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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교회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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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성육신과 교회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정리를 해보자. 지난번에 교회가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로마서는 인간의 어떤 상태로부터 시작해서 차차 변화되어서 교회로 올라가는 과정을 로마서에서 말했다면 에베소서는 하늘로부터 예정된 교회를 이야기를 했다. 미리 벌써 예정된 것으로 사람이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는 교회가 있었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땅에서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데, 그와 상관없이 원래 계획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땅에 형편은 늘 달라지기 때문에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때도 있고, 길을 잘못 갈수도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당하고 있는 현실은 교회가 제대로 못 갔다는 것이 문제이고, 또 인간도 못 갔다는 이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만일에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일이라면 난감한 것이다. 그런데 왜 희망이 있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언제든지 어떤 경우에도 다시 복귀할 수가 있다. 새로워질 수가 있다. 사람으로 시작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희망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언제라도 희망이 있다.
“보기에 좋다.”고 시작했으면 그것은 그대로 유효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또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으면 설사 사람이 빗나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보고 희망이 있다 없다고 하면 지금 인류 역사를 본 사람들이 한때는 희망이 있다고 했다가 18세기 19세기에 오면서 인류는 희망이 없다고 하게 되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때는 희망이 있어 보이고 어느 때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괜찮아 질 것 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음에 가면 나빠져 버릴 수도 있고 저런 사람은 도저히 안 되겠는데 했는데 어느 날 가면 새로워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기준을 두면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보면 버림받을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어떤 형제와 이야기를 하면 늘 하는 말이 그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불러서 온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뭐가 잘 안될 때 그 이야기를 한다. 너는 하나님이 불러서 온 사람이니까 사람의 생각대로라면 절망이고 안 되지만 하나님이 너를 불러서 왔으니까 절망할 수가 없다. 나도 너를 포기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불러 왔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포기하겠느냐는 이야기를 몇 번 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봐서 그렇다. 나의 어떤 것을 본다면 안 될 일도 있고 될 일도 있고 그리고 구제불능일 때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하나님이니까 후회할 일을 안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후회할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후회할 일을 안 하신다. 한번 불렀으면 후회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른 것이니까 나는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면 이상하지만 안심이 된다. 내가 부름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안심해도 된다.
그렇다고 일부러 잘못하는 것은 없으니까 최선을 다하는데 하다보면 잘못된 것이니까, 누가 일부러 ‘에이 뭐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지.’ 하고 생각하고 잘못하는 사람은 없다. 다 최선을 다하는데 잘못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후회 없이 부르신 이 앞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내 일생을 돌아보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완전히 폭삭 망할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나를 구원해주신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이 그분의 부르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불러 놓았는데 잘못되면 누가 창피한 것인가. 부르신 이가 창피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래서 나를 구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이름이 온전하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 하다가 말면 누가 하나님을 신실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배짱 좋은 소리 같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그것이 안심하게 해주고 당당하게 해주고 안심하게 해주고 좌절하지 않게 해주고 하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교회라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 안에 있는 교회는 빗가가 버릴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늘 생명의 계시가 왔었다. 표면에 흐르는 강물을 보면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다보면 더러워지고 녹조가 끼기도 하고 그런데 물이 땅속에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고 어디서 솟아날지 모르는데 다시 솟아날 때가 있는데 그 물이 항상 깨끗하다. 강을 지다나보면 물이 굉장히 많았는데 바짝 말라서 이 강이 그 강인가 싶을 때가 있고 모래나 조금 있고 물이 조금 있고 한 곳인데 거기는 밑으로 물이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솟아날 때는 다시 맑은 물이 되어서 솟아난다. 이것이 생수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축복이다. 칼빈주의에서는 예정설을 믿는데 그것을 교리적으로 믿으면 모순이 굉장히 많다. 내가 대구에 와서 학교에 나가니 학생들이 제일 많이 묻는 질문이 ‘예정설을 믿습니까?’가 제일 많았다. 자꾸 많이 물으니까 여기가 장로교가 굉장히 센 곳이구나 하고 대번에 느끼겠더라. 묻는 질문의 대부분이 예정론을 물었다.
