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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믿음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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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유일한 믿음
오늘은 <유일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불교에서는 유일성을 별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 마찰이 특별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일신을 믿는 중동지방에서 나온 종교는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나 다른 종교와 마찰이 심하다. 유일성이 심한 경우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진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다, 우리 구원은 유일하다는 유일성 때문이다.
지금도 이 유일성 사상이 기독교 안에 사실은 꽉 차있다.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지 법이 허용한다면 종교전쟁이 불가피한 사상이 유일성 사상이다. 유일신이라고 하면 좋고 중요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대적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확실한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하면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죽이고 살리는 일이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하나님을 보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유일한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나라는 개념만 생각하니까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은 왜 하나밖에 없느냐, 우리 신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 너희 아버지뿐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으니까 이것을 통해서 유일성을 주장하게 된다. 유일성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비할 데가 없다,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너희들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하나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다 보면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둘인지도 우리가 모른다. 봐야 아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각 민족마다 자기 신이 있다는데 우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유일하다는 말은 절대적이다,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절벽 같은 상황에서,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어느 신이 이런 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신이 우리를 이런 자리에서 구원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는 오직 한 분뿐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할 신은 아무리 세상에 신이 많더라도 이분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누가 홍해를 육지로 갈라주겠는가? 누가 바로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주겠는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신앙의 고백이고 우리 구원의 고백이다. 구원 받은 사람의 고백이다.
나를 구원한 것은 이 사람밖에 없다. 나는 <주의 손에 이끌려>를 쓰면서 나를 불러낸 그 친구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 구원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나를 그 땅에서 불러낼 사람은 그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는 유일한 구원자이다. 그 당시에서 그 현장에서 나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친구도 많고 목사도 많고 세상에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만 나를 끌어낼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모세보다 나은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세 이외에 자기들을 건져낸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것이다.
그 친구는 지금 죽었지만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완전히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내 사연을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 책이 나오면 여러 분들이 자세히 보시면 대강 짐작하시겠지만 내 힘으로는 절대로 거기서 나올 수 없는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도 누구도 나를 거기서 끌어낼 사람이 없다. 오직 그 사람 한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는 한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이스라엘이 왜 400년동안 거기에 있어야 했는가? 그 이유는 구원자가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모세가 없었기 때문에 모세가 준비가 될 때까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거기에 두셨다.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스라엘 구원자는 미리 예비가 되어서 구원이 되지 구원자가 없이 어떻게 구원을 하겠는가?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구속을 받지 못했는가? 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예수가 오기 전까지는 구속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를 구속하신 분은 유일한 한 분이다. 그 유일하다는 개념이 이런 개념이다. 경험적인 개념이다. 이 경험을 가지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그 친구를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누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이스라엘이 모세가 없어서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그 사람이 없어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서 나왔던 것처럼, 나는 그 친구에 의해서 노화도라는 땅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는 모세가 그런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그 친구가 그런 사람이다. 옛날의 모세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홍해를 갈랐다고 해도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나를 섬에서 바다를 건너서 서울로 공수한 사람은 내 친구이다. 집과 집과의 거리가 100m밖에 안 되는 곳에서 자랐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다. 나는 교회를 다녔지만 친구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고등학교 3학년때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어떻게 사명을 받아서 신학교를 가게 된 사람이다. 어떻게 저 사람이 신학교를 가느냐고 다 놀랬다. 내가 꼭 갈 수 있는 신학교에 갔다. 다른 신학교를 갔으면 내가 못 갔다. 그런데 나를 데리고 갈 수 있을만한 신학교를 갔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인 것이다.
친구 아버지는 그 당시 재력도 좀 있어서 고려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3 말기에 예수를 믿지도 않던 사람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허락을 하겠는가? 안 된다, 고대를 가라고 하니까 나는 신학교를 못 가면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고3때 예수를 믿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직 신학교를 가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는 나를 구원하려고 신학교를 갔구나, 이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된다. 그 후로 목회를 해서 큰 진전이 있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고생을 무지무지하게 했다. 신학을 해서 육신적으로는 어려움이 참 많았다.
