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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길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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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유일한 길
오늘은 <사람으로 사는 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기본적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필요는 교회에서 할 말이 아니고,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이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생략하겠다.
인생은 그것만이 아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인생의 문제이다. 물론 배고프면 우선 먹어야 된다. 하지만 지금 배고픈 사람은 여기에 오지 않았으니까 해당이 안 된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직업을 선택할 때도 역시 그렇고 인생을 경영할 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천차만별이다. 역시 땅을 사냐, 집을 사냐, 어떤 직장을 가지느냐는 여기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로 순수하게 인생 문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직업도 잘 선택해야 된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가능하지, 좋은 목표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 자신이 중심이 된다. 건축을 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이다. 아무리 훌륭한 설계를 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재료가 없으면 만들 수가 없다. 100층 건물을 설계했는데 나무로 짓겠는가? 못 한다. 꼭 쇠가 있어야 된다. 우리는 철근을 쓰는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작해야 2층을 이었다. 경복궁 같은 것이 고작해야 2층이다.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쇠를 사용했기 때문에 100층짜리 건물을 벌써 2백년 전에 지었다고 한다.
문제는 재료이다. 재료가 그런 재료이기 때문에 그런 건물을 지었다. 설계도 있지만 아무리 설계를 해도 재료가 없으면 만들 수가 도저히 없다. 건축에는 재료가 중심이 된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재료가 중심이다. 그 재료는 나 자신이다. 인간 자신이다. 초창기에 우리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초창기 헌법은 미국 헌법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시행이 안 된다. 민주주의적인 경험이 없고 그런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 법은 있었지만 시행이 안 되었다. 민주주의는 그 민도(民度)에 따른다는 말이 있다. 민도(民度)에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
인생을 경영함에도 마찬가지로 사람 자신이 중심이다.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이런 인생도 되고 저런 인생도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종교마다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유교는 보면 개인의 덕성이나 사회적인 윤리가 있어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유교의 모든 가르침은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여러 가지가 많지만 내용은 전부 다 인륜에 관계된 문제이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법도가 중심이 되어 있다. 학문이 다른 것이 아니고 옛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법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도 되고 성인도 된다. 그것은 발상 자체가 다 자신의 안녕과 안정,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내가 고고해지기 위해서, 내가 훌륭해지기 위해서, 또 나아가면 사회적인 안녕을 위해서라는 생각이다. 유학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착하고 점잖고 군자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공부를 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해도 갈라져버린다. 선생님은 똑같은데 둘이 전혀 다른 길로 간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와 이조 개국 공신인 정도전은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 동문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학문이라는 것은 가다 보면 다 갈라져버린다. 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워도 다른 데로 갈라져버린다. 자연과학은 다르지만 인문학에서는 그렇게 달라진다.
유교를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조선왕조를 이끌어왔는데, 그렇게 시끄럽고 맨날 싸움이었다. 학문은 같이 배웠는데도, 똑같이 공자님 사상을 배웠는데도 나와서 살 때는 다르게 살아버린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가 바꿔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재료가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양을 요구한다. 그런데 수양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갈라진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맞으면 너는 틀렸다가 되어버린다. 가장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틀린 사람이 많다. 내가 더 옳은 것을 찾아갈수록 틀린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져버린다. 그럭저럭 사는 사람은 별로 구별이 없으니까 술인지 물인지 모르고 먹지만 아주 술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이나 포도주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은 조그만 틀려도 아니라고 한다.
세상의 학문이라는 것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세밀해지고 예민해지고 깊어지기 때문에 그럴수록 점점 더 분열된다. 결국 유교는 배우고 익힌다, 수양을 계속한다는 점에서 아주 교육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가 그렇게 되지를 못했다.
불교는 한술 더 뜨서 인생은 지혜를 얻자고 했다. 인생의 문제는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니까 어리석은 것을 벗어버리고 진짜 진리를 깨닫자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불심이라고 한다. 부처님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결국 수양이다. 불교 TV를 들어보니까 계속 수양이다. 자기들은 수양이라고 하지 않고 공부라고 하는데,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크게 깨달은 사람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한다. 스님 중에서도 깨달음에 따라서 큰 스님, 작은 스님이라고 하는 이유가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은 큰 스님이고, 덜 깨달은 사람은 작은 스님이다. 깨달으면 다 하나가 되는가? 안 된다. 거기도 역시 차별이 생기고 내 깨달음과 너 깨달음이 다르다.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달라져버린다. 깊이 깨달을수록 더 외로워진다. 왜? 같은 사람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이것도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따르고 있다.
예수는 수양이나 공부나 그런 것을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고, 나를 원 위치로 회복시켜 준다.
