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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경륜의 중심-연합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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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하나님 경륜의 중심 - 연합
하나님 경륜의 중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창조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완성까지가 전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하늘과 땅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땅에 오셨는데 있을 자리가 없었다고 시작한다.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연합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제일 안 되는 것이 연합이다. 사탄이 못하는 것이 연합이다. 교회는 꼭 이 경륜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되고, 이것을 이루어야 교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 형상과 우리 모양을 따라”라고 말했다. 형상과 모양도 결국은 연합이다. 형상이라고 하면 영어로는 Image로 번역하고 모양은 Likeness라고 번역을 했다. 사전적인 의미를 따지면 애매하고 모호한 것도 많은데, 실제적으로 경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보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고 되어있다. 그것은 연합을 말하고 있다. 혼자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 번째 단계에 2장에 가면 “땅에는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다. 안개만 자욱하다고 했다. 땅이 있으면 경작할 사람이 있어야 된다. 땅만 있으면 황무지다. 또 경작할 사람만 있어도 소용이 없다. 땅에는 경작할 사람이 없으므로 안개만 자욱하게 올라왔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다고 했다. 흙과 생기다. 흙이 아무리 있을지라도 빚지 않으면 어떤 형상이 나오지 않는다. 빚을 사람이 있어야 되고 흙이 아무리 있을지라도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처음부터 모은 일이 이렇게 연합으로 시작한다. 하나도 예외된 것이 없다. 홀로 성불하면 된다거나 도를 통하면 된다거나 성장하면 된다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 경륜에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빠져 나와 보려고 발버둥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자도 그렇고 도를 통한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 경륜과는 사탄의 경륜이 완전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을 자세히 봐보라. 연합이 안 된 이유가 전부가 다 하나님이 없는 결과이다. 그리고 아담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물에게 이끌어 와서 각기 이름을 주라고 하셨더니 아담이 이름한 바가 곧 이름이 되었더라고 했다.
결국 이름은 용도, 필요이다. 아무리 만물이 있을지라도 생물이 있을지라도 필요한 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름을 준 대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사용할 사람이 있어야 된다. 이름을 줄 자가 있어야 된다. 우리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주인이 이름을 주어서 다 있다. 이름을 빼버리면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만물은 이름이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와 여자라고 했다.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한 몸이 될지니라” 하고 2장을 끝맺었다. 결국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아들을 낳는 것이다. 둘이 연합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1장에서 말할 때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라 했는데 연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도 한꺼번에 사람을 수십만명씩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전부 연합이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에 가면 결혼의 비밀을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자는 이래야 되고, 여자는 저래야 된다고 하다가 마지막에 가면 큰 비밀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도 연합이다. 그리스도가 아무리 위대해도 교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를 알아줄 곳도 교회 밖에 없고, 필요로 하는 곳도 교회 밖에 없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신랑이 없는 잔칫집과 마찬가지다. 결국은 연합이다.
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이 되는데 그것 역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하나님이 혼자 있지 않고 어린양과 함께 있다. 전부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사탄으로 인해서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이것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만일 가정이 없다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안 될 것이다. 또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하더라도 키울 수가 없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도다. 그렇게 바울이 말했는데 로마서에서 하나님 아들의 복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한다. 연합해서 죽고 연합해서 산다. 죽는 것도 연합 없이는 죽을 수가 없고 사는 것도 연합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한다. 70년대 들어온 워치만니 사상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자아가 죽어야 된다는 고난에 빠져 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자아가 문제라는 것이다. 자아의 파쇄라는 말이 나오고 자아가 죽을 때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때 영향을 받았던 사람의 대부분 자아 문제로 고민한다. 자아가 죽어야 되는데 자아가 안 죽는다고 고민한다. 그러나 혼자 자아가 죽을 수가 없다. 자기 혼자 죽으려고 하니까 안 죽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다. 내가 내 속에 죽은 것을 발견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예수를 믿고 났더니 어떤 성질은 죽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 갖고 죽었다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어떤 성질이 죽은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죽은 것을 말한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고민하는 것은 도를 닦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나 하지 않는가? 유가에 가도 그렇고 불가에 가도 그렇다.
자아가 죽어야지, 자기를 포기해야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무엇인가가 돼보려고 하면 인간은 자기를 버려야 된다. 소인들은 자기를 버리는 것을 못한다. 소위 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버린 사람들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아무리 버려도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의만 남게 된다.
