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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안에서 행함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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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
처음에 혼자 하던 것을 이렇게 여러 사람이 분담하여 해주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옛날보다 더 많을 일을 하게 된다.
나는 여러분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뭘 해 주신 것마다 내가 한 것 같아서 너무너무 좋다. 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한 사람이 할 것을 모든 사람이 해주는 것이다. 내 일이 따로 있고 우리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우리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 이 한 사람이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라는 말이다. 한 사람이 범죄를 했는데, 왜 모든 사람이 범죄를 한 것인가? 그 한 사람 안에 모든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한 사람이라는 말은 꼭 개인이라는 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개인을 지었느냐? 단체를 지었느냐? 이런 것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그것은 여러 명을 지었다는 말도 아니고, 1, 2, 3, 4하는 한 명을 지었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 내가 나오지 못하면서 보고 있으면 전부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할 일을 여러분이 다 하고 있다. 또 여러분이 할 일을 누군가가 다 하고 있다. 내가 혼자 할 때도 감사했지만 여러 사람이 내 일을 하니까 너무 감사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것이 세상에는 없다. 아무데나 있는 일이 아니다. 교회만 그렇게 될 수 있지 다른 데는 그렇게 될 수 없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로운 하나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개체이면서도 하나이다.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1, 2, 3, 4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이다.
로마서 5장 6장에서는 이렇게 이상한 말이 써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전반부는 베드로 행전이다. 베드로 사역 중심이다. 거기서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밀접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따라 다녔고, 개인적으로 맹세했고, 개인적으로 부인했고, 개인적으로 배신하고 달아났다. 개인적으로 직접 자기가 했다.
베드로 사역에서는 예수님을 항상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 자기 때문에 고난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와 비교했는가? 구약의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과 비교했다.
백성의 죄를 위해서 제물을 드린다. 한 마리의 양을 드렸는데, 온 백성의 죄가 사하여진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옛날에는 양을 잡아서 드렸는데, 이번에는 독생자를 제물로 드리게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전반에 걸친 복음이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하게 되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어있다.
나 때문에 죽었고 나를 위해서 죽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 때문에 나는 살게 되었다. 그분이 제물이 되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았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녀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그분이 내 대신 죄를 졌기 때문에 나는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내 대신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본 것이 아니고, 그분을 보고 나를 용서했다는 말이다. 나를 보면 안 될 텐데, 흠 없는 양이신 예수를 보고 그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생각해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말이다.
나는 용서 받을 수 없지만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다.
이해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이해가 된다면 대단히 천재적이다. 나는 이것이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남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벌금은 남이 내주면 된다. 내가 벌금을 받았는데 돈이 없어서 대신 누가 그 벌금을 내준다면 나는 해방이 된다. 법률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내 죄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죽었는데 용서가 될 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나도 여러분 같았으면 진작부터 이해가 되었을 텐데 이해가 안 돼서 아주 애를 먹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니까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제물을 드리기 때문에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없다.
원시 종교에서는 그런 것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것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는데 내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죄도 몰랐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사도행전 중반을 넘어가면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시작된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가지로, 전반부는 베드로의 사역이고, 후반부는 바울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사역 안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베드로와 좀 다르다. 베드로는 일대일로 나 때문에 죽었고 그의 죽으심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니까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니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
나같이 제사 지내는 것을 본 일이 없는 사람, 그리고 제사로 인해서 용서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다.
범위가 넓어졌다. 베드로의 사역은 유대인에게 국한되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전 이방인에게로 범위가 넓어졌다. 베드로는 예수를 직접 본 사람이고, 직접 따라 다닌 사람이다. 개인적인 관계가 확실히 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 말이 나온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예수를 본 일도 없고 만난 일도 없고 예수와 어떤 관계를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서 이 놀라운 계시를 보여 준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 베드로 같으면 나도 봤으니까 그렇다고 하겠지만 나는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예수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까 모른다.
내 어머니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통곡할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멀리 유대 땅에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로마서 6장에 가면 또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고 말한다. 세례 받는다는 것은 물속에서 침례 받는다는 말이다. 물속에 잠기는 것이니까 죽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와 합하여 죽었으면’이라는 말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 안에서 세례를 받았으면 나는 그의 죽으심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와 우리의 관계가 두 사람이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분과 합하여 나는 죽었다는 것이다.
왜 내가 십자가를 계속 이야기하는가?