옛날에는 그런 것까지 몰랐다. 좋은 점도 많으니까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신학교에서는 비교종교학을 배운다. 여러 종교를 비교해서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공부한다. 그것을 들으면 내가 훌륭한 종교를 믿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종교를 모르기 때문이지 다른 종교를 깊이 알면 그것도 안 된다. 종교 대 종교로서는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동국대 철학과 교수 강의를 TV 방송을 통해서 1년 이상 들었다. 얻어진 결론은 이 사람은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는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기독교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융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역사가 그랬다. 그런데 불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고,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깨달음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을 구조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하향식이다. 위에 절대적인 주권자가 있고, 절대적인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우리 안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하향식이다. 그런데 불교는 그것이 아니고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상향식이다. 깨달아 올라가는 길이다.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어디와 맞는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 가장 발달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딱 맞는 길이다. 왜냐하면 이 자본주의 사회는 하향식이 아니고, 상향식이다. 과학이 그렇다. 어떤 절대적인 것을 목표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연구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해가는 것이다. 또 이것이 민주주의다. 숫자 많은 것이 이기는 다수결의 원칙은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것이니까 여러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민주주의다. 촛불이 많아서 촛불이 태극기를 이겼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많은 쪽이 이긴 것이다. 많은 쪽이 이기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예를 들어 촛불은 200만인데 태극기는 100만이라면 촛불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많냐는 것이다.
중세시대는 하향식 시대였다면 지금은 상향식 시대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세게는 불교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듯했다. 너무너무 강의를 잘한다. 기독교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불교를 잘 모르고 무조건 배척을 하는데, 이 사람은 기독교를 훤히 알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나가게 되면 불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겠구나.
기독교가 중세 천년 이상을 지배하면서 하향식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절대 군주가 필요했다. 절대 독재자가 필요했다. 지금은 절대 군주나 절대 지배자는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없애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수결에 따라서 선택한 사람을 앞에 내세워야 한다. 그렇게 보면 불교에서 하는 말이 옳은 말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유일하신 것처럼 군주가 유일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지만 다 실패했다. 독재자, 전제 군주는 다 실패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이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교황 중심이다. 그 외는 어디도 안 된다. 교회도 장로들이 투표를 해서 데리고 온다. 목사가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있어서 교인들이 투표를 해서 목사를 청빙을 한다. 투표해서 떨어지면 나가야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사람이라는 재료가 그렇게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전제 군주를 세워놓으면 폭군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을 대신 하다 보니까 폭군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교황도 폭군이 되어서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람은 절대 주권을 주어버리면 폭군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처럼 하려고 하면 폭군이 되어버린다.
하나님 같은 전제 군주는 없다. 사람이 임금이 되면, 절대 군주가 되면 짐승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절대 군주들을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큰 신상은 전부 짐승으로 표시했다. 요한계시록에는 666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13:18).” 사람 짐승이라는 말이다. 전부 다 군주를 가리켜서 말한다. 사람 짐승, 권력이 있으면 사람은 사람인데 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절대 권력을 절대로 싫어하는 것이 미국이다.
오늘 교회도 이런 물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인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꼭 그것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한다. 그럴 듯한 말이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근원을 살펴 보면 민주주의에서 나왔다. ‘꼭 그것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진리이냐? 그것은 알아봐야 한다고 한다. 김 빠지게 하는 이야기이다. 전도하러 갔다가 그 말을 들으면 김이 싹 빠진다. ‘꼭 그것만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것도 옳은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여, 옳은 것을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없지만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절대적인 것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을 따르면 내가 예속이 되기 때문에 내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절대자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종이 되어버리고 만다. 주님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이다. 요즘은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지만 옛날에는 주인이 생살권을 다 가지고 있었다. 종은 물건이나 마찬가지로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시대에 주님이라고 했다. 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이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우리가 지금 아주 극단적인 다른 질서 속에 살고 있다. 두 질서가 가고 있는데, 다른 질서 속의 갈등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곳에 가면 절대적인 데가 있고, 어떤 곳에 가면 상대적이다. 이것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고 갈등에 빠져있다.
아버지한테까지는 반항을 했는데, 사장한테 반항을 하다가는 짤린다. 이것이 갈등이다. 아무리 민주주의라고 해도 사장에게 대들면 나가야 된다. 거기에 가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 지금 민주주의를 하려고 애를 쓴다. 데모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다. 지금 이런 갈등에 빠져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재료가 되다 보니까 이 재료가 그런 이상 민주주의를 하나 전제주의를 하나 결과가 똑같다. 사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지고 제도를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영원히 해결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영원히 있을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여러 분이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니까 두고 보라. 절대로 해결이 안 된다. 왜냐하면 재료가 그렇게 때문에 해결이 안 된다. 제도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재료가 그렇기 때문에 안 된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왔는가?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냈다는 말이다. 멸망이라는 말이 불구덩이라는 말이 아니다. 멸망이라는 말은 건축에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정해진 건축이 있는데, 그 건축물에 쓰이고 남은 것은 다 쓰레기이다. 이 집을 짓고도 이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다 쓰레기다. 멸망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안에는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잔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옆집은 잘 되는데, 나는 안 되고 망하는 것이 멸망이다. 멸망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 멸망이 아니고,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 멸망이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반대로 영생은 어떤 것인가? 완전하게 쓰인다는 말이다. 영생이 오래오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완전하게 쓰여진다는 말이다.