우리는 살아도 주와 함께, 죽어도 주와 함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기도 하고 주와 함께 살기도 한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왜냐하면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죽지 못하고, 사는 것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서 내 자신이 발견되는 것은 내 자아가 죽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내가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모르던 내가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한다. 좀 더 나아보려고 좀 더 사심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좀 더 주님만 위하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표준이 된다. 우리 앞에 간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을 했다면 그것을 본 받으려고 노력한다. 우리 앞서 간 어떤 사람이 자아를 버렸다면 우리도 자아를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참 모델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만들었던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는데 심히 좋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랐다. 그 사람을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 저 사람을 보고 심히 좋다고 하셨구나. 이것은 성격 문제도 아니고 수양 문제도 아니다. 기도를 해서 되는 문제도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니까 전혀 다른 문제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몰랐던 사람이다. 나는 몰랐던 나다. 나도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다.
예수 안에서 발견된 이 사람이 참 사람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 필요로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 아브라함부터 시작해보자. 아브라함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왔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따라 왔다. 그리고 네 자손을 이렇게 이렇게 많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10년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우리가 늦기 전에 하갈을 데려다가 아들을 낳아야겠구나. 이것이 하나님 뜻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하갈을 데려다가 아들을 낳은 것이 이스마엘이다. 이것이 영원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이것이 현실이다. 기독교 안에서 참 잘한다고 해놓은 일이 고칠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아브라함처럼 믿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한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했다고 한다.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했다. 그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그런 믿음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갖고 싶었던 믿음이다. 처음에는 길리운 엘리에셀이나 아들을 삼아달라고 했더니 아니다,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매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여겼다고 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한다면 완전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목표로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이스마엘이다.
나는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놀랬던 것이 지금까지 내가 해왔고 우리가 해왔던 것들이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것이 혼이 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후에 보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렇게 난리치고 하나님 일이 북적거리고 위대한 일이 벌어지던 모든 일들이 혼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여 뭔가를 성취했다고 한다. 선교도 기도를 해서 됐고, 기도를 해서 됐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사에서 내놓을 것이 있다면 그런 것 밖에 내놓을 것이 없다.
그것이 혼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 황당해졌다. 영으로 한 것과 혼으로 한 것이 갈라지지 않는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장로교의 이분법에 따라서 영혼과 육신으로 번역했다. 영혼이라는 번역 속에는 영이라는 말도 있고 혼이라는 말도 있다. 영어 성경에는 갈라져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두 가지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이분법으로 해석했다. 영혼이라는 둘이 붙어 있으니까 어느 것이 영이고 어느 것이 혼인 줄 모른다. 싸움이 나도 서로 다 영(성령)으로 한다고 하지 성령으로 안 한다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교단에 있는 사람들은 다 성령으로 한다고 한다.
상대방을 정죄하던 카톨릭 교황도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처형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령을 버리고 널 죽인다고 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어디를 가도 다 성령이다. 설교를 할 때도 내 모습은 감춰주시고 오직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이 말씀을 전달해 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하는 설교가 성령에 의해서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전달되고 있는 것인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인가? 기도한다고 영이 혼이 되겠는가? 혼이 영이 되겠는가? 기도한다고 개가 소가 되겠는가? 소가 개가 되겠는가? 안 될 일이다. 잘못 생각하면 막막해진다.
지금까지는 마음 가다듬고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심이 없이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영과 혼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뒤로 보면 어떤 일은 참 옳게 해놓았는데 뒤로 아주 시끄럽게 되는 일이 있고, 어떤 일은 아주 조용한 일이 있다.
경험해 보면 성령이 하신 일은 정말 깔끔하다. 전혀 후유증이 없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 들어간 일들은 반드시 후유증이 생기게 된다. 내가 해보았다. 잘한다고 했는데 후유증이 생겼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내가 옳게 했는데 왜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내 혼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싸우면서 양쪽이 다 성령으로 한다고 했다. 악령이라고 하는 데가 누가 있는가? 아무데도 없다. 4년 동안 싸우면서 쌍방이 똑같이 기도했다. 결과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이 행하도록 기도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성령으로 행한 것도 아니고, 영으로 행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혼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리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분이 책을 쓸 때 뒤로 알았는데 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그때는 약이 없을 때니까 마지막에 그것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가지고 피를 토하면서 그 책을 썼다고 한다.