베드로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죽은 것은 예수님이 죽은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위해서 죽은 것이 되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꼭 알아야 된다. 전혀 무관한 사람 같은데 본인과 관계가 없다. 십자가가 왜 관계가 되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하신 좋은 말씀들은 좋다. 산상복음의 말씀은 좋은 말씀이다. 어떤 유명한 성서학자는 산상복음이야말로 전 성경의 히말라야 꼭대기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황금율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많은 율법을 다 함축한 가장 높은 말씀이라고 값을 친다. 누구라도 들으면 다 그렇다고 한다.
사실은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동양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에도 얼마나 좋은 말이 많은지 모르고, 좋은 가르침이 많은지 모른다.
산상복음에 나오는 가르침과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비교해보면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기가 어렵다. 옛날에 한학을 하시던 어른들은 성경 읽어보고 우습게 생각하고 시시하고 생각한다.
서양사람들은 성경밖에 없으니까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글을 읽은 사람들은 시시하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가르침보다 그분 자신이 중요하다. 산상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것이 그분의 마지막이고 그분의 최후의 진실이다. 그 예수라는 분이 가장 중요하다면 어디서 그분의 본질이 그분의 본색이 본 자리가 드러났는가?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기적을 행하신 분이 그분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기적을 행한 것은 행한 것은 행한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행했더라도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
아무리 잘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야 그 사람을 안다. 죽은 데 가서 보면 그가 신인지 인간인지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모르고는 예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적의 연속이다. 복음서를 읽으면 기적이 대부분이다. 기적을 빼고 나면 별로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배우면서 신인가, 인간인가?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인간이 이럴 수 있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수 있는가? 인간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수 있는가? 이렇게 놀랐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이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것을 다 벗겨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기적이나 이런 것들은 신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옛날 이야기이니까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시대에서 합리적인 시대에서 그런 일이 있겠는가? 그때는 그렇게 말해야 믿을 수 있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 조상들도 옛날에는 귀신이 항상 있다고 믿었다.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가 갑자기 열이 나면 무슨 귀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줄을 쳐놓고 애기 낳은 집에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삼시랑이 노한다. 삼시랑이라는 말은 산 신이라는 뜻인 것 같다. 애기를 낳게 하는, 애기를 돌봐주는 신인데 그 신이 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기가 아픈 것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다 믿었다. 그때는 그렇게 말해야 되지 세균이 와서 어떻게 되었다고 하면 누가 알아듣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말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진짜는 그 속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생겼다. 그것을 다 벗겨버리고 나면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에게서 기적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가르침의 말씀이 많지 않다. 예수님이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많지 않다. 논어는 전부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이다. 또 불경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와 제자들이 직접 대화한 책이 많다. 알고 보면 비교가 안 된다. 그런 것 저런 것을 다 제하고 나면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그분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분도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십자가로 갔을 것이다. 이적을 행하고 잘 되었으면 무엇 때문에 십자가까지 가겠는가?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갔다고 생각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주었는데, 너는 뭘 주려고 하느냐? 이렇게 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면 하나님이 한국백성을 축복했다고 할 텐데, 유대인들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너무 시시한 분인 것이다.
하루 한끼 고기 좀 뜯어 먹었다고 감동 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은 사람들이다.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는데 너는 무엇을 주려고 하느냐고 말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다 돼야 되는데 그래도 안 되니까 내 생각에는 포기한 것 같다. 예수님이 그 사역을 포기하신 것 같다.
복음서의 후반부로 가면, 기적이 없어져 버린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없어져버린다.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이적을 행해야 하는데, 이적이 없다.
이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영은 이적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 문제가 이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다른 문제이다.
죄의 문제인데, 죄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다. 왜 먹었는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먹었다. 그것이 죄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 죄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내용은 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 같이 되려고 했는가? 예수 같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담은 자기를 스스로 생각할 때, 너무 제한이 많다,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내 마음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유독이 지금까지 살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은 아무것도 안 됐다. 그것이 참 민망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참 감사하다. 여러분과 사는 것만도 40년이다. 40년 동안에 내 계산으로 한 것은 하나도 맞지 않았고, 이상하게 하나도 그렇게 안 됐다. 일부러 방해한 것처럼 안 됐다. 물론 내가 재주가 모자라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다.
내 마음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은가? 장사도 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했는데 다 실패하여 옆에서 형제들이 목사님 그만하라고 했다. 차마 직접적으로는 말을 못하고 뒤에서 전부 끙끙거리면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안 됐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이끌어가신 것 같다.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내가 하나님을 끌고 갔을 것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딸려오시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잘 따라 가시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하나님이 딸려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따라 갈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복인 것 같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복이 아니고, 반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 복이 되었다. 나는 어찌 항상 거꾸로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하는 길로 하면 안 된다.