구원이라고 하면 천당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구원의 궁극적인 실재는 영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영원히 죽지 않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고 다 수한이 정해지게 만들었다. 죽고 안 죽는 것은 이 영생과 관계가 없다. 이 영생은 완전한 것인데, 이 완전하다는 말은 용도 대로 딱 쓰여지는 것을 보고 완전하다고 한다. 마이크는 마이크의 용도가 있어서 만들어졌다. 마이크의 용도 대로 딱 사용되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으로 말하면 영생하는 것이다. 꼭 그대로 쓰여졌으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고 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신하게, 표현하게 하려 했다는 말이다. 사람이 거기에 쓰여지지 못하면 멸망이라는 뜻이다. 참 좋은 것이라도 적당한 데에 쓰여지면 참 좋을 것인데, 적당치 못한 데에 쓰여지면 참 비참한 것이 많다. 똑 같은 박인데 박을 타서 한쪽은 물바가지로 쓰고, 한쪽은 똥바가지로 쓰인다면 똥바가지로 쓰여지는 것이 멸망이다. 물바가지로 쓰여지면 영생이다.
영생이라는 것이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고, 온전하다는 뜻이다. 구원은 우리가 온전하게 가는 것이 구원이다. 천당이 가나 안 가나 온전치 못한 것은 똑같다. 천당에 가도 멸망은 멸망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왔는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했다. 이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문제가 아니다. 환원 시키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만든 원래 대로 환원시키는 문제이다.
인간은 왜 환원해야 되는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기를, 공자님도 그렇고 석가모니도 그렇고 모든 종교 지도자들도 다 인간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잘못 되었으니까 가르쳐야 한다. 잘된 사람을 무엇하러 가르치겠는가? 가르쳐야 된다는 말도 잘못되었다는 뜻이고, 깨우침을 받아야 된다는 말도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어디에 잘못 빠졌다는 말이니까 깨우쳐야 된다. 증권을 하다가 망한 사람에게 노름 판에서 돈을 딸 줄 알았느냐, 그것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노름판에 가서 돈 딸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이 어리석은 놈들아.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실상을 알아서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결국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것을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유사이래(有史以來)로 계속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자기 위치를 이탈했다. 그 자리에 쓰일 것이 다른 데로 가버렸다는 말이다. 총이 군대에서 전쟁할 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총이 다른 데로 가버리면 살인무기가 된다. 총 잘못이 아니다. 위치가 바꾸어진 것이다. 용도가 달라졌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용도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그 용도가 달라지고 보니까 안 맞는다. 안 맞으니까 공부를 해야 되고, 수양을 해야 된다. 기계를 써야 할 곳에 써야 딱 맞을 것인데, 다른 데 쓰다 보니 계속 고장이 난다. 계속 고쳐야 된다. 휘발유를 사용해야 할 엔진에 디젤을 사용했다면 제대로 연소가 되지 않으니까 계속 고장이 난다. 그러면 맨날 고치러 가야 된다.
우리 인생은 정해진 것이 있는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각종 문제가 생겨난다. 이 문제만 해결하려고 생각했다.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로 맨날 회개하라고 하는데, 무엇을 회개하는지 모른다. 맨날 회개하라고 하니까 자기 나름대로 회개를 한다. 자기 나름대로 회개를 하지만 아무리 해도 회개가 끝나지 않는다. 자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만 늘 고치고 있으니까 근원은 고쳐지지 않는다. 속은 고쳐지지 않는데, 겉만 고치려고 하니까 고쳐지겠는가? 안 된다. 감기가 왔다고 해열제만 먹으면 감기가 다 나가겠는가? 곪아 있는데 해열제만 먹는다고 되겠는가? 곪은 데 진통제를 먹으면 더 곪아버린다. 맹장염이 걸렸는데 진통제를 먹으면 터져서 복막염이 되고 만다. 고름이 살 되느냐는 말이 있다. 고름은 어차피 고름이니까 짜서 없애야 된다는 말이다.
위치가 이탈된 인간을 놔두고, 수양을 해라, 공부를 해라, 백날 해도 안 된다. 왜 그랬는지를 모른다. 위치가 어째서 이탈되었는가? 하나님이 쓰려고 만들어놓았는데 다른 데 쓰여졌기 때문에 위치가 이탈된 것이다. 위치가 이탈되니까 맨날 고장이다. 잘못된 주인에게 걸렸으니까 맨날 고장이다.
기계라는 것이 참 이상하다. 서투른 사람에게 맡겨지면 맨날 고장이다. 멀쩡한 기계가 고장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보았다. 옛날에 우리 앞집에 보리타작을 하는 발동기가 있었다. 옛날에는 전문기술자가 아니고 옆에서 슬쩍 보고 하는 것이다. 한번은 우스운 일이 생겼다. 보링이라는 것이 있다. 피스톤이 왔다갔다하면 닳아지면 압력이 줄어진다. 압축폭발이 엔진의 중요 요소인데 헐거워지면 압축이 제대로 안 되면 거기에 링을 끼워야 된다. 원래 링이 있는데 링이 닳아진 것이다. 그래서 링을 읍내에 가서 다시 깎아왔다. 링을 꽂아야 되는데 넣으니까 안 들어가는 것이다. 장정들이 한 나절을 들어가라고 큰 매로 쳤다. 매로 치면서 기계의 힘이 대단하다며 한 나절을 쳤다. 한 나절을 치고 나니까 펑 하고 소리가 났는데, 피스톤이 터진 것이 아니고 바깥 쇠 주물이 갈라져버렸다. 기계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인간도 쓸 곳에 쓰지 않고, 다른 곳에 쓰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욕되게 된다. 멀쩡한 주물로 된 엔진 원통이 펑 하고 깨져버렸다. 그러면 하나님이 욕 먹는 것이다. 인간이 저 모양이구나. 잘못된 곳에 쓰여지니까 그런 결과가 온다.
