자유가 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참 자유자임을 보았다. 가장 자유가 없는 자리에 참 자유가 있다. 나의 자유를 주장하는 한 주님이 자유로울 수 없고, 교회가 자유로울 수 없다.
5. 상속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업을 이을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유업은 하나님 자신이다. 처음부터 사람은 땅위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자로 지어졌다.
만물 가운데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을 표현하는 기능이 탁월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인생 최고의 가치다. 사람이 표현의 기능을 잃어버리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같이 망령된 것이다.
표현은 말을 잘하거나, 많이 하는 데 있지 않다. 예수께서도 평소에 많은 말을 했지만, 십자가에서는 몇 마디 못했다. 신음이나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완전한 표현이었다.
콩이라야 콩을 상속한다. 현재의 콩은 과거와 미래 콩의 증거다. 아무리 작아도 콩이라야 콩의 증인이다. 이씨와 김씨는 서로 다르지만 예수의 운명 안에서는 같은 계열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