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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 안에서 행함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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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새 생명 안에서 행함
지난 번에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너무 십자가에 오래 있다고 해서 새 생명을 말씀 드렸다.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람의 의식이나 행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공자님은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새롭게 하려고 했고, 석가모니는 깨우침을 통해서 사람을 알려고 했다. 세계 많은 종교가 있지만 다 그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서 생각을 고치고, 또 깨달음을 통해서 의식을 고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 설교의 대부분도 뭘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이니까 사람의 행위를 고쳐보려고 설교를 하는 것 같다. 행위는 의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나온다. 행위를 고치기 위해서 의지를 훈련한다고 될 수 없는 일이다. 설교나 교훈이나 우리의 의지를 동원해야 되는 문제이다. 의지를 동원해서 사람(인간)을 고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생명을 바꾸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가? 다 서로 비슷하다.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고 도둑질 하라는 데가 어디 있겠는가? 다 똑같다. 좋은 일 하라는 것도 다 똑같다. 그것을 시행하려고 하면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진전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어도 별로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성경은 듣고 진전이 되면 자기 의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듣고도 시행하지 못하면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이래도 정죄가 되고 저래도 정죄가 된다. 세상에서는 자기 의는 높이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의는 아주 나쁜 것이다. 자기 의는 야만 보다 오히려 못할 수도 있다.
성경의 초점은 생명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초점이다. 다시 창세기로 들어가야 되는데 사람은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사람을 지을 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지을 때는 참 좋다고 했는데 지어진 사람은 산 혼이기 때문에 두 가지 길이 주어졌다. 하나는 선악과를 먹고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가는 길이다. 사람은 다른 것과 달라서 먹는 것에 따라서 생명이 바꾸어진다. 이런 원리이다.
벌이 알은 같은데 로열제리를 같은 벌과 안 먹는 벌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일벌이 생기고 숫벌이 생기고 또 여왕벌이 생기는 것으로 각기 달라지는 이유가 양식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도 육신적으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생긴다. 서양사람들과 동양사람들,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과 초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신체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부정할 수는 없지만 100% 바꾸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먹는 것으로 체질이 100% 바꾸어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바꾸어진다고 볼 수 있다.
먹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사람은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이탈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먹으면 이탈하도록 되어 있는 생명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이탈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생명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율법이 주어진다. 선악을 아는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니까 결국 받을 것이 율법 밖에 없다. 그러면 그 율법을 받고 성공을 했는가? 결국 모두 실패했다. 사람은 사람 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열심히 할수록 하나님은 더 불만이었다. 예언서를 읽으면 거의 다 율법을 행하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다. 잘했다고 한 곳이 별로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라는 것은 율법의 표면을 표현하는 것이고, 율법을 내신 이의 마음과 일치가 안 된다. 내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면 일하지 않으면 된다. 표면적으로는 다 지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율법을 표면만 지켜서 되겠는가? 그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자고 주신 것인데, 아무리 지켜도 한 마음이 안 된다. 그래서 율법을 실패한 것이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고 율법은 옳지만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생명으로 율법을 받고 지키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한 율법 때문에 복을 주기 위한 율법이 오히려 저주가 된다.
바울의 논리로 말하면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없었는데 율법이 오니까 죄가 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주려고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율법이 오니까 죄로 드러났다.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율법이 오기 전에는 자기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율법을 주어서 잘못된 것을 깨우치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다고 바울이 해석을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할 때, 처음부터 하나님이 물론 다 아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하셨겠지만, 가르치려고 했을 것이다. 가르치려고 주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잘못되고 만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좋게 가르치려고 하는데 잘못된 사람이 있다. 차라리 가르치지 않고 그냥 놔두었으면 그렇게 나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공부를 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아이들이 못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무식하고 농촌에서 일이나 하는 집에서 키운 아이들은 공부는 못할지는 모르지만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부모가 배우기도 하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하려고 애를 쓰면 어떤 아이는 그렇게 자라고 되고, 어떤 아이는 사람을 버리게 된다. 잘되라고 부모가 하지 잘못되라고 하는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처음에 율법을 주실 때, 잘 되라고 주신 것이지 율법을 가지고 저주를 받으라고 주셨을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받는 사람의 생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복으로 준 것이 저주가 되어 버렸다.