또 여름이 돌아오니까 보리타작을 하는데 우리 뒷집에서 타작을 하다가 발동기가 고장이 나서 못하게 되었다. 요즘은 엔진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엔진이 좋지 않았다. 무당을 데려다가 몇 날 며칠을 굿을 한다. 보리타작할 때 여름 한 철 벌어먹는 것인데 한 동네에 기계가 하나만 있으면 괜찮은데, 두 대니까 잠을 자지 않고 경쟁을 한다. 밤을 새워 경쟁을 한다. 한쪽은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기계가 안 돌아가니까 얼마나 마음이 조급하겠는가. 하도 하도 안 되니까 무당을 데려다가 돼지머리 놓고 굿을 한다. 몇 날 며칠을 굿을 한다. 굿을 한다고 기계가 돌아가겠는가? 기계만 욕 먹이는 것이다. 이 놈의 기계는 굿을 해도 안 되네, 이렇게 된다. 기계가 무슨 죄가 있는가? 아무 죄가 없다.
용도가 잘못 쓰여지면 만든 사람을 욕 보이게 한다. 사람이 자기 용도에 쓰이지 않으면 사람을 지으신 이를 욕되게 만든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일컫지) 말라(출20:7, 신5:11).” 하나님을 욕 되게 한다는 뜻이다. 입으로 하지 않는 것은 쉬운데, 우리 삶으로 하지 않아야 된다.
위치가 이탈되면 어쩔 수가 없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만물이 다 참된데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라고 한다. 이 부패했다는 말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말이 아니다. 용도에서 이탈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 이탈된 것에서 회복되어야 된다. 이탈을 고쳐야 된다. 다른 것을 고치려고 생각하지 말고 이탈된 것을 고쳐야 된다.
기독교에서 죄라고 말한다. 이 죄라는 말은 ‘이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도덕만 생각한다. 죄라는 말의 근본 뜻은 이탈되었다, 빗나갔다는 뜻이다. 화살을 쏘았는데 딱 맞지 않고 다른 데로 빗나갔다는 말이다.
이 빗나간 사람을 보고 한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빗나간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이다. 그 빗나간 사람들이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제 위치로 돌아와야 된다. 착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초월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위치가 맞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적이 있는데, 적 가운데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에게 위험이 된다. 우리 편에 있으면 좋지만 남의 편에 있으면 내가 죽는다. 내가 생각하기를 지금 북한에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계에서 뭐라고 해도 자기들 할 일을 다 해놓았다. 김일성 때부터 유언했던 그 유언, 핵을 개발해야 산다, 핵을 가져야 산다는 이것을 시행했다. 6자회담을 하니 남북회담을 하니 금방 통일이 될 것처럼 생각했는데, 그것은 위장전술이고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고, 내용은 핵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제 어지간히 다 해놓았다. 미사일도 개발했고 핵도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 얼굴을 내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에 나와서 쇼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갈공명이 있는 것 같다. 어찌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폭탄을 터뜨릴 수도 없고, 김정은을 잡아올 수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선제 공격을 못하게 되어있는 나라이다. 옛날 소련 같으면 한다. 스탈린 같으면 진즉 가만 두지 않는다. 동유럽권 나라들을 전부 소비에트 연방으로 흡수했다. 복종하지 않는 나라들은 탱크로 밀어버렸다. 데모 하면 봐주거나 물 뿌리는 것이 아니라 탱크로 밀어버렸다. 다시는 데모를 못한다. 헝가리 같은 곳도 그렇게 해버렸다.
북한의 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면 스탈린 같으면 아예 싹도 못 난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알고 계속 작업을 한 것이다. 너희가 선제 공격을 못할 것이다. 트럼프가 엄포를 놓으니까 미국의회에서 겁이 나서 벌써 트럼프를 제지하려고 한다. 수가 낮다. 민주국가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트럼프는 상술이 아주 발달한 사람으로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을 사람이다. 저렇게 엄포를 놓을수록 우리는 안전하다. 저렇게 엄포를 놓은 상태에서는 자기들이 선제 공격을 못한다. 미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약해 보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대부분 전쟁은 한쪽이 약해 보일 때 일어났다. 한쪽이 강성하게 막고 있으면 절대로 전쟁은 못한다. 트럼프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 생전에는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장사꾼이므로 손해 볼 일 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이 볼 때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지 위험하지 않다. 나는 오히려 요즘 안심이 된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니까 편안하게 잠을 잔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트럼프까지 나왔다. 이탈된 것을 이야기하다가 왜 트럼프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다. 몰라야 되는데 아는 것이 병이다.