밑에 방에서는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고 이분이 가슴이 아프니까 책상 앞에 베개를 대놓고 원고를 썼다고 한다. 원고를 탈고 하고 내려왔는데 죽지 않고 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급하게 동지들이 돈을 모아서 책을 그가 살아있을 때 출판해야겠다고 출판을 했는데, 살고 난 다음에 회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기로는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다 혼란에 빠진다.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했더니 전부 의문만 많아졌다. 맨날 어디까지가 혼이고 어디까지 영인지를 질문했다. 나는 읽을 때 뭔가 다르다는 생각만 했지 어디까지가 혼이고 어디까지 영인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학생들이 읽으니까 그렇게 되었다. 하도 어떤 사람이 질문을 갖고 오길래 질문이 많이 생기면 읽지 말라고 했다. 소화불량이다.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는데, 지식으로 다 취하려고 하니까 배탈이 난 것이다. 그래서 읽어 보았자 유익이 없으니까 읽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유익이 컸다. 어떻게 한 것은 영으로 한 것이고 어떻게 한 것은 혼으로 한 것인지 세부적인 것은 모르겠지만 둘이 다르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일이었다.
영과 혼을 가르지 않고 붙여놓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 때문에 혼란이 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운지 모른다.
영과 혼은 서로 다르다. 이것도 연합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 갖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영으로만 산다는 사람도 접촉해 보았는데, 그것도 진짜가 안 되었다. 영혼이 없다는 것도 진짜가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사람이 안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안 되었는데 기술적으로 그것을 분리해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것을 갈라내겠는가? 개는 어차피 짖는 것이고, 소는 어차피 풀을 뜯어 먹는 것이다. 소가 기도한다고 해서 짖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가 기도한다고 해서 풀을 뜯어 먹고 사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생명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구별해서 혼으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할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넘어갔기 때문에 나는 별로 고민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별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책 때문에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에 그 책을 출판 금지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우선 혼란되어 있지 않고 아주 명백하다. 연합이라고 하는 이 중심선을 가지고 일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연합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옳기만 하면 되는 줄로 생각했다. 나도 합리적인 성격이니까 옳기만 하면 되는 줄로 생각했다. 누가 와서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해도 정말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냥 듣고 만다. 저 사람이 나한테 뭔가 꼼수가 있어서 왔다는 것을 알아도 워낙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듣는다. 나는 감정에는 별로 속지 않는데, 합리적일 데는 속기가 쉬운 사람이다.
감정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연합이 안 되는 것은 다 헛일이다. 이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는가? 교회에서 알 수 있다. 다른 데서는 다 모른다. 내가 고아원을 경영한다고 해도 모른다. 내가 선교사업을 해도 모른다. 교회에서만 알 수 있다. 연합이 되는가 안 되는가? 연합이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륜은 전부 교회 안에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교회 안에서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밖에서는 해석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연합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결혼이 근본이다. 결혼을 한국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은 인간대사라고 한다. 인생은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마친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연합으로 시작해서 계시록 마지막에서 연합으로 마침이 된다. 가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아직도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가정이 깨지고 나면 개판이 되고 말 것이다.
교회들은 모두 연합을 기준으로 해야 된다. 목사가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졌으면 들을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들을 사람이 없고 혼자면 뭐 하겠는가? 아무리 내가 좋은 것을 가졌어도 들을 사람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어떤 목사는 강대상만 갖다 놓고 교회를 시작하는 목사도 있는데 무슨 믿음으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강대상을 갖다 놓았다고 교회가 되겠는가?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
옳고 그른 것,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 이런 모든 문제는 연합으로 계산해보아야 된다. 계산할 때 연합이 되면 맞는 길이고, 연합이 안 되면 옳은 길이 아니고 잘못 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첫째로 일어난 증상이 분열이다. 당신이 만들어 준 저 하와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했다. 벌써 분열되었다. 또 만물과 분열된다. 하와에게 왜 먹었느냐고 하니까 당신이 만들어놓은 뱀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했다. 다음 단계로 가면 가인과 아벨이다. 왜 아우를 죽였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했다. 다 이렇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첫째는 분열이다. 분열이 되면 무엇이라도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옳은 일을 했어도 분열이 되면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분열해서 서로 견제하고 경계하면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낫다. 일당독재보다 양당제나 다당제를 해서 서로 견제하고 다투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되어 버리니까 그것이라도 해서 가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어려운 것이 연합이다. 정치도 연합을 목표로 한 것인데 어려운 것이다. 통치는 쉽지만 정치는 어렵다고 한다. 통치는 김정은 식으로 하면 되니까 어려운 것이 없다. 김정은 식으로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
교회도 통치를 하려면 쉽다. 그런데 교회는 통치를 하면 안 되고, 연합을 해야 된다. 그렇다고 정치를 하겠는가? 정치로 연합이 되겠는가? 교회는 생명의 연합이다.