위장이 나쁘면 좋은 음식을 먹었는데 설사를 한다. 우유를 먹으면 계속 설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랬는데 아무리 먹어도 고쳐지지 않고 계속 설사를 한다. 뒤로 알고 보니까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산균이 부족하다 싶어 먹었는데 그래도 안 된다. 그런데 유당을 뺀 우유를 먹으니까 전혀 설사를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지방 때문인 줄 알았다. 탈지분유를 먹어도 설사를 하니까 지방 때문은 아닌 것이다.
옛날에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이 들어올 때 드럼통으로 탈지분유가 들어왔다. 그것을 시골에 배급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나는 설사를 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 유당 때문이었다. 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분들은 락토스프리 우유를, 유당이 들어있지 않은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으로 먹으려면 락타아제를 먹으면 설사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당불내성으로 유당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떠함에 따라서 먹으면 좋은 사람이 있고, 먹으면 나쁜 사람도 있다. 지금 미국에 가 있는 93세의 어떤 형제가 90세 조금 전에 무릎 관절 수술을 했다. 그런 나이에 무릎을 바꾸어 끼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골다공증 검사를 해보니 청년 같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구에 오면 그 큰 수성구 연못을 두 바퀴씩이나 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 형제가 식사를 하고 나면 우유를 한 잔씩 마신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유를 먹지 말라고 하는데, 이 형제는 그렇게 좋아진 것이다. 60세에 수술을 하고 걸어 다닌다.
문제는 몸 안이다. 우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다. 유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면 칼슘을 보충하는 좋은 음식이 된다. 90세 형제가 관절수술을 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
음식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해가 되고 만다. 의사들은 나에게 우유를 먹지 말라고 한다. 우유를 먹어서 손해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했지만 지금은 설사를 하지 않으니까 마시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유를 마셨고, 우유 때문에 탈이 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보약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설사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이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가지고, 악을 만들어버리게 되고 독을 만들어 버리게 된 셈이 된 것이다. 소화가 안 되면 독이 된다. 창자 속에서 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이 된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정상적으로 발효를 못하면 독이 된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중세 교회를 생각해보면 하나님 말씀이 아니었으면, 성경이 아니었으면, 교회가 아니었으면 죽지 않을 사람이 수없이 죽었다. 좋은 것을 제대로 발효시키지 못해서 독이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성경 말씀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성경 말씀 때문에 연합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성경을 준 것이 그렇게 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면 독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생명을 바꾸는 문제이다. 생명을 바꾼다는 말은 두 가지 길 중에서 생명의 길로 바꾼다는 말이다. 선악과의 길에서 생명나무의 길로 바꾸는 것이다. 성경에서 옛 생명, 새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옛 생명은 악한 것이고, 새 생명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옛 생명은 선악과를 먹은 생명을 옛 생명이라고 하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생명을 새 생명이라고 한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고,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선악에 젖어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선이냐 악이냐로 판단한다. 만약 선악과가 없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을 다르게 할 것이다.
성경을 보아도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은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선이냐 악이냐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볼 때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고, 사람들이 볼 때 악한 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서 선하고 좋은 것이 나와도 참 생명이 아닐 수가 있고,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하나님이 본 대로 사람을 볼 수 있다.
목회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일이다. 무슨 눈으로 사람을 보느냐는 문제이다. 선악과라는 이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선 아니면 악이다. 그런데 새 생명 가운데서 보면 선 아니면 악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야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가 있다. 선과 악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받아들일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더욱더 선과 악을 가르쳐 놓으면 불 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다. 기독교인을 보면 매일매일 그것만 들으니까 매일 매일 선한 것 같다. 그런데 나타난 것을 보면 무지무지하게 악한 것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생명이 바꾸어지지 않아서다.