서울에 살면서 겨울이 불을 안 때고 살았다. 내가 처음에 서울을 갔을 때 영하 18도로 내려갔다.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들어붙었다. 그런 서울에서 온돌방에서 살지 못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 친구가 고생한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세가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처갓집에서 양치기를 하면서 80세가 되도록 아무것도 못했다. 80세가 되었으니까 다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님은 구원자를 예비하신다는 것을 그때 거기서 알았다. 하나님은 미리 구원자를 예비하시는구나. 이스라엘이 400년 간 있었던 것은 모세가 없어서였구나. 이렇게 알았다.
왜 온 인류가 구속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에 한 번 말씀 드렸지만 사람이 무엇이 문제인가? 가령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인가? 아니면 깨달음이 없어서 문제인가? 이런 문제이다. 공자님 사상으로 보면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라면 도덕성은 가르치면 된다. 석가모니 입장에서 보면 깨달음이 없어서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공자님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학이시습(學而時習),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가르쳤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그 사람들은 다 공자가 최고이고, 석가모니가 최고이다.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이 짐승과 사람을 가르는 잣대라는 것이다. 사람은 왜 사람이라고 하는가? 도덕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면 동물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또 석가모니 말대로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깨닫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그분들이 구원자다. 만일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공자가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깨달음이 없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석가모니가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간은 도덕성이 없어서 깨달음이 없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자기 양심에 있는 죄만 회개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만 회개하고 있다. 십일조를 하라고 했는데 못했다면 그것도 죄다. 주일성소를 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못했다면 그것도 죄다.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참여하지 않으면 죄다. 다 이렇게 되었다. 인간사회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잘한 죄가 다 기독교로 몰려들었다. 기독교는 그 죄를 짊어지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어린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죄가 끝이 없다. 그러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어떻게 그 죄가 없어지겠는가? 아무리 성결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죄가 어떻게 다 없어지겠는가?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 그렇지 않으려고 다 노력한다. 그런데 끝이 나는가? 안 난다. 평생 회개만 해야 된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교리가 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데 왜 죄가 있는가? 구원파 사람들의 딜레마가 거기에 있었다. 처음에는 죄를 용서 받았다. 이미 다 용서했다고 해서 날뛰었는데 살아보니까 안 된다. 구원을 받았는데 왜 죄를 또 짓는가? 이것이 구원파 사람들의 딜레마이다.
거기서 더 진전되어 나온 것이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억지이지 정상적인 것인가? 내가 앞으로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것도 다 용서했다는 것이다. 요즘 그 계통 사람들이 많이 흩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갈 데가 없다. 다행히 우리 교회가 있어서 우리 교회밖에 올 데가 없다. 다른 데 가봐야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들 수준이 이미 높아져 있어서 다른 데 가면 시시하다. 다른 데 못 간다. 서울교회는 지금 많이 몰려들어오고 있다.
문제 의식을 어디서 갖느냐 이다. 우리가 이탈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 양심이 나빠진 것인가? 우리가 도덕성을 배우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깨달음이 없어서인가? 이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으니까 이탈한 것이다. 종은 종으로 살아야 되는데, 주인이 되려고 했으니까 이탈한 것이다. 신하는 신하로 살아야 되는데, 임금이 되려고 했으니까 이탈한 것이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이다. 궤도에서 이탈한 것이다. 기차는 궤도에서 이탈하면 갈 수가 없다. 철마는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다. 이 이탈이라는 문제가 우리한테는 절대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앞에 설 때도 당신은 죄인이라는 말만 하면 안 된다.