사람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 이런 문제가 문제가 아니다. 위치가 이탈되었으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성경은 누구는 착한 사람이고 누구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다. 그 모든 사람 속에는 예외가 없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가? 모든 사람이 다 자리를 이탈했다. 아담 안에서 다 이탈했다. 이 이탈을 바로 잡아야 된다. 이 길은 유일한 길이다. 공자님에게도 없고, 석가모니에게도 없다.
원 위치로 돌아가려면 원형, 원본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거기로 돌아간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하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기만 돌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조심하고 회개하느라고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과 상관 없는 일이다. 좋은 일이라는 말이 아니고, 사회에서는 없어져야 되는 문제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관계에서 그것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위치가 이탈된 그것이 먼저 문제이다. 이것이 선결되어야 될 문제이다. 아직 성질이 있을 수도 있고 꼬라지가 나쁠 수가 있다. 사람마다 그렇다. 그것을 다 정리하고 바르게 되려고 하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일단 위치를 바꾸어놓아야 된다. 위치가 바르게 되어야 그런 것도 없어지는 것이지, 꼬라지 다 없애고 언제 환원하겠는가? 불가능하다. 개인적으로도 하기 어려운데, 전 인류가 다 그렇게 되겠는가? 어떤 사람이 수양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전 인류가 다 그렇게 되겠는가? 안 될 일이다. 이놈 고쳐놓으면 저놈이 사고 나고, 저놈 고쳐놓으면 이놈이 사고 나고, 끝이 없는데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안 된다.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왔다. 형무소도 만들고 법도 만들고 경찰도 만들고 다 했지만 여전히 똑같다. 옛날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선 위치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 예수 믿고 천당 갈 생각을 할 것이 아니고, 내가 위치가 이탈되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된다. 위치 이탈된 것은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소용이 없다. 과녁이 저기 있는데 아무리 쏘아도 소용이 없다. 잘 믿어도 안 되고, 안 믿어도 안 되고 다 안 된다. 매 한가지이다. 잘 믿는 사람이나 못 믿은 사람이나 똑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 똑같다. 사회적으로는 혹시 잘 믿은 사람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잘 못될 수도 있다. 종교 역사를 보면 너무너무 보수적인 데서 너무 잘 믿은 데서 너무너무 악랄한 일이 벌어졌다. 좀 허름하게 믿는 데서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데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다 그렇다.
사람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데 왜 그런가? 위치가 이탈되었기 때문이다. 위치가 이탈된 사람이 아까 말한 대로 제갈량 같은 사람이 있으면 더 무서운 것이다.
위치가 바른 데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지만 위치가 이탈된 사람이 재주가 많으면 더 큰일이다. 도둑질 하는 사람이 머리가 둔하면 잡힌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 도둑질을 하면 잡을 수가 없다. 미제 사건이 그런 것이다. 아무리 수사를 해도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그렇다. 머리가 좋으면 되는가? 깨끗하면 되는가? 온전하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위치 문제이다.
우리는 원형을 봐야 돌아갈 수 있는데 원형을 볼 수 없다. 공자님을 보면 원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수양을 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공자님을 보고 우리가 환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분을 보면 단지 그분의 좋은 점을 본받아서 따라서 한다는 것뿐이지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석가모니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석가모니에게서 어떻게 우리 인생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가? 흙으로 지어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된 그것을 어디서 보겠는가? 석가모니에게는 볼 수가 없다. 완전히 부처가 되었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린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무엇이 되겠는가? 우리는 돌아갈 수가 없고 단지 그분을 따라 가고 쫓아가야 되는데, 그 쫓아가는 길이 히말라야 산 꼭대기 올라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번 생각해보라. 나는 일찍 포기하기를 참 잘했다. 내가 20세 때 스님에게 승려가 되라는 암시를 받았다. 암자에 있을 때 한 마디 들어보고 안 되겠다 싶었다. 스님은 지금 70세가 넘었는데 아직도 성불을 못하셨는데 언제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소원하기를 인도환생(人道還生)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죽어서 다시 사람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 번 되면 되느냐고 물으니까 아니지, 몇 억겁이 될지 모른다고 하셨다. 인도환생도 계속한다는 것이다. 만일 잘못하여 축생이 돼버리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아차 안 되겠구나. 어린 나이에 그 생각을 했다.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좋게 보였다면, 신기하게 보였다면 나는 중이 되었을 것이다.
그분 이야기에 불교에도 신기한 것이 많다. 어떤 유명한 스님이 봄이면 농악을 했다. 옛날에는 농악을 절에서 했다고 한다. 농악대를 조직하여 동네마다 가서 시주를 받는 것이다. 농악대를 만들어서 나가면서 스님에게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그때 참선하느라고 문지방을 잡고서는 다녀 오라고 했다. 한 달인가 석 달인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왔더니 계속 그저 그렇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에 문이 왔다갔다 하여 긁히고 피가 나고 있더라는 것이다.
스님, 다녀왔다고 하니까 어~ 하는데 물레방아가 쿵~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님의 참선을 깨우지 않으려고 물레방아가 멈춰있었다는 것이다. 어~하고 깨니까 쿵~하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신기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나는 신기하기는 신기하지만 몇 억겁을 가야 할지 모른다는 말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참 잘한 일이었다.