나는 독특한 길로 오게 된 것인데, 내가 일부러 독특한 길을 택해서 온 것도 아니다. 그냥 끌려왔으니까 내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니다. 딸려 온 것뿐이지 일부러 한 것이 아니다. ‘주의 손에 이끌려’, 그렇게 밖에 내가 말할 수 없다. 이끌려 갔구나.
바울과 베드로가 다른데, 베드로 안에 가면 어쩐지 잘 안 된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으면 뭔가가 비친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언제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는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내가 언제 그의 죽으심과 합하였는가?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죽어본 일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다. 사람이 죽은 줄로만 알면 팍 가라 앉는다.
시편에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내가 내일 죽는다는 것만 안다면 오늘 내가 멍청한 짓을 할 일이 없다. 내일 죽는 것만 확실히 안다면 오늘 하루라도 다 지혜롭게 산다.
그런데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른다. 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불가에서는 명상을 하여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 참선을 하는 이유가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라고 했다. 알고 보면 불교는 헬라 사람들이다. 인도 사람들은 명상과 참선을 통해서 지혜를 얻으려고 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라고 말했다. 내가 예수와 함께, 합하여.
로마서 6장을 보면 전부 <함께>, <합하여>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 <함께>, <합하여>를 찾을 수가 없다. 우리와 예수님이 어디를 가서 만나겠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옛날에 삼각산에 가서 잠자고 일어나보니까 사방에서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난리다. 산 전체가 울린다. 요즘은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그랬다.
어떤 교회에서는 금요일마다 철야기도를 하는 교회가 있었다. 또 목사님 가운데는 40일 금식 기도하는 분이 많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까지 하는 분도 있다. 40일을 먹지 않고 지내려면 정말 생명을 걸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
왜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가? 하나님과 친해보려고, 하나님과 가까워져 보려고 그런 것이다. 신앙생활을 해보면 하나님과 가까운지 안 가까운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나 따로 너 따로가 아니라 가까워져야 되는데 어찌 그렇게 멀었다가 가까웠다가 하는지 모른다. 서문시장에 가면 멀어져 버리고, 예배당에 오면 가까워진다. 이것이 불안정하다.
예수를 마음속에 모시라고 한다. 모셔도 서문시장에 가면 서문시장이다. 서문시장 가서도 물건이 많은데 물건은 보지 않고 땅만 보고 다니려고 하면 참 어려운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은 백화점이나 시장을 가면 구경할 것이 너무 많아서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를 모실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는 사람도 내 입장에서는 또 이상하다. 나는 볼 것이 하도 많아서 그렇게 안 되기 때문이다.
의자를 그려놓고 앉혀놓아도 안 되고, 예수를 붙잡으려고 해도 안 된다. 마음속에 넣어놓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붙잡아 놓으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기도를 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이유가 재미도 있지만 그런 것에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가까운가? 이 문제이다.
사람과 하나님은 가까워질 수가 없다. 서로 본질이 다른데 어떻게 가까워지겠는가? 물과 기름을 같이 놔두면 기름은 기름대로 동동 뜬다. 물에 섞여지지 않는다. 도저히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중보를 해 주신다는 것인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중보자라고 생각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자기 아들에게 얘기해서 물이 포도주로 바꿔졌다는 이야기인데, 기도할 때 마리아에게 ‘좀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한다. 성모 마리아님이여,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죄를 용서해주도록 하나님께 중재를 해주십시오. 기도가 그런 기도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지 어머니가 부탁하면 안 될 일이 있겠는가?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얘기하여 어머니가 부탁하면 예수님이 들어주시겠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이것이 누구 집안 얘기도 아니고 그것이 그렇게 되겠는가? 이것도 황당한 이야기 같고, 이유가 있어서 그런 얘기가 나왔을 것이데 우리가 객관적으로 들으면 황당하다.
또 떡을 먹으면 예수님의 몸이 들어온다는 그것도 황당하다. 천주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미사에서 그것을 먹지 않으면 이것은 대죄에 속한다. 큰 죄, 이 큰 죄를 용서받으려면 벌금도 많이 내야 하고, 고해성사를 더 짙게 해야 한다. 그것도 황당하다.
어떻게 하면 예수가 내 안에 있는가?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가 내 안에 있는가? 그분이 내 안에 있기만 하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율법이 필요하겠는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다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이 내 안에 와서 율법이 될 것이니까 예수가 내 생명이 돼버리면 있으면 율법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분이 율법 이상으로 잘 지키고 다 잘할 텐데 말이다.
결국 기독교는 예수와 하나 되기 위한 것, 하나 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 되려는 길에서 빗나가서 안 되니까 다른 길로 가버렸다.