아담에게 생물을 이끌어 오니까 이름한 바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라고 되어있다. 그 사이에 그렇지만 이름을 주어서 다 이름을 주었지만 배필이라는 이름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로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하와를 지었다는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해놓고 바로 하와를 지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지은 피조물들을 이름을 지으라고 아담에게 이끌어왔다고 한다. 말이 다른 것 같다. 말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배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도 있고 개도 있고 모든 만물이 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필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고 했다. 이것은 한 생명이 아니면 연합이 안 된다는 뜻이다.
생명이 아닌 것이 연합된 것은 정치적인 연합이다. 미국이 정치적인 연합체다. 합중국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연합국가를 만든 것이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떤 정치학도가 하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이 정치와 협상이라고 한다. 미국은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만들어진 나라이다. 민족도 아니고 땅도 아니고 이해관계 때문이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자유라고 하는 한 가지 목표 때문이다. 그렇게 연합된 나라이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다른 나라들은 민족이나 그런 것들인데 미국은 민족이 원인이 되어 있지 않고, 자유라고 하는 이해관계가 원인이 되어서 나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파괴할 나라가 없다.
옛날에 냉전시대에 누군가가 설사 소련의 병력이 훨씬 강해서(그때 소련 인공위성이 먼저 올라 갈 때임) 누가 미국을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점령할 수 없는 나라라고 했다. 국민 자체가 모두 군대이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인 나라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가 와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강국이다. 어떤 나라는 폭탄으로 점령할 수가 있다. 미국은 폭탄으로 점령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이 연합체다. 이렇게 정치적인 연합을 하기는 어렵다.
생명의 연합! 하나님 경륜의 중심은 생명의 연합이다.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 다른 만물들이 다 있었는데 아담의 생명이 아니어서 하와가 될 수 없었다. 이름을 다 주어서 이름한 바가 이름한 대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다 된 것인데 아담을 눕혀놓고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고 한다. 왜? 배필이 없으니까. 그 사이에 그 뜻을 넣으면 해석이 된다. 이름 한 바가 이름한 바가 되었더라. 그러나 배필이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고 해야 말이 맞는다.
교회도 아무리 연합하려고 노력해도 안 된다. 목사 중에도 정치를 잘하는 사람도 있어서 잘 구슬려 가는 사람도 있지만 목사가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교도 잘해야 되고 정치도 잘해야 되고 심방도 잘해야 되고 기도도 잘해야 되고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잘하는데 정치를 못하면 큰 교회를 못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는 참 잘하는데 설교가 시원찮으면 그래도 큰 교회가 안 된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갖추어야 된다. 예술이 종합예술이듯이 이것은 종합적인 것이다. 알고 보면 인간경영이기 때문에 가장 어렵다.
참 교회는 그런 기술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연합의 문제이다. 예수님이 기술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한 생명! 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한 생명 때문이다. 그 안에서 밖에는 우리가 한 생명으로 만날 수 없다. 거기서 밖에는 우리가 한 생명이 될 자리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 코스가 있어야 된다.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없이는 기술이 되고 만다. 십자가에서 새로워진, 십자가 안에서 다시 난 그 생명이 없으면 다 기술자가 된다. 기술 좋은 사람이 목회도 잘한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목회도 성공한다.
교회는 그런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한 생명의 연합체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된, 그 사람들의 연합체이다. 거기서 하나만 되면 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생명이 하나이면 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산에 많은 짐승들을 풀어놓으면 다 각기 자기대로 무리를 지어서 간다. 개는 개대로, 소는 소대로, 말은 말대로 무리를 지어서 간다. 누가 정치를 하는가? 정치를 하지 않아도 그렇다. 바닷가에 가면 아주 신기한 광경이 있다. 물에 해조류가 방석처럼 크게 뭉쳐있는 것이 보이고 움직인다. 뭔가 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잔잔한 물고기 새끼이다. 이제 나온 물고기 새끼가 흩어지지 않고 한 데로 뭉쳐있으니까 바깥에서는 크게 보인다. 그래서 감히 누가 대들지 못하는 것이다.