원형을 찾아야 된다. 왜 사람들이 안 되는가? 원형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싶은 사람은 너무 많다. 그런데 원형을 모르니까 어디로 회개할지를 모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고부 간의 문제 하나도 일생 동안 해결이 안 된다. 예수를 아무리 믿어도 해결이 안 된다. 그런데 그 많은 죄를 언제 다 해결하고 가겠는가? 불가능하다. 또 오늘까지 다 청산해도 내일 또 생기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나님이 창조한 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남자와 여자로 지어놓았다. 이 말은 둘이 연합해서 완전해진다는 뜻이다.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한다. 남자만 있어도 안 되고 여자만 있어도 안 된다. 여기 오신 분들이 다 남자만 있다고 생각하면 늦어도 100년 후에는 싹 없어져 버린다. 여자들끼리 산다고 생각해보라. 늦어도 100년이면 다 없어져버린다.
사람이 없어져버리는데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이 다 죽어버렸는데~ 보수고 진보가 어디 있는가? 사람이 다 없어져버렸는데~ 남자와 여자로 지어놓아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유지가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혼란이 되어 있는데, 이것만 생리가 남아있기 때문에 인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자손을 번성해야 한다. 자손을 번성하는 기능은 그대로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상대하는 위치는 이탈되었다. 이 위치를 바르게 해야 되는데, 이 위치를 바르게 하려면 원형이 있어야 된다. 나는 예수 안에서만 이 원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뿐인가? 십자가뿐인가? 다른 것 좋은 것도 많지 않느냐? 기독교 안에 좋은 것이 많지 않느냐? 좋은 것은 많다. 좋은 것은 많지만 내가 환원하려면, 내가 원점으로 돌아가려면 이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는 나는 이 사람을 보게 된다. 이 사람을 보았다. 아~ 이것이 바로 사람이구나.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수양한 사람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중요한가? 이 사람이라야만 연합이 가능하다. 벽돌은 참 좋지만 거기에 콩을 심으면 나겠는가? 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흙에 콩을 심으면 싹이 난다. 사람을 하나님이 만들 때 우리 생각처럼 벽돌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흙으로 만들었다. 왜? 연합하게 하려고. 씨와 연합하게 하려고.
그런데 앞으로 먹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 씨를 자꾸 변종을 시켰다. 씨를 변종 시켜서 문제가 복잡하다. 과일을 보면 커지고 맛도 달아졌는데 씨는 속에서 썩는다. 겉이 썩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쪼개보면 속에서 썩는다. 왜냐하면 씨를 변종을 시켰기 때문이다. 씨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원래 자기가 있었던 자리에 있어야 되는데 엉뚱하게 뚱뚱한 속에 들어있으니까 얼마나 애를 먹겠는가. 씨가 먼저 썩는다 요즘 과일들은 속이 먼저 썩는다. 속 썩인다고 하는데 속이 썩는다. 우리는 먹기 좋으라고 만들어놓았는데, 씨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자기는 그 속에서 커서 다음 세대를 이어 나가야 되는데 그 안에서 썩어 버린다.
이번에 특이한 말을 들었다. 우리가 먹는 큰 고추 같이 생긴 파프리카 씨가 금 값보다 비싸다고 한다. 1그램에 6만원, 금 1그램에 5만원이라고 한다. 왜 씨가 이렇게 비싼가 했다. 오늘 아침에 밥 먹다가 왜 파프리카 씨가 왜 이렇게 비쌀까를 연구했다. 이것은 분명히 씨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살이 너무 크다. 땡초는 고추는 작은데 씨가 꽉 차 있다. 파르리카는 살은 큰 데 씨가 제대로 되겠는가? 그러니까 파프리카 씨 1그램이 6만원이고 금이 5만원이라고 한다. 제대로 씨를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다.
하나님이 씨라고 생각하면 씨는 온전한데, 밭이 잘못되어 버렸다. 산성 토양이 되었다거나 밭이 잘못되어서 농사가 제대로 안 된다.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은 연합에 딱 맞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완전하게 맞는 사람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연합에도 딱 맞는 사람이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과 연합이 안 되었는가? 이탈되었기 때문이다. 내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보다 못하게 보이거나 나보다 낫게 보이거나 다 나와 다르게 보이니까 연합이 안 된다. 원 자리로 가면 똑같은데, 원래 있던 자리로 가면 똑같은데, 공자님에게서도 배우고 불교에서도 배우고 소크라테스에게도 배우다 보니까 변질 되어서 서로 만나면 남남이다.
고추와 파프리카가 아마 씨는 똑 같지 싶다. 조상은 같지 싶다. 그런데 고추가 파프리카 세계에 가서 같이 친구하자고 하면 되겠는가? 못하겠다고 할 것이다. 나는 너 같이 못생긴 것과는 상대를 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다. 또 파프리카가 고추에게 가서 친구하자고 하면 하겠는가? 너 같이 변질된 것과는 놀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영 안 된다. 너무 달라져서 안 된다.