기도를 해서 간다든가 뭐 이렇게 해서 간다든가 그것이 아니고 예수와 합하여서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함께 죽었다. 그러니까 죽은 데 가봐야 예수와 내가 함께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알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님 죽은 데 가봐야 내가 거기 함께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알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가 생각을 해서 알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쳐다봐야 한다. 여러분이 오늘도 자세히 쳐다봐라. 그 안에 내가 함께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를 이것이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전 신구약 성경에서 모든 흐름이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율법을 왜 지키는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려고. 왜 제사를 드리는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려고. 왜 교회를 오는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려고. 왜 기도를 하는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려고. 전부 알고 보면 다 그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수와 함께 어디가 있는지 내가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디가 있는지?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그 예수님을 불러다가 내 가슴에 모셨지만 또 나가버리고 모시면 또 나가버리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밖에는 그를 만날 수가 없다. 만날 데가 없다.
내가 왜 십자가를 자꾸 이야기하는가? 십자가 말고는 만날 데가 없다. 다른 얘기가 아니다. 율법 안에도 예수가 있고, 산상보훈 안에도 예수가 있고 다 있다. 그런데 거기서는 아무리 봐야 내가 그 안에 없다. 없다. 율법을 봐도 나와 너무 멀고, 산상보훈을 봐도 나와 너무 멀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대라.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렇게 되겠는가? 벌줄 때 그런 것이 있다. 둘이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라고 하면 같은 반 친구니까 처음에는 때릴 수가 없으니까 살짝만 건드린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데 점점 어쩐지 내가 때린 것보다 저놈이 때리는 것이 좀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면 약간 힘을 줘서 또 때린다. 하다가 보면 나중에는 서로 인정사정 없이 때린다. 맞고 나면 화가 나기 때문이다.
산상보훈에 가면 다 걸린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다 걸리는 것이다. 안 걸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거라. 그 정도야 가겠지 하지만 십리를 가자고 하는 것을 삼 십리쯤 가자고 하면 좀 문제가 생길 것이고, 조금 더 가자고 하면 더 문제가 생길 것이다.
돈도 조금은 빌려 줄 수 있는데, 빌려줬더니 계속 빌려달라고 해봐라. 그러면 계속 빌려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바꿔서 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일억을 빌려 달라고 하면, 십억을 빌려달라고 하면 아무도 못 빌려준다.
산상보훈이 참 좋은 말씀이지만 나와 너무 멀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과 나와 어떻게 교통이 되겠는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보니 나는 안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고, 그러면 내가 황당해진다. 나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까 걸림돌이 된다. 어떤 사람은 또 나를 보니까 나도 하겠다고 생각된다고 한다.
김*식 형제가 사랑방에 썼는데 나를 보니까 그래도 안심이 됐다고 하더라. 나도 옆에서 보니까 성질도 급하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성질이 급한 것이 제일 문제인데, 내가 성질이 급하니까 좀 안심이 되었나 보다. 그래도 나는 김*식 형제처럼 그렇게 급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망할 것이다. 전에는 보니까 성질이 급해서 나와 비슷하다 싶었더니 이제 보니까 성질이 급하지 않다면 또 절망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절망되지 말라고 일부러 한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가까워지기가 쉬운 것이 아니고 너무 너무 어려운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했는데 점점 알면 알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점점 높아져버리니까 그렇다.
예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예수나 나나 뭐 사람이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럴 때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차차 들어가면 도저히 안 되겠구나. 이 생각이 든다.
율법도 조금 들으면 그것도 못해 하지만 조금 더 해봐라. 더 깊이 더 깊이 더 깊이 하려고 하면 점점 안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다 지킬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갈수록 어려워진다. 뭐든지 다 어려워진다.
그것이 예수 만나는 방법이 틀려서다. 방법이 틀려서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뭐든지 하면 갈수록 쉬워져야 한다. 갈수록 쉬워져야 된다. 그런데 갈수록 어렵다고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십자가에 가서 보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것을 어렵다고 생각하고 안 하려고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왜 李목사님은 좋은 것이 많은데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고 한다. 그 좋은 많은 것이 너무너무 어려워진다. 쉬울 것 같지만 가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처럼, 그 좁은 문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밖에 없다. 길이 그 한 길뿐이다. 외통수이다. 이것이 여기서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되면 100점이고 안 되면 빵점이다. 그것을 피해가면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고 훨씬 어렵다. 휠씬 어렵고 점점 어려워져 간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이 있다. 기독교 고전 가운데 아주 유명한 소설이다. 한 사람이 기독도가 천성에 가는 길을 소설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성경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준 책이다.
