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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의 끝남과 하나님의 승리)
본문: 마27:45-53
설교자: 노우경 형제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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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의 끝남과 하나님의 승리)
(마27:45-53)
가. 사람에게 버림받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대로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갔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은 절망적 상황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유대인의 소망과 관련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기대나 생각 속에 있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은 30냥에 넘겨주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확실한 그 무엇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를 때 그가 우리에게 결정적인 보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를 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는 지도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답답해서 못 견딘다.
세 번째는 빌라도에게 버림받은 자리다. 빌라도가 예수를 조사해 보니까 죄(정치적인 죄)가 없어서 그를 살려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아우성을 쳤다. 결국 그는 자기의 정치적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예수를 내주고 말았다. 예수가 옳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세상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서 군병들에게 맡겨 버렸다. 군병들은 예수를 희롱했다고 하였다. 예수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이기고 즐겁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희롱거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두 강도와 같이 달렸는데 강도들은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예수에게 분노하며 욕했다. 그들은 예수와 한 운명이 아닌 다른 길 안에서 죽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로 표시된 메시아 관념, 가룟 유다로 표현되는 인간의 야망과 욕망, 빌라도로 표현되는 정치적 세계, 이런 것들이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세계에 갇혀 있다. 우리가 이런 관념에서 벗어나야 새 사람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예수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이다.
나. 하나님에게 버림받음
1) 마지막에 하나님을 부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자기의 생명으로 의지하던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이것은 ‘하나님! 당신만은 나를 붙들어줘야 합니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버렸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왜 욥을 버렸는가?’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원수를 이기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협력을 얻지 아니하면 사탄을 점령할 수 없다. 하나님이 부득이 사람(인자)의 곤고함을 보고도 응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끝까지 보호해 주면 좋겠지만 막상 전쟁터에서는 자기 스스로 싸워 이겨야 한다.
예수님이 버림받는 자리는 예수 자신으로서 사탄을 이겨야 하는 자리다. 이 자리가 바로 십자가다.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의 운명으로 안다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든지 안 버리든지 그것이 내 길임을 알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부모를 아는 것도 그렇다. 부모가 내게 무엇을 해 주지 않아도 부모인 것을 아는 것이 부모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와 꼭 같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자리에 오게 되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했던 그 하나님이 어디로 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모든 관념이 여기서 없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사람이 완전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예수님은 여기서 철저하게 버림받았지만 이 자리가 세상을 뒤바꾸는 자리가 되었다.
2)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마27:50-53)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상식의 세계, 인간의 세계가 완전히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하게 찢어졌다. 이제는 문이 열려 하나님이 완전하게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왜 사람은 하나님을 못 만났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휘장이 있었다. 창세기 3장에서 화염검을 두어서 사람이 동산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같다. 인간의 마음속에 지금도 이 휘장이 갈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선악과가 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휘장이 두꺼워지게 된다. 형제와 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율법을 가지고 보면 휘장이 쳐지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휘장이 있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율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이 없어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도 능력, 지식, 선악 등 장벽이 있지만 십자가에서 장벽이 없어진다. 십자가라는 운명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과 우리, 형제와 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완전하게 장막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이다. 유대교 역사에서 휘장 없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휘장을 쳐놓은 것은 율법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휘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휘장이 끝난 것은 율법이 끝난 것이고, 율법이 끝난 것은 선악과가 끝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하였다. 땅은 지금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던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땅속에 들어가면 썩어버린다. 사람도 죽으면 땅에 묻으니 땅과 바위가 가둬놓고 있는 것이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말은 땅과 바위로 표현되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진동하고 터졌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죽을 것인데 죽음이라는 것(힘, 세력)이 우리를 붙잡고 억압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음에 매여서 일생을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고 자기가 친히 먼저 죽음을 맛보셨다고 하였다(히2:9,15).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가 왕 노릇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서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왕 노릇하지 못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다. 우리를 사망으로 붙잡던 것,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게 하고, 형제와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십자가 운명에서 발견될 때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하였다. 이것은 사망의 권세가 십자가 때문에 흔들려서 터져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이유는 바로 십자가를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을 때 그를 따라다니던 사망의 모든 세력이 물러났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받은 자리에서 사람의 운명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거기서 완전하게 세상을 뒤바꾸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자리로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이 끝나니 하나님이 완전히 승리하셨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