우리가 그 다른 데서 만나면 절대로 교회가 안 된다. 연합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다르다. 똑같을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영향으로 되었는데 똑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인 사람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가 된다. 누구를 보든지 그 사람을 봐야 하나가 된다.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두려운 사람들, 인간관계가 두려운 사람들은 정말 복음이 될 수 있다. 사람이 그렇게만 보이면 두려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깥 것을 보니까 두렵지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보면 두렵지 않다. 사람마다 다 그 사람이 있다. 수양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다 똑같이 있다. 그 사람이 눈에 딱 보이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도 그렇게 사람을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이 못 된다. 사람 대하는데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항상 긴장한다. 그런데 이 사람을 알고 나니까 사람을 만나도 긴장이 안 된다. 너와 나는 똑같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순수하다. 순수한 사람을 만나면 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제쳐놓고 순수한 그 사람을 만나면 된다. 순수한 그 사람을 만나면 내가 거부감이 들 것이 없다. 두려울 것도 없다. 내가 그렇게 대하면 그 사람도 그냥 무장해제가 된다. 나는 여러 번 그런 것을 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올 때 단단히 무장하고 오는 사람이 있다. 내가 자기를 전혀 그렇게 보지 않으니까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 어떤 사람은 가스총을 갖고 왔는데 잘못 갖고 왔다고 했다.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된다. 그것도 사람들이 아는 데서는 못 만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데 가서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데 가서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가? 못 만난다. 그래서 전부 겉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열심히 믿는데, 그런 예수를 믿으니까 겉도는 것이다. 자기와 영 다른 예수만 믿고 있다. 자기가 갈 수 없는 예수를 믿고 있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예수를 믿고 있다. 그러니까 종교밖에 안 된다. 자기와 똑 같은 것이 있는 사람을 발견해야 되는데, 거기서 발견하기 어렵다.
십자가밖에는 볼 데가 없다. 다른 데 가서는 볼 수가 없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자꾸 하겠는가? 나도 다른 데 가서 보려고 많이 찾아보았다. 전혀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됐다. 아예 그 사람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하시는 일만 보니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내가 경배할 사람이지 거기서 내가 원형을 찾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러 분은 예수 믿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는가? 안 믿는 사람은 모르니까 자기나 나나 사람이지 하지만 예수를 그래도 알고 믿는다는 사람이 그 생각을 절대로 못한다. 그래서 절대로 연합이 불가능하다.
여러분도 아직도 안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깊이 묻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예수와 나는 다르지, 속에는 그런 생각이 있다. 말을 못해도 들어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나 나나 똑 같은 인간이지, 이렇게 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예수는 분명히 나와 다르다. 하지만 본질이 똑같다. 그것을 봐야 된다. 예수 안에 내가 있다고 하면, 지가 뭔데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뭐 사람이 다 똑 같은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나. 예수 안에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그 사람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던 그 사람이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다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 마지막 소원이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예수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제대로 알아야 믿지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생각이다. 알아야 믿는다.
은행은 확실히 알아야 믿고 재산을 맡기거나 돈을 맡긴다. 은행을 잘 모르고 어떻게 돈을 맡기겠는가? 요즘 비트코인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던데 가상화폐라고 한다. 그것은 은행이 없다. 주인이 없다. 제일은행이나 대구은행에 돈을 맡기면 주인이 있는데, 이 가상화폐는 주인이 따로 없다. 그 화폐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있다. 망해도 보상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도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이니까 민주주의인지 모르겠다. 인터넷처럼 공중에 떠 있는 돈이다. 일확천금을 할 수도 있고 한꺼번에 넣고 없앨 수도 있는데, 아무도 책임질 수가 없다. 대신 경제질서, 금융질서에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정부에서 규제를 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법이라는 데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세력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형이 없으면 우리는 돌아갈 데가 없다. 아무리 해봐도 나는 공자님에게 가거나 석가모니에게 가거나 그것밖에는 길이 없다. 다른 길이 없다. 만일 우리가 이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공자님에게 가는 것이 낫다. 차라리 석가모니에게 가는 것이 낫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무조건 믿고 된다고 따르고 있는 것은 하급이다. 저 밑에 계급에 속한다. 우리가 대학원까지 와서 그렇게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여기는 대학원이다. 박사과정인데 무조건 믿기만 해서 되는 박사과정은 없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이것을 시시한 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른 데 가면 있는 줄 알지만 다른 데 가면 없다. 어디로 회개하느냐고 물어보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라. 회개를 많이 해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구원도 많이 받아 본 사람도 있다. 수 없이 많이 있는데 이제 그것은 한물갔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원위치로 회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연합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연합하면 영생이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면 영생이다. 두 사람이 연합하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진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예수를 바라보도록 말하고 있다. 이것을 꼭 모두 외우기를 바란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4).”고 했다. 이 말 다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이 말이 나왔다. 나는 옛날에는 이 말씀을 몰랐다. 요한복음에 써있는지도 몰랐다.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다. 3장16절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3장16절이 실감이 안 됐다. 이상하다고 했다. 왜 이렇게 중요한 구절이 나한테는 실감이 안 되는가 했더니 그 앞 구절을 모르니까 실감이 안 났던 것이다.