지금 서양에서 온 기독교 신앙의 거의 대부분이 그 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런 길을 걷고 있다. 그것이 기독교의 길이다. 많은 여러 가지 고난을 겪어서 천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따라가려면 아마 대구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는 별로 가실 분이 없을 것 같다. 새벽기도도 안 하는 분들이 거기를 가겠는가? 여러분들은 못 간다. 여러분들은 내일 저녁에 아침부터 새벽기도를 나오라고 하면 나오겠는가? 다 못나올 것이다. 천로역정의 신앙을 가지고 천성문에 이르기는 틀렸다. 나도 그것은 못한다.
목회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새벽기도이다. 새벽 네 시에 종치고 해야 한다. 그런데 네 시에 일어나기는 일어나겠는데 다섯 시에 끝나면 또 잠이 온다. 이것이 미치겠다. 그러면 또 잠을 자면 또 어떤 부흥사들은 새벽 기도 하고 나서 잠을 잔다고 마구 때리고 잔소리를 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혹시 이*식 형제 같으면 잘할지도 모르겠다. 잘해서 우등생이었는데 나는 열등생이었다. 나는 몸도 약하지 참 어렵다.
우리 교회는 어려운 것은 못하는 분들만 왔다. 어려운 것을 잘하는 분들은 다 저 유명한 교회로 가버렸다. 우리는 우리 체질대로 살아야 안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욕할 것도 아니고 힘 있는 분들은 가서 하고 힘 없는 사람은 내 말을 들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힘이 있는 사람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된다. 힘이 있는 사람은 해 봐야 된다. 힘이 없는 사람은 내 말을 들으면 된다.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없는 사람은 내 방식대로 하면 다 된다. 힘이 없는 사람은 다 된다. 그러면 복음이다. 조금 복음이 될 것이다.
내가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세계에서 천재가 아니고 거기서는 아주 말종이니까 밀리고 밀렸다. 내가 거기서 우등생 같으면 왜 밀렸겠는가? 내가 거기서 우등생이 못되어서 밀린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모르겠지만 내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나를 받아주었다. 밀릴 때마다 받아주는 것이다. 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다. 여러분도 밀려도 걱정하지 말라.
밀려도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밀린 자를 받아주는 하나님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꼴찌한 사람을 일등 해 주는 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무데도 없다. 내 하나님만 그런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는 그렇게 부른다. 처음에는 우리 하나님 그랬는데 마지막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한다.
하나님도 각자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 좋은 하나님을 만나야지 좀 어려운 하나님을 만나면 곤란하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적절하게 눈높이에 맞춰서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하나님이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하시고, 저런 하나님에게는 저렇게 대하시는 것 같다.
여러분들도 자녀를 키워보면 알 것이다. 어떤 자녀는 이렇게 대하고, 어떤 자녀는 저렇게 대한다. 똑같이 대하는 부모는 안 된다. 약한 놈은 약하게 대하고 강한 놈은 강하게 대해야 한다.
부하를 걸어주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놈이 있다. 뒤에서 때리면서 부하를 걸어주면 잘하는 놈이 있는데, 조금 부하를 걸어주면 완전히 꼬꾸라지는 놈이 있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을 모르고 선생님처럼 해버리면 한 놈은 되지만 한 놈은 죽어버린다.
부모는 마땅히 자녀들의 능력을 봐서 그 능력만큼 그 눈높이에 맞춰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해야 한다. 일률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밀어버리면 애가 죽어버린다. 운동 좋아하는 놈을 공부만 시킨다고 하면 그래도 안 된다. 공부만 좋아하는 놈을 운동만 시킨다고 해도 안 된다. 그 눈높이에 맞춰서 해야 한다.
하나님도 그런 것 같다. 내 하나님 너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나를 볼 때는 이렇게 보시고, 저 사람을 볼 때는 저렇게 보시는 것 같다. 생긴 대로 다 봐주시는 하나님이다. 자기 생긴 대로 봐주신다. 내 생긴 대로 봐주시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나는 바울의 <함께>라는 이 말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은데 못 찾았다. 함께라는 것이 좋기는 좋은데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라는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속으로 헤맸다.
이제 보니까 십자가에 가면 딱 <함께>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가면 함께 가 있다. 내가 그 안에 다 있다. 함께! 내가 그를 찾아도 안됐고 모셔도 안됐고 끌어 땡겨도 안됐고 다 해도 안됐는데, 십자가에 가보니까 내가 그 안에 있다. 그분을 내가 모신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뛰어내리지 못한 그 사람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있다.
