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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안식이신 사람
본문: 창1:31, 2:15, 2:18~25
설교자: 홍원선 형제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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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하나님의 안식이신 사람
(창1:31, 2:15, 2:18~25)
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창1:31)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다 마치심으로 안식하셨고 그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창2:3)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고 안식하셨고, 복을 주셨다.
그런데 아담 이후에 사람은 존재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까지라도 판단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 잘못되어 버린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형을 알아야 수선이 가능하지 모르면 불가능하다.
진실은 흙이 흙대로 있는 것이다. 생명은 흙이 흙으로 있는 데서 나온다. 생명 자체는 완전한 진실이다.
농부는 흙을 보고 “좋다.”고 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흙을 보고 “나쁘다.”고 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은 흙의 진실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농부시라면 흙,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이사야서에는 “마른 땅에서 솟아난 연한 순 같다. 볼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우리가 다 그를 무시하였다.(사53:2)”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결국 우리의 운명을 멸시하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농부시니까, 생명의 아버지시니까, 생명의 창조자이시니까 보시고 좋다 하셨다.
예수를 보라.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간구하셨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다. 이것이 아버지 앞의 아들, 창조자 앞의 피조물로서 참 사람이다. 이 자리는 우리와 같은 자리다.
2. 동산을 경작함(창2:15)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그 동산을 지키며 다스리게 하셨다. 지어진 사람은 동산을 관리하고 경작해야 될 ‘동산지기’다.
인생은 흙이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결실을 얻고, 좋지 않은 씨를 심으면 좋지 않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씨가 가장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씨로 오셨다.
정교하게 씨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씨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참)." 하였다. 그 씨는 생명이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도 그 생명이 아니면 전할 수 없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까지 42대에 걸쳐서 족보를 기록해 놓았는데 그 속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들어 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로 이어지는 이 사람들은 율법과 세상에서는 전혀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 길로 오셨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것이 예수의 진면목이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고 간구하셨던 대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 운명 이외에는 내 안에 있을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운명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을 경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동산에 두셨던 사람들이다. 비록 선악과를 먹고 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이삭이 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 씨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 씨를 경작해서 소출을 얻는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3.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창2:18~25)
사람 스스로는 생명이 없다. 콩이 들어와야 콩밭이 되는 것처럼 생명이 들어와야 되는 존재이다. 사람은 호흡을 받아야 되고 생명나무 열매를 받아야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분이다. 형상이 없으면 표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기의 배필로서의 형상을 찾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배필이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하나를 빼서 하와를 지으셨다. 아담의 배필인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온 것이다. 참 배필은 생명이 하나라야 한다. 그래서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지만 예수님과 이질적인 생명이라면 아무리 예수를 영접한다 해도 그것은 생각일 뿐이지 내 생명이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오셨다.
참 이적은 무엇인가? 그분 자신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6:55)” 거기서 자기 자신을 보이셨던 것이다.
마지막에 제자들 앞에 드러난 예수는 아버지 앞에 아들인 자리, 창조자 앞에 피조물이었다.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하셨다고 하신 사람이 십자가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다. 이것이 참 사람이다. 이 진실이 예수의 권세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하신 존재적 권세, 진실의 권세로 사탄을 이기신 것이다.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났다.
주님은 우리를 자기의 존재의 자리로 부르셨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하나로 포함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 되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그분과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그분의 운명 안에 있는 것이다. 이 한 사람 안에 포함되면 그의 모든 것이 곧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