우리 교회에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런 자매가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어려서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굉장히 선한 종교라고 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선하게 컸고, 나쁜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구원파 전도사가 와서 당신은 죄인이라고 한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졌느냐? 나는 죄 지은 일이 없고, 나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사람을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을 찾아갔다고 한다. 성경을 가지고 가서 보시오, 여기 죄를 졌다고 하지 않느냐,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것이다. 일주일 내내 둘이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결국 할 수 없이 갔다. 죄를 짓지 않았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죄 지은 적이 없다는데, 나는 죄를 모른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구원파가 전혀 통하지 않는 데가 있다. 이분이 우리 교회를 왔는데, 첫날 와서 간증을 했다. 여기가 천국이라고 했다. 전혀 죄를 모른다는 사람이. 나는 그것을 보면서 기독교가 억지 소리를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세상에 나쁜 사람도 많지 좋은 사람도 많다. 정말 좋은 사람도 많다. 지난 번에도 TV를 보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십 몇 억을 모아서 사회에 기증을 하는 것이다. 이름 없이. 보통 일이 아니다. 너무너무 훌륭한 사람이 많다. 교회도 안 다녀도 너무 훌륭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 앞에 가면 할 말이 없다. 공자님도 할 말이 없고, 석가모니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 되는데, 이탈했기 때문에 영광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왜 자유를 제한했는가? 동물들은 기계적인 자유가 있다. 그 범위 내에서만 자유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무한정한 자유가 있다. 그 사람에게 자유를 제한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6,17).”고 제한을 해놓았다.
왜 제한을 해놓았는가? 지금 인류가 투쟁하고 있는 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왜 그 자유를 제한해 놓았는가? 현대에 와서는 자유냐? 제한이냐? 이 싸움이다. 최고로 발달 되었다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목적은 <자유>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의 상징이다. 미국이 왜 좋은가? 자유 때문에 좋다. 다른 것이 없다. 부유하기 때문에만 미국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다. 자기들만 자유한 것이 아니고, 온 세계가 자기들처럼 자유해야 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 가서 피 흘리고 싸우고 있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만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자유 때문이다. 6.26 때 사람들이 왜 자원해서 왔는가? 자유 때문에 자원해서 왔다. 장군의 아들이 자원해서 와서 죽었다. 밴 플리트 장군 아들도 와서 죽었다. 자유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정신은 대단한 것이다.
마지막 인류가 쟁취할 것은 자유이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자유까지 가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 사회에서의 자유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으로부터의 자유까지 간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제한을 해놓으셨는가?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자유가 나빠서 제한한 것이 아니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서 만든 것은 용도의 제한이 있다. 자동차를 만들어놓았는데,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그것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면 안 된다. 왜? 자동차는 육지에서 타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도 그것이다. 하나님이 쓰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좋은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어서 자기를 표현하려고 하니까 자신을 표현하려고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게 자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유에 대해서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주(하나님)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주의 영이 물질이 아니고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이 만물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변해도 제한이 있지만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분이 나타나기 위해서 사람의 지어놓았기 때문에 그분의 자유로움처럼 자유로워야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를 가지면 안 된다.
예수님은 왜 죽기까지 복종하셨는가? 그것은 영이신 그분의 목적에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우리가 순종, 순종이라고 한다. 순종을 강조하는 데가 기독교 말고 더 있겠는가? 물론 중동에서 나온 종교가 대부분 다 그렇지만 유교의 순천자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사상과는 다른 사상이다. 그것은 자연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한 인격 앞에 내가 제한을 받는다, 순종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읽으면 절절이 순종이다. 왜 순종이 필요한가? 영이신 하나님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영이신 하나님이 다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면 안 된다. 내게 옳은 것이 있는데, 어떻게 주님의 옳으심에 따라 가겠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무서운 것이다. 눈도 코도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다. 너무너무 좋은 것 같지만 무서운 것이다.