이것은 알고 보면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본질 속에 내 본질이 들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실이다. 그러면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는 나는 진실이다. 그 안에 있는 나는 진실하다. 그 밖에 있는 내가 진실하지 못했지 그 안에 있는 나는 진실하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다 소용없어진다. 아~ 이게 나구나. 이 사람이 예수구나. 그런데 내가 거기 있구나. 거기 있는 사람이 나구나.
거기에 있는 나를 버리고 나는 다른 나를 찾아 다닌 것이다. 아담은 거기 있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자기를 찾아간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마찬가지이다.
그 예수 안에 있는 그 자기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찾아 다녔는가? 베세다 광야로, 갈릴리 혼인집으로, 이런 집으로 찾아 다닌 것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그분 속에 있는 자기는 버리고 다른 자기를 찾아보려고. 그런데 다른 자기를 찾으면 찾을수록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없다. 자기가 없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그 안에 있는 자기가 싫어서 그랬다. 그때도 십자가에 매 달려서 뛰어내리지 못한 사람을 봤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보지만 아담은 그때 다 봤단 말이다. 보니까 자기 모습이 그런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탈피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와서 기껏 와 보니까 도로 그 자리다. 우리는 갈 데가 없다. 다른 데가 없다. 다른 데가 있을 것 같다. 있을 것 같지만 없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같이 되기는 뭐가 됐는가? 가시덤불밖에는 뭐가 있는가? 땅은 저주를 할 것이고 네 앞에는 가시덤불이 있을 것이다. 너는 살다가 먹다가 죽을 것이다. 창세기 3장에 그랬다. 너는 살다가 먹다가 죽을 것이다. 다른 말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고 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어떤 인생 가운데서 이런 인생이 아니라면 여기로 나와 보라.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다. 여러분 가운데 없는 것이 참 다행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오늘 여기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없는 게 참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진짜로 없는가? 확실하게 말하라. 있다면 나는 내려가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는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간단한 진리를 놓아두고 얼마나 구천을 헤맸는지 모른다. 모든 인간이 구천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율법을 잡고 돌아다니고, 산상보훈을 잡고 돌아다니고, 이적을 잡고 돌아다니고... 이것이 구천이다. 하늘이 하도 넓어서 구천이라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 무엇을 얻어 보려고, 뭐가 되어 보려고... 우리 교회에서도 무엇이 되어 보려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이 든다. 되어 보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될 것이 없다. 그냥 있는 것이다.
되기는 뭐가 되는가? 사람이 뭐가 되겠는가? 사람이 된다. 사람이 뭐가 되는가? 아니 노력하면 사람이 천사가 되는가? 믿음이 좋으면 천사가 되는가? 기도를 잘 하면 천사가 되는가? 사람이 해 보면 도로 사람이다. 아무리 해 봐도 도로 사람이다.
흙은 바로 흙이다. 농부에 따라서 옥수수 밭이 되기도 하고 고구마 밭이 되기도 하고 이럴 뿐이다. 흙은 도로 흙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기를 너무나도 잘 만들어 놓았다. 참 잘 만들어 놓았다.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잘 만들어 놓았다. 항상 도로 흙이다. 이것은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다. 도로 흙이니까 또 가능성이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데 가능성이다. 희망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성이다. 농부만 새로 만나면 된다.
여기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옛 생명과 새 생명’, 이런 말이 나오는 데, 옛 사람은 누군가? 옛 생명을 가진 사람이 옛 사람이다.
옛 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옛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을 옛 생명이라고 한다. 그 옛 생명을 가진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한다.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옛 생명을 가지서 옛 사람이 된 그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제 그것은 없다. 그 말은 하나님 장부에서 제해 버렸다는 말이다. 딱 제해 버렸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제해 버렸다. 명부에 없다. 천당에 가 봐도 그 사람의 이름은 없다. 제해 버렸기 때문에 없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데 어디에 가서 찾겠는가? 죽어버렸다.
그런데 새 사람은 누군가? 생명나무를 먹은 사람이다. 생명나무 열매가 새 생명으로 온 것이다. 새 생명을 먹은 사람이 새 사람이다. 이 생명나무 열매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먹을 열매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다.
그러니까 그분을 먹으면 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분과 내가 하나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새 사람이다. 새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성질이 좋아졌다는 이런 말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을 먹었기 때문에 새 사람이다. 아담이 먹은 그것을 먹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먹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먹었다면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된다. 거기서 내가 발견된다. 그분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분을 먹은 것이다. 먹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밥을 먹으면 내 안에 들어와서 하나가 된다.