일부러 내가 갈라보았더니 금새 다시 모인다. 한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신기했다. 처음에 다시마 같은 것이 널려있는가 했더니 물고기 새끼이다. 큰 물고기가 되면 따로 따로 놀지만 새끼 때는 죽지 않으려고 뭉쳐있다. 생명은 신기하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새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려고! 이것은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인가? 교회를 목표로 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어떻게 새로운 생명 가운데로 들어가는가를 목표로 말하고 있다면, 에베소서에서는 그 생명이 무엇이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창세 전에 미리 예정한 것이라고 한다. 에베소서를 읽으면 맨 처음에 창세 전에 교회는 미리 예정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창세 이후에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교회가 되었는데, 에베소서는 그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연합한 생명체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온 대로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부터 시작해서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로 완성된다. 교회는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었다. 교회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예정된 것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것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기 위해서다. 죽기도 내 마음대로 죽지 못하고, 살기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 나 혼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다. 죽어도 잘못 죽은 것이 되어버리고, 살아도 잘못 산 것이 되기 때문에 나는 예수와 합한 자리로 참으로 죽고 참으로 다시 살아난다.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하는 분 안에서 내가 동일시 된다. 뛰어내리지 못한 분 안에서 내가 동일시 된다. 그 외는 동일시 될 곳이 없다.
내가 기도한다고 동일시 되겠는가? 금식한다고 동일시 되겠는가? 버려지신 그 자리가 아니면 나는 절대로 동일시될 수가 없다. 하나된 것을 느껴보려고 기도를 해도 안 되었다. 뭔가 좀 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안 되었다. 기도를 하다 보면 뭔가가 가까워진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입신을 하는 것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나는 해보아도 안 되었다.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지 않으면, 나는 예수와 하나될 자격이 없다. 절대로 안 된다. 내가 단언하건 데 안 된다. 다른 데서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것은 다 순간적인 환상 같은 것이다. 예수를 잠깐 만나면 뭣 하는가? 함께 살아야 될 것 아닌가. 내가 누구보다 더 많이 알아서가 아니고, 이것은 작은 경험이지만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내가 그분과 하나될 수 없다. 예수를 어디서 발견해야 되겠는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신 그 자리에서 내가 동일시가 되겠는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자리에서 내가 그분과 동일시가 되겠는가? 그것을 해보려고 하면 얼마나 힘 들겠는가? 사람들이 그런 것을 통해서 느끼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기적이 일어나면 예수님과 동일시 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지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진만 다 뺀다. 엉뚱한 곳에 힘을 다 쓰게 한다. 진짜로 힘 쓸 데는 따로 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려고 한 것인데, 거기는 통과하지 않겠다고 엉뚱한 곳에 인생을 허비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을 불렀다가 자기도 못 가고 남도 못 가게 한다. 사람 하나를 얻기 위해서 온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얻으면 다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는데 이상한 말이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데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고 허망하다. 내가 8년동안 다른 교회에서 목회를 했었는데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우리가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길은 딱 한 군데 밖에 없다. 주님과 내가 만나고, 나와 형제가 만나고, 한 자리에서 만나야 연합이 된다. 연합하기 위해서 한 생명으로 만나지는 자리는 딱 한 군데 밖에 없다. 그것을 떠나면 절대로 다른 자리에서는 하나될 수 없다고 내가 단언하는 바이다. 아멘 하는가? 요즘 목사님들이 ‘아멘 하십니까?’하고 잘 물어보는 것 같다. 이것은 내 믿음일 뿐만 아니고 너무나 확실한 일이다. 절대로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해보시고 만일 되면 나한테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른 길은 절대로 안 된다.
너무 쉬운 길이다. 예수만 보면 너무 쉬운 길이다.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길이다. 믿음의 천재가 따로 있는가? 천재된 기독교인이 따로 있는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을 천재들의 전유물로 만들어놓았다. 우리가 알았던 유명한 분들은 다 천재들이다. 그분들을 따라 가려고 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제명에 못 살았을 것 같다. 이 짧은 명에 제대로 못 살았을 것 같다.