그렇게 알아서는 소용이 없고 논란만 된다면 믿는 사람과 멸망 받을 사람을 예정해 놓았으면 전도를 뭐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래서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묻는다.
그래서 내가 예정론이 있다고 해서 어떤 사람 이마에 멸망 받을 사람이라고 써있는 것이 있느냐? 없으니까 무조건 전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더라. 무엇이든지 교리로 받아버리면 죽음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아버린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 경험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안 버리시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그분의 부르심 때문에 그렇구나, 자기 약속을 지키려고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도 좋지만 나를 위해서 인도하신다고 하면 가다가 보면 하나님도 버리고 싶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 이름이 손상을 받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교회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은 너무 놀라운 계시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사람을 모아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에클레시아니까 불러 모은다는 것이다. 옛날에 동네에서 회의 할 것이 있으면 동네 이장이 징을 들고 다니면서 동네에 두드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모인다. 사람을 모으는 것, 그런 현상을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희랍에서는 공원에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서 모이는 것이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예배소서는 그 말이 아니고 교회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하늘에서 미리 예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볼 때도 하나님이 이런 것을 예정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교회를 하늘에서 예정한 것이라고 우리가 보고 교회를 보면 훨씬 다르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지어졌다고 보면 사람이 다르다. 아메바 출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말인가? 아메바의 후손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그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간이 선택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다. 다른 것도 많은데 이렇게 좋은 복음이 있는데 하나님이 선택했다는데, 하나님이 계획했다는데, 그것을 버리고 아메바의 새끼라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저주인가. 스스로 저주를 선택한 것이다. 오른 손에 축복이 왼손에 저주가 있는데 자기 선택에 달렸다.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저주 받을 것을 스스로 택한 사람이다. 그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나는 혹시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러라도 거부하고 싶다. 내가 저주받을 일을 왜 선택을 하겠는가? 억지로 갖다 맡긴 것도 아닌데 좋은 것이 많은데 뷔페식당에 가서 싱싱하고 좋은 음식이 많은데 하필이면 나쁜 것을 골라 먹어서 배탈이 날 일이 뭐가 있는가? 누가 먹으라 했는가.
나는 인생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누가 억지로 먹으라고 집어넣는 것은 없다. 감옥에 가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는 그런 경우는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생명과와 선악과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어 놓은 모든 세계에 대해서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느 정도 있다. 축복을 선택하느냐 저주를 선택하느냐는 내 책임이지 하나님 책임이 아닌데, 내가 비록 저주의 길을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왜 버리지 않는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분명히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내게 책임을 묻지 않고 나를 다시 구원한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 때문에 자기 이름 때문이다.
하나님은 명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명예 빼 놓으면 아무것도 없다. 자기 명예에 손상이 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또 쫓아다니고 또 쫒아 다니고 야곱이 그렇게 간사했지만 여호와께서 떠나지 않고 계속 뒤를 추적했다. 그것은 약속한 자기 이름 때문에 자기 명예 때문에 어쩌면 자기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야곱을 따라 다닌 것이다.
교회는 하늘에서 정해진 것이다. 어떻게 시행되었는가를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해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예정했던 것을 풀어나가는 차차 풀어가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과정에서 전해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두 가지로 보도했다. 하나는 성령으로 잉태해서 왔다고 이렇게 보도하고, 한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보도 했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왔다는 말은 좀 신비롭고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 같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말도 물론 어려운 말이지만 어떻게 하면 이해될 것 같은 말이 이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사람들이 더 쉽다고 생각을 한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이것은 믿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면 뭔가 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으면 뭔가 좀 쉬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러분도 뭔가 좀 쉬운 것 같고 영어도 좀 쉽다. 그런데 아주 깊은 데가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회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성육신에서부터 왔다. 교회가 그냥 온 것이 아니고 성육신 하신 그분으로 인해서 교회가 왔다. 교회의 재료는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인해서 교회가 생겼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됨이 없이는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면 그것만 믿으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쳐다만 보고 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어떤 재료로 인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재료가 되는 것은 다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재료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인격이 바로 재료다. 교회의 재료다.