생명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똑같다. 개가 하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개가 하는 것이다. 소가 하는 것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는 무엇을 먹고 누어도 개똥이다. 소는 무엇을 먹고 똥을 싸도 소 똥이다. 절대로 다른 것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생명을 바꾸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의지로는 생명을 대항할 수 없다. 의지로는 법을 대항할 수 없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더라도 의지로는 절대로 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천명한다. 내 속에 한 법이 거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내가 원한다는 것은 의지인데 그 의지로 법을 이길 수가 없다. 왜? 내 속에 자라나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의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다른 법이 또 있더라는 것이다. 그 법이 오기 때문에 자기 의지가 무능해져 버린다.
의지는 법 앞에서 아무 능력이 없다. 중력의 법칙에서 의지를 가지고 손을 들고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는 땅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내가 의지를 가지고 손을 들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손은 저절로 내려 오게 된다. 왜?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중력의 법칙 안에 있기 때문에 의지가 중력의 법칙을 이길 수가 없다. 무중력 상태로 가기까지는 중력을 이길 수가 없다.
법이 바꾸어지려면 생명이 바꾸어져야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의지를 더 키워서 더 선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의지를 행하던 모든 것을 끝나게 하는 것이다. 의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으로 행한 모든 것을 끝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어떤 것도 안 된다. 선한 것도 안 되고 신령한 것도 안 되고 모든 것이 다 안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가인은 이제 제외된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셋을 다시 낳았기 때문에 셋의 족보가 이어진다. 아담 계보를 말할 때 가인을 빼버린다. 그러면 가인은 없어져야 된다. 그러나 가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누가 나를 만나면 죽일 것이라고 하니까 아니다, 너를 죽인 자는 벌을 7배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표를 주어서 죽이지 못하도록 했다. 가인은 죽지 않고 있다. 아벨은 또 어디에 있는가? 완전히 죽었는가? 그렇지 않고 제단 아래서 신원하고 있다. 아직도 죽지 않고 있다. 셋이 대신 할 뿐이지 아벨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가인을 대신해 죽은 것이 아니고, 아벨을 대신해 죽은 셈이다. 왜냐하면 선한 것이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을 때 왜 먹었는가? 예수님 같이 되려고 먹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할 수 있는 사람,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사람,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사람. 인간이 그렇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다.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완전히 인간이 소망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것은 예수님도 그런 것으로 우리를 구속한 것이 아니고,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했다.
구약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큰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거나 아니면 인간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결정적인 자리에 가면 전혀 그것이 아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먹으라고 하니까 나는 사람이라고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니까 나는 사람이라고 하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니까 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결국은 사람 밖에 없다.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이것을 또 완전히 끝낸 것이다.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지 천사가 하나님 아들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천사가 하나님 아들로 대우 받았다.
구약에 보면 창세기 6장에서도 천사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욥기를 봐도 마찬가지로 천사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누가 하나님 아들인가? 인간이 생각할 때는 천사 같은 존재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은 꼭 사람이어야 된다. 십자가에서 죽지만 꼭 사람이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어도 하나님 아들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아들도 있고 딸도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기도원에 가니까 어떤 처녀가 자신이 입신을 했는데 하나님과 예수님과 마리아 셋이 나란히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간증을 했다. 부흥회 날 갔는데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하나님 보좌에 하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고 마리아가 있겠는가? 하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는 하나 안에 전부가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다. 네가 사람이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가? 아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것이 아들이다.