너무 쉬운 길이고 너무 단순한 길인데, 너무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요즘 우리 고등학생들을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인 누구인 줄 아는가? 다 천재들이다. 자기들은 잘하니까 계속 어렵게 만들어놓는 것이다. 아이들은 죽을 지경이다. 아이들은 쓰잘데 없는 공부만 하고 있다. 대학교에 가도 별 필요가 없는 공부를 하고 있다. 대학교에 꼭 필요한 공부만 해도 되는데, 시험에 떨어지게 하려고 하니까 점점 어렵게 만든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면 옛날에는 단순하게 물었다. 무슨 불이 켜지면 가냐고 물었는데, 내가 시험을 볼 때,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니까 이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냐고 배배 꼬아서 물었다. 우리 시대는 그런 것이 없는 시대니까 면허시험 책을 보는 것 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문제집 하나를 사왔는데 두꺼워서 한 페이지를 보고 나니까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떨어지려면 떨어지라 하고 못하겠다고 덮어버리고 다음날 면허시험을 보러 했다. 운전은 안 했지만 한 20년을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유심히 보았었다. 대략 상식적인 선에서 시험을 보았다. 50~60분 시간을 주는데 30분을 보고 나니까 더 할 것이 없었다.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니까 제일 먼저 끝내고 나와버렸다. 발표를 보니까 합격점수보다 3점을 더 맞아서 합격했다. 어떤 사람은 100점 맞아서 합격했다. 100점을 쉽게 받았겠는가? 몇 번을 읽어야 100점을 받았을 텐데 100점을 받은 사람이 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것은 별로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커트라인만 넘으면 되기 때문이다. 100점 받는다고 상도 주지 않고, 면허증을 금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천재들이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나 같은 종교적인 둔재가 나와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내가 평안을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헛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예수만 확실하게 보면 된다. 나도 무거운 짐을 지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남에게도 무거운 짐을 주기 싫다. 어떻게 하면 쉽게 갈까를 생각한다.
선생님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은 선생님을 못한다. 이것도 모르냐, 이것도 못하냐 한다. IQ가 중간쯤 되어서 자기가 고생도 해 보아야 선생을 하지 너무 천재적인 사람은 아이들이 답답해서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런데 머리가 둔한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지를 이해를 한다. 그런 사람이 선생이 딱 맞다.
목사도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천재는 목사를 하면 안 된다. 혼자 기도나 해야 되지 목사를 하면 사람들을 다 버린다. 고생만 시킨다.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니까 목숨을 내놓고 설교를 하신다. 매주 그렇게 설교를 짧게 하는 것도 아니고 1시간씩 하고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빼빼한 분이다. 사람도 엄청나게 모였다. 목숨 걸고 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설교를 하다가 쓰러질 것 같다. 사람들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런 데를 따라 다니면 힘들다. 목사가 그렇게 힘든데 신자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가 쉬워야 남도 쉽게 하는 것이지 내가 어려우면 남도 어렵게 하는 법이다.
시집살이를 어렵게 한 사람이 며느리 시집살이를 어렵게 시킨다. 쉽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왜 저 모양이냐, 나는 시집살이를 어렵게 했는데, 저게 뭐냐고 생각한다. 시집살이를 어렵게 한 시어머니 밑에 시집 가면 되게 고생하게 된다. 시집살이를 편하게 한 시어머리라야 며느리도 편하게 해준다.
목사는 종교적인 천재가 하면 안 된다. 신학을 하는 신학자가 되든지 기도원 원장이 되든지 해야지 목회를 하면 안 된다. 여러분 중에 혹시 천재가 있으면 사표 내고 나가서 기도원을 하든지 해야 된다. 신자들을 고생시킨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어렵게 하시겠는가? 운전면허를 다 합격을 시키려면 무엇하러 문제를 어렵게 만들겠는가? 항상 몇 %를 떨어뜨려야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한꺼번에 면허를 다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면허 시험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간단하게 내었다. 지금은 지원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면허를 한꺼번에 주면 안 되니까 제한을 하는 것이다. 제한하기 위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종교적인 난점은 바로 천재들이 너무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천재들을 부러워하여 천재들을 따라 가려고 생각하니까 안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40일 금식기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밑에 있으면 신자들이 금식기도 하지 않고 되겠는가? 목사가 40일 금식기도를 3번이나 하는데 신자들이 나는 모르겠다. 밥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시늉이라도 내보아야 한다. 사람들을 헛된 일에 고생시킨다. 자기 혼자 몰래 할 일이지 나는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을 광고하고 가면 사람들이 다 괴로운 것이다. 여기 오신 분 중에는 그렇게 해보신 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보신 분들은 여기에 오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은 민족연합국가이다. 한 민족이기 때문에 연합된 국가이다. 교회는 한 생명이기 때문에 연합된 국가이다. 다른 이유, 교리로 연합된다거나 제도로 연합된 것은 교회가 아니다. 한 생명이기 때문에 연합된 것이 교회이다. 미국은 한 자유 때문에 이민족이 연합된 국가이다. 교회는 한 생명의 연합체이다. 새 예루살렘은 교회의 발전이다. 교회의 성숙으로 새 예루살렘이 된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