이 재료를 위해서 예수님은 씨가 된 것이다. 첫 열매가 된 것이다.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다음 열매가 많이 열린다. 나무를 보니까 그렇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심어보면 첫해에는 열매가 두세 개 열릴까 말까한다. 그 다음해는 한 오십 개 열린다. 그 다음해에는 백 개 이백 개 열린다. 엄청나게 달라져버린다. 하나가 그렇게 많아지는 것이다.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하나이다. 하나가 많아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아도 도로 하나이다. 그래서 사과나무가 되고 감나무가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서 그를 통해서 성육신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기둥도 되고 석가래도 되고 들보도 되는 것이다. 교회의 재료는 성육신이다. 성육신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성육신 없이 된 교회는 그냥 뭐 해서 교회를 모아 놓았다고 해도 그것은 재료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라고 할 수도 없고 교회가 될 수도 없다.
구약과 신약을 생각해보면 구약의 중심은 성막이고, 신약의 중심은 성육신이다. 구약은 모세가 산에서 돌판을 받아온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돌판은 성막의 중심이니까 성막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돌판이 성막이 되는데 이것은 모세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의 심장인 돌판을 받아왔다. 아들의 심장인 돌판을 받아왔다는 말이 된다. 이 돌판은 배치하기 위해서 안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성막이다. 이 돌판 때문에 성막이 있는 것이다.
이 성막은 모두가 다 재료 자체가 돌판의 원리로 된 것이다. 전부다 조각목에 금을 입혔거나 구리를 입혔거나 은을 입혔거나 이렇게 된 것이다. 속에는 다 나무이다. 겉에만 금이 입혀지기도 하고 구리가 입혀지기도 하고 은이 입혀지기도 한다. 그러면 겉으로 보면 금이고 은이고 그렇다. 그 금과 은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속에 있는 나무다. 그리고 그 형태를 갖추어주는 것도 역시 나무다. 그래서 둥그런 금 기둥 속에는 둥그런 나무가 들었다. 네모난 금 기둥 속에는 네모난 나무가 들었다. 금 판자 속에는 나무판자가 들었다. 따로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다.
시은소에 법궤 그것만 금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 이 두 가지로 연합해서 되어 있다. 나무가 없으면 금은 그냥 힘이 없다.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금이 없으면 나무는 또 쓸모없어진다. 둘이 연합해서 성막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예수님 육신이나 우리 육신이나 육신은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틀린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느냐 선악과가 육신이 되었느냐, 그 차이이다. 육신은 같다. 그러니까 구약은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을 준 것으로부터 시작하니까 그 율법의 핵심은 성막이다. 성막의 핵심은 돌판이다. 돌판의 핵심은 무엇인가? 돌에 말씀을 새겼다는 말이다. 그냥 맨 돌판이 아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졌다.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만들어 졌다.
애굽에서 나와서 갈 때도 이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행진을 했다. 바로가 무엇 때문에 나가려고 하느냐 물었더니 모세가 하는 말이 한 사흘 길쯤 나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는 아무데서나 못하는가 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아무데서나 제사를 못 드린다. 그래서 이제 나오겠다고 흥정을 했던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나왔다는 말이 된다.
