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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업
본문: 창2:8∽9, 계22:1∼2
설교자: 류삼곤 형제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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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영원한 유업
(창2:8∽9, 계22:1∼2)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심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그 동산에 두셨다. 동방은 서쪽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하는 말이고 그 절대적 의미는 ‘앞’이다. ‘하나님의 총체적인 창조의 표현인 동산’은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다.
‘에덴’의 어원은 ‘기쁨’이고, ‘즐겁다, 기쁘다‘는 뜻이다. 에덴 즉, 하나님 앞은 기쁜 곳이고 즐거운 곳이라는 말이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 앞은 두려운 곳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처럼 두려운 관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을 때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에덴은 즐겁고 좋은 곳인데 사람은 이렇게 두려움에 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과 만물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자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되고 사람은 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래 에덴은 즐거운 곳이다.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두심
동산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두었다’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중심이고 목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원에 심어진 나무(시92:13 참조)와 같이 항상 보시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시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다. 하나님이 동산을 창설하신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사람을 동산에 두고 같이 살기 위함이었다.
동산은 하나님의 정원이다. 정원은 ‘과수원’ 이라는 의미와 ‘공원’ 이라는 의미가 있다. 과수원은 먹는다는 뜻이 있고 공원은 쉰다, 논다는 뜻이 있다. 동산은 과수원이고 공원으로서 먹고 노는 곳이다. 동산에서 먹고 노는 것이 사람이다. 아기가 부모 앞에서 먹고, 자고, 노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먹고 놀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먹고 놀 그런 사람, 배필이 필요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일을 다 마치시고 창조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일이 필요 없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동산을 떠나왔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동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인간의 현실은 모두 동산 밖에 있는 것이다.
역사 이전의 세계를 봄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동산을 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역사 이전의 세계로서 우리의 현실 안에는 전혀 없었던 세계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즐겁게 노는 곳이고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곳이다.
우리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아기 때의 일을 모른다. 부모님이 말씀해 주시면 알 수 있지만 스스로 알 사람은 없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살아도 고향을 모를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우리의 고향은 어딘가? 하나님 앞이다. 그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먹고 노는 곳이다. 이보다 더 완전한 말은 없다. 이 얼마나 확고한 말씀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기화요초 만발하고 신비한 노래가 들리는 곳이라고 굉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이상과 꿈을 투사시켜서 그런 곳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노는 곳이 인간의 고향’ 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아무데도 없다.
동산의 회복
요한계시록 처음에 이 동산의 획복이 나온다. 에베소 교회에 생명나무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하였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성과 그 성 안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나오고 생명수와 생명나무가 나온다. 이것은 영원한 동산의 회복이다.
지금 이 세상은 동산을 잃어버린 세계이며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 어린아이 때 부모 앞에 있었을 때이다. 아무 근심걱정도 없이 단지 잘 먹고 잘 놀기만 하면 부모가 좋아하는 그런 세계였다. 잘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세계보다 좋은 낙원은 없다.
인간은 어디로 회복되는가? 하나님의 동산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즐거워하는 곳이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양과 송아지와 비둘기와 곱게 간 가루로 구운 떡과 감람유와 계피가 있다. 이것은 모두 인격의 어떤 면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음식을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같이 먹어야 하나님과 함께 놀고 즐거워할 수 있으며 그분의 동산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처소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처소다. 이것은 땅위에 설치되어 있는 성막이라고 할 수 있다. 온 땅이 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성막을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만났던 것이다. 이제 이 성막은 온 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어느 지역에 한정되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인격으로 된 성전이었다(요2:19, 21 참조).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마음)이 심비에 새겨진, 말씀이 육체가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십자가에 달려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모두를 구속하여 새로운 생명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놋뱀을 쳐다본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자신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영생)을 분배하신 것이다(요3:14-15 참조).
사탄에게 유린당했던 인격을 회복하심으로 이제 우리도 하나님이 거처할 수 있는 성전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거처할 처소가 온 땅으로 확대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산은 곧 인생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데 장소나 공간이 문제가 되겠는가? 부모가 자식을 보고 즐거워할 때 아이들 방이 좋아서 즐겁겠는가?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즐거운 것이다.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이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은 인격이다. 그러면 인격이라는 것은 어디 와서 현실화되는가? 그곳이 바로 교회다. 이 인격의 현실화, 이 인격의 사회, 이 인격이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이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께서 살리시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엡1:4-6, 5:26-27).
완전한 회복
우리의 교회생활은 동산의 생활이다. 동산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밖에 없다. 교회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기고 노는 곳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 생명나무와 생명수가 흐르는 곳, 만국이 소성하는 것과 다시는 배고픈 것과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는 세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처음 동산, 에덴보다 더욱 온전하게 더 이상 사탄의 계략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이상세계로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심비에 그의 말씀(마음)이 새겨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굳어지지 않는 생명으로 보전되고 이 새겨진 인격이 이 세계의 기초가 될 것이다. 영원한 도성, 아름다운 도성, 새예루살렘으로 완성되어져 갈 것이다.
우리들은 이 아름다운 세계를 영원한 유업으로 삼아서 가꾸고, 경작하여 온 세상에 널리 퍼치고 오고오는 세대에 온전하게 유전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