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로부터 온 초대...“예수 안에”
본문: (창 1:27,계 22:1~2)
설교자: 이성규 형제 -
성경 본문
-
말씀 요약
태초로부터 온 초대...“예수 안에”
(창 1:27,계 22:1~2)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참 배달부를 만나다
40여 년 전에 초대장을 받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최고의 존재이고 당신을 지으시고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신분이 당신입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전까지의 초대장은 “당신은 죄인이고 허점이 많은 불량품이어서 수리가 불가능하고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어서 매일 매일이 불안한 날들이었다
. 배달사고이다. 창3장 이후의 무엇이 되려고 힘쓰고 땀 흘리는 타락한 사람이 수천 년 동안 배달하였으므로 우리는 연약하고 죄인이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으로 표현된 것이다.
처음부터 “의롭다” 하심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자기 힘을 믿고 무엇이 되려고 평생 노력하지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나는 안 돼”하게 되고, 결국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경배 받을 분으로만 알고, “주와 함께”, “주님 안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참 배달부는 누구인가? “흙으로 빚어진 사람”, “ “뛰어 내릴 수 없는 인격”으로 하나님 마음이 새겨져서 누구를 만나도 “너는 하나님 형상으로 온전해!”, “너는 문제없어!”하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이 마음은 로마서에서 나온 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보다 원천적인 태초에 사람을 지으신 분의 마음의 표현이고 초대인 것이다.
어디로 초대 받고 있는가?
어차피 사람은 어떤 나무에 매달리도록 지어졌다. 문제는 선악과 나무인가? 생명과 나무인가? 이다. “내 맘대로 살거야!”하면 선악과 나무이고, “당신 뜻대로”하면 생명나무에 매달리도록 되어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보암직한 것에 평생 노예로 살게 되고, 생명의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에게 붙잡혀 하나님을 상속받는 아들로 사는 것이다.
“너와 나는 한 운명이야”하는 고백을 40여년 들었다. 동일한 운명을 고백을 받다 보면 그 자리에서 “참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매달린 운명이 내 운명으로 알아지면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의 “예수 안에”, “매달린 운명”으로 초대 된 것이다.
“뛰어내릴 수 없는 운명”이 나의 운명으로 보이는 순간 우리의 길이 보이고 이것이 영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가 배달될 수 있는 주소지가 생기고, 그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가 생겨서 비밀한 교통은 시작된다.
거룩하게 구별하심
갈 곳 없는 여인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매달린 운명” 속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뛰어내릴 수 있어!”하는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는 한탄이 나오게 된다. 이 옛사람의 본성은 어린양 고기, 쓴 나물, 무교병 같은 말씀과 인격을 먹고 마시므로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성품을 갖게 된다. 이 새로운 양식을 통해 어린양 같이 끌려가고, 쓴 나물 같이 불필요한 것을 빼고, 부풀린 것 없는 무교병 같은 사람으로 변해가므로 결국은 매달린 인격으로 살아가게 되는 데 이것이 온전한 혼의 구원이다.
왜 “뛰어 내릴 수 없는 자리”여야 하는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보다 불교의 “공(空)”이 더 비워져 보이기도 하기에 누룩이 들어올 수 있다. 오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한 최종적 무교병은 “뛰어내릴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다. “내 시대에 마지막 복음이다”(목사님)라 하셨다. 그 동안 십자가는 여러 과정을 통해 표현 되었는데 이 시대에 가장 적당한 표현이다. 이 말씀 앞에서 어떤 누룩도 들어오기가 어렵기에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간(무교절) 무교병을 먹는 것처럼 우리 평생 이 말씀을 매일 먹어야 한다. 매달린 자리에서 매일 무교병을 먹은 사람은 다른 형제의 유교병을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하여져 간다.(레23:17 오순절, 교회의 건축)
영화롭게 된 육체
“뛰어 내릴 수 없는 본성”을 갖고 표현하고 그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육체의 구원이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은 출생부터 “뛰어내릴 수 없는 운명”이고, 그 자리에서 말씀을 받아 하나님 성품이 자라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영광스런 새 인류가 된다. 우리가 무시했던 육체가 “매달린 자리”에서 새 양식을 먹고 변화되어 다른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된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영화로운 육체로 드러나고 이것이 육체의 구원이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 는 모습으로 회복된 것이다. 연약한 사람의 육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살리는 말씀, 사랑하는 마음 모두 육체에서 나오고 있고 순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교통과 건축은 육체를 통해서 이다. 육체가 더 쇠하기 전에 열심히 이 “뛰어 내리지 못하는 운명”을 경작해야 한다. 결국 사람은 어느 나무든지 매달릴 운명이다. 예수님은 뛰어 내릴 수 없는 십자가의 운명 안에서 영광스런 생명의 열매가 열려 모든 인류가 먹을 양식이 되셨다.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는가? 부름 받은 사람은 십자가에 매달려 생명의 열매로 익어간다. 교회는 이 나무에 매달린 인격의 영광이 빛나는 새 하늘 새 땅이다. 매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매달린 인격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참 복음이고 우리의 사명이다.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는 시간은 무익한 시간일 뿐이다. 마지막 남은 한 숨 까지도 사용하시는 목사님처럼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100% 사용하자. 연약하지만 아직 주님을 표현할 시간을 남겨주심을 감사하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