출애굽은 목표점은 땅으로 말하면 가나안 땅이다. 그런데 중심은 무엇인가? 성막이다. 성막 없이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애굽에 있으나 광야에 있으나 가나안 땅에 있으나 매 마찬가지이다. 일반 역사 같으면 애굽이라는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 하던 곳에서 자유국가로 간다는 것이 되겠지만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성막의 이동이다. 하나님 섬김의 이동이다. 결국 애굽에서는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 거기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나가야 되겠다는 것이다. 목표는 제사다. 성막이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성막을 건축하게 된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절반이 성막건축으로 되어 있다. 다른 것은 다 왔다 갔다 하는 일이고 중대한 일은 성막을 건축한 일이다. 이것을 확대하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확대하지 못하고 망한 것이다. 그래서 성막은 없어지고 성전은 없어지고 이방인이 세운 엉터리 같은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은 성전이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땅에 계실수가 없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 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여 이 말은 못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왜? 땅에는 없으니까. 왜 없는가? 성막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 분이니까 어디든지 있다고 하는데 이 말과는 좀 다른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집에 있어야 된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자기 집에 있는 분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물론 우리가 못 만나는 하나님이야 구천에 있어도 상관이 없겠지만 인간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그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성전 안에 있다.
하나님의 거처라는 의미에서는 성막이고 만난다는 의미에서는 회막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난다는 입장에서는 회막이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입장에서는 성막이고 이름이 두 가지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려고 해도 성막으로 가야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려고 해도 성막에서 만나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엄중한 벌은 성막을 떠나서 다른데 가서 예배하는 것이다. 단 자손이 그랬다. 단 지파에서 멀다는 핑계로 자기들이 있는 곳에 성전을 세우고 경배를 했다가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 계신 곳을 놔두고 또 다른데 가서 경배를 했다.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이방인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거하실 곳에 거하신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정확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확실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거하는 곳이 없는 하나님은 우리가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만난 것이나 똑같다. 구름이 스쳐간 것이나 똑같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은 우리가 늘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바람한번 스쳐간 것이나 똑같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남에 있어서 안정되려면 성막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하더라도 안정이 되려면 성막이 있어야 한다. 그 무소부재 하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꼭 거하실 곳에 거하시는 분이다.
이것을 알아야 왜 말씀이 예수 안에서 성육신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무소부재하시고 아무데나 계신다면 하필이면 성육신 하실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방인들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예배해도 되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경배해도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꼭 정해진 곳에서 그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했고, 꼭 정해진 곳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 성육신이 되신 것이다. 꼭 그 예수가 아니면 교회가 안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은 신약에 와서는 교회가 된다. 그러면 성전의 중심, 생명이 아까 말한 돌판이었다. 말씀이 돌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면 신약 교회의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돌비나 예수나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인격화 된 것이고, 구약은 돌이 된 것이고 그 차이이다. 구약은 상징적이고 형상이지만 신약은 실재다. 돌비에 새겨진 말씀은 심비에 새겨진 말씀이 된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심비에 새겨졌다. 먹으로 종이에 쓴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심비에 영에 심비에 새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이것이 교회의 재료이다. 우리가 어떤 모양이 되었던지 둥근 기둥이 될는지 네모난 기둥이 될는지 네모 판자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이 성육신을 통해서 교회는 이루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통해서 이루어졌듯이 교회는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성육신이라는 씨가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이 시대는 이런 교회가 필요하다. 저 시대는 저런 교회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이 있는데 외모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심장까지 바꿀 수는 없다. 옷은 바꿀 수 있지만 염통을 빼서 바꿀 수는 없다. 교회의 심장은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를 빼놓고 어떻게 시대에 맞춘 교회가 나오겠는가? 인간의 형편에 맞추다보니까 교회가 뭐가 됐는가? 국교가 됐다. 인간의 형편에 맞추다보니까 국교가 되었으니까 얼마나 편리한가.
황제가 와서 예수를 경배한다고 하니까 예수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너무너무 쉬웠고 자랑스럽고 거리낄 것이 없고 참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변질의 길이었다. 잘못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외모만 바꿔진 것이니까 속은 없고 심장은 없고 몸뚱이만 있는 것이나 똑같다.
