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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 예수그리스도
본문: 엡5:8
설교자: 이영일 형제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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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생명의 빛 예수그리스도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음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소금과 빛
소금은 그 본성이 짜기 때문에 음식을 절이고 부패를 방지하며, 빛은 그 본성이 밝기 때문에 숨겨지지 않고 사방을 밝혀준다. 소금이나 빛은 천국 백성의 본성을 말한다. 소금은 땅을 절이고 부패를 막으며,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그 어둠을 물리친다.
1)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1).” 혼돈. 공허, 흑암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나의 상태였다.
때가 되니 혼돈 공허 흑암에 깊이 빠져 있는 나에게 한 사람이 빛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 사람을 영접했다. 이 빛은 태양빛도 전기불이 아닌 내 속에 있는 어둠과 혼돈을 물리치는 생명의 빛이었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는가?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강도를 만나면 강도를 당하고 주님을 만나면 잃었던 인격이 회복된다.
2) 인생은 어디에 있는가? 위치의 문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셨다. 종교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세상 짐도 무거운데 헌금 기도 전도 봉사 등 무거운 짐을 가중시키는 세상보다도 더 지독한 세상이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도 나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향하여 돌아서야 한다. 위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빛을 비춰야 할 위치에 있다.
3) 인생은 해석의 문제다.
세상은 자기가 보는 대로의 세상이다. 예수님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냐, 만들 수 없는 사람이냐? 예수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사람이냐, 뛰어내리고 싶어도 뛰어 내릴 수 없는 사람이냐? 해석에 따라서 우리는 물론 인류의 운명이 달라진다. 만일 예수님이 돌로 떡을 만들 수도 있고 못 박힌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우리와 완전하게 다른 외계인이다. 그렇다면 그와 나는 어디서 만나며 어디서 하나 되는가? 길이 없고 답이 없다. 망하는 것이다.
분명하고 단호하게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예수,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없는 예수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인생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혁명의 말씀이다. 성경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남극과 북극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극과 극이다. 이런 말씀은 세상과 종교에게는 핵폭탄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종교는 예수를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유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이것이 죄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천당 가는 길을 찾기 원하지만 성경에는 그리스도만 있을 뿐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던 주님이 이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하신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존재적으로 빛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존재적으로 세상의 빛이다. 그냥 나를 말하면 된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그래서 쉽다. 모른다고 말해도 빛이고 당신은 어둠이요 해도 빛이고 똥통의 구더기 얘기를 해도 빛이다. 윤리 도덕적이거나 간증을 유창하게 잘하거나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고 인격의 자리, 곧 빛 되신 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성도(구별된 자)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소금이 소금 맛을 내고 빛이 어둠에 비춰질 때 어둠은 물러가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나님 나라가 생육하고 번성한다. 이 영광스럽고 엄중한 위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밝히 알자! 알게 되면 존귀하게 살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존귀하게 살게 된다. 인생이 공허한 것은 자기 가치만큼 못살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같이 사람 낚는 사람으로 살 사람이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산다면 얼마나 공허하겠나? 100점짜리 인생이 50점으로 살면 50점만큼 공허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고 꾸미거나 노력하지 말자. 예수님은 세상을 구하려고 작정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주어진 삶을 살았는데 세상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소금이면 우리가 가는 곳이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고, 우리가 빛이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죽었던 자들이 살아 날 것이다.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인격의 자리로, 빛의 자리로 옮겨주신 주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