사람 속에 하나님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 아들이다. 우리를 보고 왜 하나님 자녀라고 하는가? 우리 안에 하나님 생명이 있을 때, 하나님 자녀들이라고 한다. 생명이 없으면 자녀가 될 수 없다. 법률적으로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주 약한 말이다. 바울이 양자가 된다는 말을 썼지만 이것은 법률적인 말이고, 아들은 실제 생명이어야 된다. 그 생명이 천사 속에 있는가? 그것이 아니고 그 생명이 사람 속에 있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 아들이 되도록 지어졌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었다. 양식에 따라서. 의지로는 불가능한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 죽음 안에 우리가 소원했던 나 자신이 죽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내가 죽은 것이다. 그 안에 포함 되어서 다 죽었다.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이적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아들이 된다거나 하는 꿈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저러면 하나님 아들이 되겠다는 꿈을 버려야 된다. 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들이 된다. 죽는 데도 하나님 아들이 되는가? 죽는 데도 하나님 아들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승천하셨다고 한다. 도대체 그 부활하신 분이 어떤 분인가? 우리가 이해하기 참 곤란하다.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다. 옆구리를 만져봐라, 나는 살과 피가 있다고 할 때도 있고, 또 나를 만져보지 말라고 할 때도 있다.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다. 부활한 후의 사건은 성경 대로 본다면 그렇다. 그 모양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바울에게도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런데 말하기를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호박과 호박씨가 같은가? 호박씨를 뿌려 놓으면 호박이 나온다. 우리가 씨를 뿌리지만 그 열매는 각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어떤 모양을 주실 것인지는 우리는 모른다. 달의 형상도 있고 별의 모양도 있고 여러 형상이 있는데, 무슨 형상이 될지는 모른다. 씨를 심어보지 않고서는 무슨 형상이 될지 모른다. 호박이 크니까 씨도 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씨가 작은 것이 큰 열매가 될 수도 있고, 큰 씨가 작은 열매가 될 수도 있다. 농사 짓는 사람만 씨를 보고 열매를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서울 아이들이 쌀을 보고 쌀 나무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의 씨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예수님이 부활한 모양도 사실은 우리는 모른다.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기 때문에 모른다. 그래서 부활체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고 투명인간이라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단지 새 생명의 발아다.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죽으면 끝나는 줄로 알았더니 끝날 것은 끝나고 새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끝날 것은 끝났다.
우리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기대했던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끝났다. 더 이상 하나님 같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선을 알면 악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 같이 된 것이다. 이것이 참 무서운 것이다.
특별히 목회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람을 판단하기가 참 쉽다. 이것은 악한 것이고 저것은 선한 것이라는 것이 딱 보인다. 그렇게 구별해 보기가 너무 쉽다. 그러나 생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선악의 눈으로 보면 어차피 나는 어느 편에 속해야 되고, 누구 편을 들어야 한다. 너는 잘했고 너는 못했다고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판단한다. 그러면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철저하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어져야 된다.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목회자들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철저하게 없어져야 된다. 부활한 생명, 죽고 다시 난 생명, 그것만 있어야 된다. 죽을 것은 죽어버리고 다시 난 것만 있어야 된다. 선악과로 말미암은 것은 끝나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새로 나온 새로운 사람이다.
생명나무 열매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제일 온전하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죽을 것은 죽어버리고 남은 그 사람, 그 인격, 그 생명이 생명나무 열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먹고 마시면 내 안에 생명나무가 들어온다.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고 늘 말하지만 그것도 애매하다. 예수를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와 우리가 하나 되면 우리 안에 그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됨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소원은 예수 믿는 사람의 궁극적인 소원은 예수와 하나되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를 해 하는가? 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나 마찬가지다. 무엇이 궁극적인 기도의 목표가 되는가? 그분과 내가 하나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될 방법이 없다. 여러 분도 많이 해보셨겠지만 안 된다. 물과 기름이 하나가 안 되듯이 하나가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결론은 하나 되는 길이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내가 나다. 그분과 내가 동일시 된다. 먹었기 때문에 동일시 된다. 먹는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를 어떻게 먹겠는가?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먹어지는가? 그것도 안 된다. 예수와 내가 하나되는 자리는 서로 먹는 자리다.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어라. 받아 먹는다는 말이 어떻게 받아 먹겠는가? 생명 안에 내가 있어야 받아 먹는다. 그 생명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떻게 내가 그를 먹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한 비밀인 것 같다. 먹으라고 했는데 먹을 방법이 없다. 성찬식에서 먹어보아야 그것이 예수를 먹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먹어봐야 예수가 들어오는가? 천주교인들은 매주 먹지만 그렇다고 예수가 들어오는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포함하고 죽으셨다. 그분이 죽을 때, 우리의 죽을 것도 죽어버린다. 우리는 선악과로 말미암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다 끝나고 죽어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나만 남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한 나만 남게 된다. 예수님에게서도 남은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사람만 있다. 그 동안에 행했던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이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적은 어떤 일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지 이적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아들이고, 이적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 끝났다. 더 이상 없다.
사탄이 이적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너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보니 아무것도 아니네, 전에는 이적을 보고 따라 왔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나갔다. 그런데 다 떠나갔지만 그 속에 다른 생명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그 사람과 우리가 만나게 된다.