요즘에 사망진단을 하는데 심장을 가지고 진단을 하느냐 뇌를 가지고 진단을 하느냐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뇌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심장이 죽으면 죽은 것이다. 결국 죽는다. 시간 차 일 뿐이지 심장이 없는 뇌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뇌 없는 심장은 있다. 하지만 심장 없는 뇌는 없다. 식물인간을 보면 머리는 이상하지만 머리는 인식이 안 되지만 심장은 계속 뛰고 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이 생물로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장이 안 뛰는데 뇌만 살아있을 수는 없다.
한방에서는 심장을 일신제군주라고 한다. 우리 몸의 군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적으로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뇌사냐 심장사냐 이렇게 판단할 뿐이지 실제로는 심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그 말은 성육신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돌판 없이는 성막이 안 된다. 한 때 그런 성전이 있었다. 법궤가 없어진 성전, 법궤를 잃어버린 성전도 있었다. 그것은 죽은 성전이다. 법궤를 잃어버린 성전, 그 법궤는 잃어버려서 잠시 하늘로 갔던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가 법궤를 잃어버리면 그런 식이 되는 것이다. 몸뚱이만 있는 것이 된다.
성육신! 이것이 신약이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2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신약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이 성육신에 대한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성취가 교회가 된 것이다. 그 성육신을 증명할 곳은 교회밖에 없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데 이야기를 잘못 해석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한다.
아담은 무엇인가? 선악과로 성육신된 사람이다. 아담은 선악과로 성육신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선악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선악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선악과 자체가 되었다. 무엇을 해도 선악과가 없이는 안 된다. 선 아니면 악이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은 없다. 생명 외에는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다. 아주 평범한 말이다.
선악과로 생명이 되었는데 말씀이 생명이 안 되겠는가. 만일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더라면 생명나무 열매로 육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나무 열매를 안 먹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래서 선악과로 성육신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봐도 다 성육신이 기초가 되어 있다. 무엇을 해도 그렇고 무엇을 봐도 그렇고 무엇을 판단해도 전부가 다 성육신이 기초가 되어 있다. 선악과로 성육신이 된 그것이 기초가 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막을 길이 없다. 죽지 않고는 안 끝난다. 고칠 길이 없다. 고칠 수 없는 일을 바라고 있다. 성육신되었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다. 배운 것은 고칠 수가 있다. 그런데 배운 것이 아니다. 먹었다. 그러니까 고칠 수가 없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배운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다 잃어버린다. 열여덟 살 때 정신대에 잡혀가서 육십 몇 세인가 칠십 몇 세인가 돌아왔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다. 18세까지는 한국말을 다 했는데 몇 십 년을 안 쓰니까 다 잊어버리고 못하는 것이다. 말은 배운 것이기 때문에 잊어버린다. 교육 받은 것은 오래되면 잊어버린다. 그런데 육신이 된 것은 안 잊어버린다. 잊어버릴 수가 없다. 공부한 것은 잊어버리는데 물 위에 한번 떠본 것은 아무리 수영을 하다가 안 해도 다시 하며 뜬다. 그것이 육신이 되어서 몸으로 배운 것은 안 잊어버린다. 그런데 머리로 배워놓은 것은 잊어버린다.
선악과는 몸으로 먹었다. 그러니까 잊어버리지 않고 고쳐지지도 않고 수술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된다. 결국 죽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보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참을 몰랐다. 진실을 모른다. 왜? 선악과 때문에 못 본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선악과로 보는 예수는 없어져 버리니까 그래서 참 예수가 보인 것이다. 능력도 지식도 지혜도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다. 그때서야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인 것이다. 그전까지 안 예수는 참으로 안 것이 못된다. 거죽만 아는 것이다.
예수는 누구를 대표해서 죽은 것인가? 아담을 대표해서 죽은 것이다. 아담은 두 아들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 중에서 가인은 이미 벌써 바벨로 가버렸고 아벨만 죽어서 아벨 대신에 셋을 줬다고 한다. 그런데 셋으로도 안됐다. 셋으로도 안 된다. 마지막 셋을 마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했다. 전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제단아래에서 계속 신음을 하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신원하는 것이다. 그 억울하다는 것을 끝내려면 완전한 사람이 죽어야 되는 것이다.