내가 31세 때 70 노인과 싸웠다. 그도 보통 길가에 있는 노인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아버지 같은 분이고 그때까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했던 분이다. 내 위의 목사님이고 교장선생님이고, 내가 그분을 통해서 백지 위에 글을 쓰듯이 성경을 배웠다. 그런 분인데 옳고 그름이 나오니까 판이 완전히 딴 판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어떻게 서른 살짜리가 칠십 노인과 4년 동안을 싸우겠는가? 그때 나는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한 번도 내가 잘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리로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분이 분명히 뭔가를 착각하고 있고 오해하고 있고 누가 모함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4년 동안 한 번만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신 교회 집사님이 그 일을 위해서 뛰어 다니다가 밤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져서 4개월 동안을 깁스를 해야 했다. 다리가 부러졌다는 그 말이 아침에 들려올 때, 내 가슴이 확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하나님 생각이 아닌가 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일에 대해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하는 이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2년 만에 그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한 풀 꺾였다. 한참 전쟁이 일어나서 미드웨이 해전까지 올라갔는데 찬물이 확 끼얹어진 셈 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후퇴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를 지원해 준 사람들을 위해서 또 2년을 버틴 것이다.
선악과가 좋은 것인 줄 알지만 참 무서운 것이다. 부자 간에도 안 된다. 우리 교회에서도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이제는 화해가 되었다고 하는데, 몇 십년 동안 부자 간에 말을 안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는 곳에는 아들이 가지 않는다. 아들이 가는 데는 또 아버지가 못 간다. 너무너무 자식들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자식밖에 모르는 분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이 볼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딱 판이 바꾸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 이목이 없는가? 조그마한 도시에서 다 알고 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할 수 없는데, 판이 바꾸어지니까 달라졌다. 노는 판이 달라졌다. 물에서 놀 때 다르고, 산에서 놀 때 다르다. 노는 판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름판에서 놀 때와 그냥 놀 때는 전혀 다르다. 노름판에서는 돈이 왔다 갔다 하면 완전히 판이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진다. 노름판에서는 친구고 뭐고 없다. 판이 딱 바꾸어져 버리면 사람이 이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나와 너는 끊어진다는 말이다. 선악과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끊어진다는 말도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문제는 우리가 길을 이탈했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려고 사람을 지었는데 그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을 표현하겠는가? 내가 좋을 때는 하나님을 표현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아니라고 생각하면 표현하겠는가?
여리고 성을 쳐들어가라고 했을 때, 그래도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원수이니까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쳐들어가서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런데 우상숭배를 했을 때, 자기 동족을 죽이라고 하니까 아무도 칼을 들고 나가지 않았고 레위인만 들고 나갔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제사장 지파가 되었다. 알고 보면 잔인하지만 그 잔인한 것을 이용해서 제사장이 되었다. 왜? 양을 잡으려면 잔인해야 된다. 하나님은 묘한 방법으로 레위인을 사용하셨다. 번제단은 도살장이다. 매일 양을 잡아서 죽이는데 도살장이다. 성막에서의 제사는 신사적이다. 원시적인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때 보면 짐승을 산 채로 놔두고 심장을 꺼내서 뜨거운 심장을 신전에 바친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결한 처녀를 산 채로 잡아서 심장을 꺼내서 신전에 드렸다.