새 생명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새로워진 것이 아니다.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 새로워지겠는가? 아무것도 새로워진 것이 없다. 새롭게 한 것이 없다. 그 안에서 나를 보면 새로워진다. 아~ 저것이 나구나. 아무리 찾아도 내가 모르던 나다. 불교에서 자기를 찾는데, 자기를 찾는지 못 찾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못 찾을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찾아놓은 자아라는 것이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그냥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놓았는지는 우리가 모른다.
우리가 참 사람이 되려면 참 사람을 보아야 되는데, 참 사람이 본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참 사람이 되겠는가? 우리 기준으로 생각해서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거나 저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모델이 없다. 그래서 모두 다 모세 같은 사람이 되겠다거나 베드로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가니까 집사님들이 기도하기를 베드로 같은 능력 있는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울 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것밖에 모델이 없다. 그런데 모두 그분들이 행한 외적인 일을 보고 그렇게 말한다.
돌아갈래야 돌아갈 데가 없다. 맨날 회개하라고 하지만 어디로 회개하는가? 돌아갈 데가 있어야 회개를 하지... 왜 회개가 끝나지 않는가? 제 자리를 도니까 회개가 끝나지 않는다. 갈 데가 있어야 돌아간다.
교회에 가면 첫 번째가 회개하라고 한다. 부흥회 가면 첫째 날이 회개하는 날이다. 기독교처럼 회개를 많이 하는 데가 없지만 회개가 안 된다. 돌아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교에서 회개가 철저한 것 같다. 요즘 불교TV를 보면 엎드려 절을 하면서 일일이 악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한다는 문구를 보고 기도를 한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낫다. 정해진 대로 불자들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문구로 써서 읽는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하는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불교에 가는 것이 더 낫다. 내 생각에는 기독교에서 중언부언 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다.
생명을 바꾸어야 한다. 생명을 바꾸기 위해서 구속이 필요하다. 구속은 수속이다. 생명을 바꾸기 위한 수속이다. 선악과의 생명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생명으로 바꾸게 하는 수속이다. 이 수속이 확실치 않으면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들어도 도로 물타기가 되어 다른 것이 되고 도로 다른 것이 된다. 밑반죽이 조금만 남아 있어도 언제든지 빵이 부풀어진다. 완전히 닦으라고 되어있다. 유월절이 구속을 위한 것이라면 다음 마지막 날까지는 무교절이다. 하루만 유월절이다. 그리고 다음 날은 무교병을 끝까지 먹는 날이고 누룩이 섞이면 안 된다. 무슨 누룩인가? 선악을 알게 아는 그 누룩이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도 옛날 누룩이 있는 것에 부으면 도로 그것이 되어 버린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부활한 사람이다. 새 생명을 행한다는 말은 이 사람으로 행한다는 말이다. 내가 그 사람이라면 나는 그렇게 행하게 된다. 나를 잘 모르니까 나 대로 행하는 것인데, 내가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그 사람으로 행하게 된다.
5m 되는 강을 뛰어 건넌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자기를 안다. 못 뛰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자기가 자기를 알기 때문이다. 자기를 모르면 뛰어 들어갈 수 있지만 알기 때문에 뛰어 들어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안에 있는 그 사람이 나 인줄 알면 나는 다르게 살게 된다. 그리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하게 되고 하나님이 필요하게 된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의 고기를 먹고 애굽을 빠져 나와서 홍해를 건너갔다. 이것은 죽음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물 벽이 생겨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갔는데 이것은 죽음을 통과한 것이다. 애굽 사람이 죽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은 왜 안 죽겠는가? 죽음을 통과한 것이다. 그래서 광야로 나왔는데. 양식이 떨어지지 아우성을 쳤다. 그때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다. 양식을 바꿨다. 애굽에서 가지고 온 양식은 바로가 준 양식이다. 그것을 먹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양식을 바꾼 것이다. 철저하게 바꾸었다. 완전하게 바꾸었다. 무교절이었다.