아벨이 그러지 않겠는가?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죽어야 됩니까? 그런데 예수가 죽음으로써 아벨의 신원하는 피가 그쳤다. 왜냐하면 아벨이 말하는 피보다 더 나은 피라는 것이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라는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피인가? 아벨의 피는 억울한 피고, 예수의 피는 그 억울함을 다 씻어버린 피다. 그래서 예수가 죽어야만 우리 인생이 끝난다. 내 인생이 끝난다.
예수 죽은 것을 봐야 선악과를 먹은 내 인생이 끝난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이 안 보인다. 항상 선과 악이 보이지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려면 나무가 원하는 대로 깎아져야 한다. 내가 뭐 네모가 되고 싶다고 해서 네모가 되겠는가? 원기둥이 되고 싶다고 원기둥이 되겠으며 판자가 되고 싶다고 판자가 되겠는가? 필요한 대로 깎아져야 된다. 필요한 대로 깎아지면 거기에 금을 입히는 것이다. 그래야 성육신이 된다.
이 성육신은 신약의 중심이다. 참 인격이다. 이 인격을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받아서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다. 사역하는 것이다. 그 인격 속에 하나님의 어떠함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인격을 풀어내면 하나님의 어떠함이 풀어내어지는 것이다. 사역이 되는 것이다. 모세의 사역은 돌비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사역은 요한의 사역은 십자가에 있는 예수의 사역이다. 신약복음의 모든 내용은 그래서 그 예수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 예수를 자기 생명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율법은 모두 돌비를 풀어낸 것이다. 열 계명이지만 열 가지 말씀을 풀어내고 풀어내고 풀어낸 것이 율법이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복음은 예수를 풀어내는 것이다. 풀어내서 먹이는 것이다. 분배해서 먹이는 것이다. 돌비가 하나님 마음을 새긴 것이라면 예수의 성육신은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새긴 것이다. 이것이 인격화되었으니까 우리가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가? 그 예수를 사역하는 사람이다. 그 예수를 성육신 하신 예수를 사역하는 사람이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예수가 아니고 구름처럼 떠다니는 예수를 사역하는 것이 아니고 성육신 하신 예수를 사역하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예수를 사역하려고 하면 우리가 성육신 안에 있어야 성육신 하신 예수를 사역할 수 있다. 구름처럼 떠다니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성육신 하신 예수를 사역할 수 없다.
전도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구름처럼 떠다니는 예수를 전파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한다. 그러면 사람이 많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온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육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로 사역한다. 목사는 예수로 사역한다. 구약의 제사장은 성막을 가지고 사역을 했다. 거기서 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를 한다. 나무패는 사람, 물 깃는 사람, 심지어는 양을 잡는 사람, 처리하는 사람, 제사장이 전부 그것을 다한다. 그것은 성막을 섬기는 일이다. 성막은 예수의 모형이다. 성육신 하신 사람, 인격의 모형이다. 그것을 섬기는 사람이 제사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했다.
사도들은 무엇인가? 예수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제사장이 성전을 섬기는 것과 같은 원리로 예수를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있는 기물 하나하나가 전부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 사람들에게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전부 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어떠함을 분배하기 위한 기구들이다. 등잔도 그렇고 떡상도 그렇고 향로도 그렇고 다 그렇다.