제사장이라는 것이 도살장이다. 무서운 것이다. 그 일을 레위인들이 맡은 이유가 동족이라도 우상숭배한 자는 다 치라고 했을 때, 칼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레위인들이 선한 사람들이라서 제사장 직분을 준 것이 아니다. 너희는 어차피 칼잡이니까 이 일을 하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얼마든지 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자유를 제한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제한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따를 수가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내 좋은 대로 해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한을 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너무 지나쳐서 다른 길로 가서 상대방을 죽이는데 지나쳐서, 이교도들 이단들을 처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일성이라는 이 문제를 잘못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문제가 된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유일한 분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공자님보다 도덕성이 훌륭한가? 석가모니보다 깨달음이 훌륭한가? 그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속함에 있어서 유일하다. 이탈된 위치를 바로 세워줌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다. 공자님은 이렇게 해 줄 수가 없다. 석가모니도 이렇게 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만 전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만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없으면 구속이 없다. 가르침을 가지고 방법으로 구속을 받으려고 하면 구속 받을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있는 내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 구속에는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고 어디를 간 것이 아니고,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함께 있는 이것이 구원이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으면 천당을 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으면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에 예수가 있어야 되고, 예수가 있는 곳에 내가 있어야 된다. 불가분의 관계를 말한다. 제 위치로 돌아온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내가 내 안에 예수를 찾지 말고, 예수 안에 있는 나를 찾으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내 안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또 실패한다. 찾으면 그때는 기분이 좋지만 또 실패하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야 가장 안전하다.
“그가 우리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나는 그 안에서 죽고 연합하고 장사 지낸 바 되고.”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유일한 제물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들로서는 우리를 정결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해마다 제사를 다시 지내고 또 다시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단번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우리 모든 죄가 다 끝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이다. 그것도 잘못 생각해버리면 양을 잡아들인 것과 똑같이 되어버린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모르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우리는 그냥 제사 법에 따라서 이행합니다.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서 드리면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용서했으니까 양은 우리와 멀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까 또 하나님 아들이니까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을 보고 우리를 용서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법적인 이해이다. 생명 안에서의 체험이 아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에게 나가면 억지가 된다. 제사법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친근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제사법 안에 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억지가 된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우리 죄가 용서 되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유일성!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다. 예수가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고 또 구속자다. 그분이 없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구속이 없다. 만일 그분이 없다면 우리 구속은 다 없어져 버린다. 그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구속이기 때문에 그분이 없으면 우리 구속도 없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가 없다. 구속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떨어져 나왔던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발견된 그 사람만 거기에 있는 것이지 예수 안에 발견되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있지 않다. 구속이 없는 것이다.
유일하신 예수! 유일하신 제물! 더 이상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옛날에는 양이 죽은 그 자리에서 나를 발견해야 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예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되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하면 이제는 방법이 없다.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유일하신 주님! 유일하신 예수! 이것은 경험 안에 있는 말이다. 우리가 경험 없이는 예수를 말할 수 없고, 객관적인 지식밖에는 말할 수 없고, 내가 모르는 말을 말할 수밖에 없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특별히 사역하는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말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 경험해서 아는 말만 해야 된다. 희랍사상의 영향으로 우리는 객관주의에 빠졌다. 내가 모르는 것도 객관적으로 인정되면 그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고쳐져도 우리 앞길은 이미 보장되어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고, 아는 것만 말하면 된다. 그러려면 예수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안에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도 그 전환점 때문에 길이 분명해진 것 같다. 전에는 객관적으로 아는 것을 전했다. 그러면 흠은 없다. 책에 있는 것이고 학자들이 해놓은 말이지만 나도 재미가 없고 감사가 없고 진보도 없다. 듣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귀로만 들었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안에서 변화되었다는 것이 있기는 있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깊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 중에 설교를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있는데 깊이는 되지 않는다.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한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하여튼 모르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된다. 여기 오신 분들은 내 부탁이다. 모르는 것은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하면 안 된다. 꼭 아는 것만 말씀 하시길 바란다. 어디를 가서 무슨 말을 해도 꼭 내가 알 수 있는 말을 하라. 내가 아는 말을 이렇게 말해도 되고, 저렇게 말해도 된다. 내가 아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말은 책에 써있는 대로 해도 못한다. 왜 이 사람이 이 말 했다가 저 말 했다가 하는가?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된다. 아무리 성경에 써있어도, 여기 계신 분들은 장로교이니까 칼빈이 아무리 말했어도 내가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된다. 내가 아는 것만 말하면 된다.
오늘도 벌써 시간이 다 되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