예수를 어떻게 먹는가? 예수를 먹을 방법이 없다. 쪼개 먹는가? 방법이 없다. 나와 하나인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딱 보니까 나와 하나다. 여러분과 하나다. 하나인 그 사람을 참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나구나. 아무리 지랄발광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구나.’ 이렇게 알아야 한다. ‘그 사람만 나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다. 4절에 보면 그런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우리가 예수를 만났으면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그것만이 자기라고 알면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를 표현할 것이다. 사람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꺼내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누군지 모르니까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데 내 놓는 것이다. 내가 누군 지 알면 진짜 자기로 알면 그것을 표현하라고 있다.
여러분이 만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 내리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든지 그 생명을 살려내려고 할 것이다. 나도 지금 그것이다. 그 사람을 살려 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선전해서 내가 인정받을까? 쉽게 말하면 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인정이 되어야 나도 인정받는다. 이 사람이 인정되지 않으면 나는 죽었다.
이분은 갈 데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이분을 선전해야 한다. 이분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선전해야 한다. 나의 진실은 이것이라고 선전해야 한다. 자기를 감춰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겠는가? 산 위에 있는 동네를 숨기겠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자기로 알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 자기 말을 하고 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보면, 성경 말씀을 하고 있는 줄 아는가? 아니다. 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 그렇다. 다 자기 이야기다. 자기를 지금 말하는 데 성경을 통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교역자 모임에서 내가 그랬다. 설교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인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설을 통해서 자기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시를 통해서 말한다. 어떤 사람은 돈키호테를 통해서 자기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햄릿을 통해서 자기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내내 돈키호테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햄릿만 이야기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내어놓으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감추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내어 놓으려고 한다.
만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내 자신이 발견된다면 나는 그것을 선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선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그 일이 아니면 여기에 올 일이 없다. 내가 안 와도 된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려 주셨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다 무시한 것인데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보잘것없이 생각해서 아담부터 다 버렸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이것보다 진실한 것이 없다. 나는 천당에 못 가도 좋다. 이 진실한 사람을 소개 하고 싶고, 이 진실한 사람을 말해 내면 한이 없다.
옛날에는 모두 내가 아닌 것만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아닌 것만 이야기를 하니까 피곤하였다. 내가 아닌 것만 이야기를 하니까 재미가 없다. 내가 아닌 것만 이야기를 하니까 말도 못 한다. 그런데 나 자신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나를 보고 누가 길게 한다고 하는 데 이게 길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여러분들에게 안 하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래도 여러분들이 박수 쳐주고 받아주니까 하지 내가 나가서 그 사람을 이야기하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무도 안 알아준다.
우리 OO씨가 이것을 알았더라면 평안하게 있을 것인데, 좀 불쌍하다. 비참하다. 변명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뭐라고 하고 있는가? 한다고 누가 들어주겠는가? 아무도 안 들어준다. 그러니까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모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재판해라. 너희가 알아서 감옥에 보내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해라. 이렇게 하면 편하지 않은가? 구구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미 다 결정이 된 것이다.
내가 영원히 자랑해도 될, 영원히 내어놓아도 될, 내 자신을 우리가 내놓아야 될 것이 아닌가? 나는 부끄러운 사람일지 모르지만 십자가 안에 있는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부끄러운 나를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부끄럽지 않고 영광스러운 진실한 나를 이야기 해야지 시시한 나를 왜 이야기하는가? 예수와 함께 죽어버린 나를 왜 이야기하는가?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길이다. 이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알면 뭐하냐?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이 그냥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발견했으니까 그 생명으로 살아야 된다. 그러면 다른 생명으로 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돈키호테를 말할 필요도 없고 햄릿을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이 사람이 아니다. 이적을 행한다, 아니다 할 필요도 없다. 행했거나 말았거나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행했거나 말았거나 상관이 없다. 율법을 잘 지켰거나 못 지켰거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냥 그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했다. 나에게 배운 말 그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였다.
증인,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이것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그것을 증거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한다. 우리가 어디 가서 그런 광경을 봤다고 하면 그것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우리 주님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다고 이야기한다.
옛날에 우리는 그렇게 자랑하였다. 예수를 자랑할 때, 네가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이냐고 하면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듭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분이시다.’ 라고 자랑하였다. ‘산상보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우리는 자랑하였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한다. 좋은 것을 하라고 하면 다 한다. 굳이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겠는가?
여러분들이 혹시 나를 증거 하더라도 그럴 것이 아닌가? 너는 왜 이 목사를 따라 다니느냐고 물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목사는 뭘 잘 한다고 한다. 잘 하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꽤 쓸만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을 자랑해 봤자 소용이 없다. 주의 손에 이끌린 사람, 어쩔 수 없이 이끌린 사람, 그 사람으로 나를 알고 나의 증인이 되어 주면 너무너무 감사하겠다.