우리가 사도들의 반열에 서서 예수를 사역한다는 것은 생명 분배를 위한 사역이다. 인격 분배를 위한 사역이다. 인격 분배를 위한 사역을 거룩하다고 한다. 거룩하다는 말이 구별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것과 구별된다.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거룩’이라고,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제사장의 이마에 붙이고 다녔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일은 일인데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구별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세상과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전혀 사역이 아니다. 세상이 전혀 모르는 이 한 사람을 풀어내는 것, 이것이 전혀 다른 일이다.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부나 이런 사람처럼 옷을 거룩하게 입고 다니지는 않지만 내용은 우리는 거룩한 사역을 하고 있다. 거룩한 사역, 구별된 사역을 한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아무리 주어도 소용이 없다. 다른 것은 도교에 있고 유교에 있고 불교에 있고 다 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예수만 예수만을 사역하는 것, 이것이 거룩한 것이다. 제사장은 성막만을 섬기도록 되어 있다. 그 외에 다른 일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예수만을, 예수만을 사역한다. 예수만을!
우리가 이것을 일찍 알면, 진즉 알면 너무너무 좋은데 처음에는 잘 알기 어렵다. 다른 게 너무 많아서 알 것이 너무 많고 본론으로 못 들어가고 변두리만 치다가 가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가 예수께로, 예수를 아는 노선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아주 중요하다.
내가 지금 생각할 때 그렇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못 낳다가 100살에 낳았다. 100살이 되어서 낳았다는 그 말이 왜 좋았는지 모르겠다. 기왕이면 젊어서 낳지 아니 하나님도 그렇지 젊은 사람이 낳아야지 100살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가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마엘도 안 낳을 텐데, 진즉 주었더라면 이스마엘도 낳지 않을 텐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100살이 되어서 낳았다는데 그 말이 그렇게 좋더라는 그 말이 좋은 것이다.
야곱이 평생을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그것이 좋더라. 그것이 그 노선으로 부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가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께로 갔다. 처음에는 그 길만 보고 목적지를 모른다. 그런데 그 노선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타면 그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쪽으로만 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 모세가 팔십 세에 부름 받았다는 그것이 왜 좋게 들리는지. 기왕이면 젊었을 때 애굽에서 삐까번쩍할 때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80세가 되어서 쓸모가 없어질 때, 그때 불렀다고 하는데 왜 그것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노선이 그래서 그렇다. 그 노선이라서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는 예수를 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냥 맨 처음에는 하나님밖에 몰랐고, 다음에는 그 하나님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 것인데 그것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 길이 예수께로 가는 길이었다. 이것이 축복이다. 누구든지 다 우리가 처음부터 예수를 알고 갈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성경에 쓰여 있는 기록을 보고 이러저러한 일을 한 사람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지 처음부터 예수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지 않았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했다. 내가 너무 갈 길이 막막하고 올 데 갈 데 없으니까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나를 좀 어떻게 이렇게 생각을 하지 예수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많이 들어서 처음부터 ‘예수님’하고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예수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하지 예수가 왜 필요한가?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다가 예수를 만나는 길로 세워놓는다. 그러면 그길로 가다보면 예수를 만나게 된다.
오늘 그 성육신으로 시작한 교회, 돌판으로 시작한 성막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성막은 이스라엘을 만들어 냈고, 성육신은 교회를 만들어 냈다.
오늘 우리는 성육신의 사역자들이다. 그래서 거룩하다. 이것을 절대로 놓치거나 흩트려지면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사역을 포기하는 것이나 똑같다. 딱 그분만, 그분만 세상 앞에 전파해야 된다. 그분만 세상 앞에 선전해야 한다. 이것은 남이 전혀 안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그분을 선전해야 한다. 그 외에도 좋은 것이 많다. 좋은 것이 많은데 우리가 언제 좋은 것을 다할 시간이 없다. 이 한분을 아는 것도 일생이 걸린다. 그런데 다른 좋은 것을 다하고 되겠는가? 이것저것으로 출발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딱 한 가지만 출발해야 한다. 이 아브라함의 길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예수께로 부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다. 아브라함으로부터만 정확히 시작을 하면 가는 길이 예수께로 간다. 아브라함을 잘 알고 아브라함부터 시작을 하면 영생의 길을 가게 된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 길로 가게 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