그것을 먹고 무엇을 했는가? 성막을 건축했다. 출애굽기는 애굽을 빠져나온 해방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출애굽의 목표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다. 성막을 건축하는 일은 하나님 백성으로 짜여지는 일인데, 하나님 백성으로 짜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것이다.
성막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거처를 만든다는 말이다. 땅위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곳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새로운 양식을 먹고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었다. 그것은 그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처가 없으면 계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니까 아무데나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데나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만날 수가 없다. 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야 만날 수가 있지 아무데나 거하시는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다.
성막을 그렇게 보존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집이 있어야 된다. 우리는 집 없는 하나님을 찾아 다닌다. 집 없는 하나님을 찾아 다니는 것은 예수 없는 하나님을 찾아 다니는 것과 똑같다. 그 집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약시대에 오면 그 성막 안에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 안에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시매.” 물질로 된 성막이 이제 인격으로 된 성막으로 바뀌어진다. 그 인격이 있어야 하나님이 땅에 계신다. 그 인격이 없으면 하나님은 땅에 계실 수가 없고 다시 땅으로 올라간다. 지금 형편이 그렇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가? 하늘로 가야 된다. 하늘을 가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나님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하늘로 가야 된다.
오늘 우리가 교회가 하나님의 거처가 되면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옛날에 성막에 여호와께서 계시기 때문에 백성들은 언제든지 여호와를 만나려면 성막으로 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된다. 오늘날 하나님을 만나려면 교회에 와야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예수의 몸은 성막에 있다. 예수의 몸 안에 하나님의 거처가 있었다. 예수의 몸의 확장은 곧 성막이다. 이것이 발전하고 발전하면 새 예루살렘이 되기 때문에 그 성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통치하는 보좌가 있다.
교회가 오늘날의 새 예루살렘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미래의 새 예루살렘이다. 오늘날의 새 예루살렘은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이지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성막은 물질로 만들어진 성막이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다.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성막이고, 예수님이 성전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왔다. 예수와 함께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하셨다.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실 수 밖에 없다. 하늘에 계시면 도저히 만날 수가 없다. 땅위에 계실 때 우리가 만날 수가 있다. 먼저는 산으로 내려 오시고, 그 다음에는 성막으로 내려 오셨다. 모세 시대에도 그랬다.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기 위해서 산으로 내려 오셨다. 다른 사람이 올라 오지 못하는 산 꼭대기로 오셨다. 거기서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서 성막에 관한 식양을 가지고 내려와서 성막을 지었다. 그 다음에 여호와는 성막 안에 계셨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에 덮혀있었다고 말한다. 그 말이 그대로 요한복음에 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가 되었다.
오늘 교회는 그분의 몸이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데가 없다. 교회를 떠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방인의 하나님일 수가 있다. 이방인들은 몸이 없으니까 그 사람들 대로의 상상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 우리는 상상의 하나님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이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도 예수는 모르는데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다. 예수 없는 성령이 어디 있는가? 이것도 이방인들의 일이다.
예수가 중심이다. 인격이 중심이다. 그 인격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 인격의 확산이 결국 교회이다. 이 인격의 몸이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못 만난다. 이방인의 하나님이야 만나겠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다.
성막 건축! 출애굽의 목표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고, 성막은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주 분명한 자리에 와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리에 와있다. 삼각산에 가고 백두산에 갈 일이 아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을 보면 뒤로 가면 다 이상해져 있다.
이제 이 안에서 행하는 것이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생활해보면 새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은 교회생활이 재미있다. 옛 생명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면 사방이 걸림돌이다. 참 이상하다. 세상에서는 옛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잘 되고 좋다. 그러나 교회는 옛 생명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악과를 가진 사람으로 살면 맨날 걸리는 것뿐이다. 40년이 되었지만 40년 동안 걸리기만 한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항상 제자리에 있다.자기에게 걸림이 되었던 사람들은 다 앞으로 가버리고 자기는 그 자리에 있다.