나도 재주는 좀 있다. 그런 것 자랑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나도 참을성이 있다. 성질을 낼 때도 있지만 잘 참는다. 그런 것을 이야기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격도 나는 온유한 사람이다. 그렇게 까칠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 목사님은 성격이 이렇다고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말 하려면 상당히 옹색할 것이다. 상당히 옹색하다. 그러니까 확실히 알아야 된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알아서는 안 되고 자기가 체험을 해 봐야 된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말하게 된다.
그것은 또 자기니까. 객관적으로 내가 아닌 사람을 증거 하면서 뺨을 맞고 다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니까 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 사람이니까 하는 것이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것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한 것이다. 남을 위해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죽을 수가 없다. 남을 위해서 욕만 얻어먹어도 얼마나 억울한데 그러니 하겠는가? 자기니까 한다.
그 예수가 나일 때,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 못한 예수가 나라면 누가 우리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와 친하다거나 가깝다거나 하면 네까짓 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못 뛰어내리는 사람을 말하는데 누가 나보고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너 같은 게 그렇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를 터치 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너무 중요하다.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다 거짓말이고 다 꾸며 만든 것이고 아담에게서 배운 것이고 전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허황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아무 것도 진실한 것이 없다. 나는 양심을 버리면 껍데기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도 껍데기다. 다 소용이 없다.
참 사람이 생겼다. 참 사람이신 예수, 그 사람이 하나님께 필요하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 일을 맡기기 원하는 것이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산 혼은 그 사람이다. 흙으로 만든 사람, 그 사람이다. 아브라함 100세 그 사람이다. 야곱의 130세 그 사람이다. 모세의 80세 그 사람이다. 모두 한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업적만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한 줄로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은 업적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다 한 사람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 한 사람의 몸이 되도록, 이 사람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퍼질 때 마다 그 몸이 퍼지도록 그렇게 되길 바란다. 여러분이 그 일에 증인이 되길 바란다. 다른 증거 해 놓으면 결국 세상이 되어 버린다.
유럽의 교회가 다 문을 닫게 되었다. 다른 예수를 전해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예수가 필요 없는 것이다. 세상이 발전해 버렸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럽에 가 보니까 성당과 예배당 건축물이 굉장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던 시기인가? 고려 때나 되는가 하는데 어떻게 그런 건물을 지어 놓았는가?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보다 얼마나 앞섰는지 그런데 그것이 지금 문을 닫고 있다.
성당에 들어가 보니까 촛불에 그을려서 시커멓고 사람은 없고 이렇다. 영국도 성공회 교회지만 교회에 사람이 없으니까 캬바레가 되었다고 한다. 뉴스에 나왔다.
예수가 아닌 것을 전해 놓으면 언젠가는 다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참 예수만 전해야 된다. 그래야 참 사람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그 참 사람이 일어나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저 오겠는가? 하나님 나라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그 참 사람으로 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이 말이 우리들 속에 있다는 말도 되고 예수님 속에 있다는 말도 된다.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말이니까. 쭉 둘러서서 예수를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있는가? 예수가 서 있다. 그 사람의 나라 그게 하나님 나라다.
여기는 말을 하려면 끝이 없다. 너무너무 다른 세계다. 우리 자매들 중 하나가 교회를 온 후부터는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했다. 너무 신기하다. 다닐 때 보면 늘 생글생글 웃고만 다니는데 명랑하고 성격이 참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랬는데 어느 모임에서 간증할 때 들으니까 자기는 우리 교회를 온 후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과 자기 남편이 서로 싸우는데 옛날 같으면 화가 날 텐데 그것이 아니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웃으면서 여보, 당신이 그만 하라고 한다고 했다. 화가 난 것이 아니고 웃으면서 말이다. 대단해졌다. 저 자매가 저렇게까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없다. 알고 보면, 한 가지만 알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이 한 가지를 모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해 본다. 어디를 가 봐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 봐도 이것이 없으면 다 허당이다. 이 사람이 없으면 다 허당이다. 너무 오래 해서 안 되겠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딱 와야 할 길로, 딱 보여 주실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를 택해 놓으셨는지 주의 은혜를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했는지, 주여 그 은혜를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보게 해주셨는지, 어떻게 하나 되게 하셨는지, 어떻게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하셨는지,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형제들이 이 결정점에서 한 사람도 낙오된 사람이 없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이 결정점에 계신 예수를 다 보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뛰어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 안에 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 되어서 주님 당신이 보지 못한 빛을, 당신이 보지 못한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보게 되기를 원하고 보여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일생 전체가 주님의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