이 두 구절을 외우기 바란다. 집에 가서 외울 시간이 없으면 지금 한 번 해보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3,14,16).” 다음 구절들이 다 연관되어 있지만 머리가 복잡할 수 있으니 딱 이 두 구절만 외우면 된다.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3장16절은 다 알 것이다. 앞에 3장 14절 15절을 잘 모른다. 16절 앞에 14절 15절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된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집에 가서 하루에 몇 번씩 읽어서 꼭 외워야 된다.
복음의 근본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걸을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 걸으면 남자만 사는 것과 똑같다. 결국은 멸망해서 없어진다. 스스로는 못 산다. 이탈이 원인이라면 예수께로 와야 된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이탈 때문이라면 공자에게 가도 안 되고, 석가모니에게 가도 안 된다. 이것은 단호하게 내가 말할 수 있다. 거기에 가면 수양을 해서 더 좋은 갑옷을 입는 것이지 내 원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고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훌륭한 분들이다. 사람들 중에서 출중한 분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돌아갈 원형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실패자 중의 실패자이다. 최대의 실패자이다. 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원형이 들어있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면 예수를 확실하게 전할 수가 없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만 전할 수밖에 없다. 죽으면 천당 보내주는 예수만 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성경에 있는 말이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은 목사님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한다고 알 것이고,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은 성경 말씀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할 것이다. 내가 성경에 있는 말을 한다.
이것은 배우고 깨달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독립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졌다. 배워서 무엇을 안다는 사람은 기어코 독립을 한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사람은 배워서 나가버린다. 그런데 구속은 배울 수가 없다.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속이라는 것은 희한하게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배워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은 배워서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속은 배워서 어떻게 하면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구속이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한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4).”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구속된 사람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만난 그 사람이 구속된 사람이다. 우리 구속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절대로 배워서 안 된다. 배워서 가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배우면 다 알아버린다. 다 아니까 된 줄 알지만 하나도 안 된 것이다. 알지만 아무것도 안 된 것이다.
독립이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남자는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가 없다. 여자가 혼자 아기를 낳을 수가 없다. 이것은 “둘이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둘이 합하니까 지금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남자라는 남자는 전부 여자를 싫어하고, 여자라는 여자는 모두 남자를 싫어하면 인류는 저절로 멸망이다. 원자폭탄이 없어도 저절로 멸망이다. 사춘기 때부터 서로 좋다고 쫓아다니니까 인류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생리적으로 혼자 못 산다.
무엇이든지 배우려는 사람은 배워서 가려고 한다. 자기가 독립하려고 한다. 학문이나 지식은 배우면 다 안다. 독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은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독립이 불가능하다. 그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구속이다. 연합 안에 있는 그 자체가 구속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 하나만 따로 지어놓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 혼자 잘난체해도 소용이 없다. 남자 혼자 잘난체해도 소용이 없고, 여자 혼자 잘난체해도 소용이 없다.
예수 안에, 그 안에 연합이 있다. 그 사람만 연합이 가능하다. 흙이 순수한 흙일 때 씨를 받아들인다. 씨와 흙이 연합되니까 나무가 된다. 나무가 되니까 열매가 열린다. 씨와 흙은 완전히 다르다. 둘이 연합하니까 그렇게 된다. 우리도 서로가 다르지만 연합하면 무엇이 된다. 별 것이 아닌 집도 둘이 연합하면 잘 살고, 아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도 둘이 연합이 안 되면 잘 못산다. 방법이 없다.
<유일한 길!>
나는 예수를 만난 이 길을 유일한 길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말하기를 그것만 있는가? 꼭 그것밖에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는 뭐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계속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져버린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어져버린다.
비유가 맞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도 한 가지에 미쳐야 성공한다. 그런데 미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도 안 된다. 미칠 일도 아니지만 하나밖에 없으니까 미친 것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한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기왕 미치려면 옳게 미쳐보면 좋겠다. 기왕 미칠 바에는 예수에게 미치는 것이 낫다. 기왕 미칠 바에는 유일한 길에 미쳐야 된다. 안 미치고 살려고 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안 된다. 좌우간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해도 한 가지는 미쳐야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철학 책을 보았다. 그때 배운 것이 절대로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연극배우가 절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이지 배우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어려서 했다. 굉장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철학자가 될 소질이 있다. 철학박사가 웃는다. 어려서부터 그 생각을 했다. 나는 관객이 되지 절대로 배우가 되지 않는다. 광대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미친 놈이 안 되니까 아무것도 안 됐다. 미칠 것이 사실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길에만 내가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뭔가가 되는 것 같다. 이제 막 되려고 하는데 기름이 다 떨어졌다. 여러 분이 대신 살아주어야 한다. 나는 기름이 다 되었으니까 여러분들이 운전을 해주어야 한다. 정말이다. 진짜이다. 우리 교회가 지켜야 할 길이 이 길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한 가지에 꼭 미친 사람들! 미친 교회! 예수에게 미친 교회!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복잡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유일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게서 참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에게서 우리의 온전한 원형을 발견하도록 눈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길에 온전하게 유일하게 완전하게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이것을 지키고 이것을 전하고 이것을 확장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