교회는 새 생명으로 행하는 곳이다. 영 다른 곳이다. 우리 교회에 신교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신기한지 사방을 다니면서 일일이 다 취재해보시고 물어보고 교제하고 다니신다. 그런데 자기가 처음 만난 교회이니까 신기한 것 같다. 완전히 골몰해 있다. 사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잠을 안 잔다고 한다. 밤에 깨어보면 서재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 박사논문을 쓸 때 그랬는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신교수님이 지금까지 보던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이니까 신기한 것이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특이하다. 지금 어린이 영어캠프를 하고 있다. 나이가 78세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놀랐다. 신기한 세계를 본 것 같다. 걸리려면 많이 걸릴 분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 하셨다. 우리 교회는 도대체 난장판이다. 얼마나 많이 걸리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을 수용하고 너무 특이하다.
교회생활을 하려면 구속을 받아야 된다. 구속을 받는다는 말을 선악과의 세계가 끝나고 새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 새 생명 안에서는 선악과는 이제 통하지 않고, 생명나무 열매만 통하는 곳이니까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세상과 똑같으면 절대로 안 된다. 세상과 같고 다른 것이 술 먹고 안 먹는 차원이 아니고, 생명의 차이이다.
우리 교회 젊은 아이들에게 한참 바쁠 때 충분하게 말씀 공급이 되지 않았다. 창세기 2세들이라고 하는데 이 2세들이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살기는 이 분위기에서 살았는데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하면 실패한다. 왜 실패하는가? 문화가 틀려서다. 사는 정신상태가 틀린 것이다. 뭘 잘못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다른 세계이다. 이 다른 세계가 이 선악과의 세계에 전파되어야 되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바꿀 방법이 없다. 기독교가 들어가서 바꾼다는 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유럽이 그렇다. 교회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교회가 할 일이 다 끝나버렸다. 기독교적인 윤리를 가지고 사회를 만들어놓았으니까 분위기는 되어 있는데 교회는 이제 필요 없다. 유럽에 가보면 교회와 성당이 텅텅 비어 있다. 성당 미사 드리는 데를 보니까 한 쪽 귀퉁이에서 3~40명이 모여서 뭘 하고 있었다. 문화적인 기독교는 끝나고 교리적인 기독교도 끝났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인류에게 희망은 새 생명뿐이다. 구속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구속이 없으면 밭을 갈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과 똑같다. 온갖 잡초와 자라서 결국은 수확을 못하게 되었다. 완전히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려야 새 것을 수확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었다는 것은 참으로 복음이다. 무엇을 하든지 도로 흙이 되니까 갈아엎으면 도로 흙이다. 사람은 갈아엎으면 도로 흙이 된다. 구속의 복음을 전파하면 사람은 도로 흙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하나님 말씀을 뿌려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되고 세상에 전파되어야 된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하여 보자. 이것은 이론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새 생명으로 행해 보면 새 생명이 나올 것이다.
감사합니다.
질문:
오늘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예수가 부활하는 씨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새 생명의 발아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 오늘 내 자신이 예수가 부활하는 씨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현래 목사님:
새 생명의 발아라는 말은 새 생명이 싹이 났다는 말이다. 예수로 말미암아서 새 생명이 싹이 났다. 새 생명이 이렇게 싹이 난다는 말이다.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라는 나오는데, 무슨 첫 열매인가? 부활하신 첫 열매이다. 새 생명의 첫 열매이다. 아담 안에서 나왔던 옛 생명은 끝이 나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새 생명을 따라서 살아야 된다. 새 생명 안에서 살아야 된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훌륭하신 분 안에서, 이적을 행하신 분 안에서가 아니라 새 생명 안에서다.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옛 것은 죽고 십자가에서 끝나고 다시 오신 그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산다거나 예수로 산다는 것은 좀 막연하다. 예수처럼 산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처럼 살 것인가? 어렵다. 여러분이 쉽게 말해서 나처럼 살라고 해도 어렵다. 나도 여러분처럼 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겠는가? 본 받아 산다고 하는데, 뭘 본받아 살 것인 것? 아주 어려운 일이다. 죽고 다시 산 그 생명 안에 산다는 말이다.
질문을 하시니까 오히려 좋은 것 같다. 지난번에 교회에서 말씀했는데도 누가 와서 어렵다고 한다고 질문을 하셨다. 대답을 했더니 그제서야 알아듣겠다고 하셨다. 말이 다 온전치 못하니까 부족한 것이 생긴다. 부족한 것을 물어보아야 대답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