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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연합 안에서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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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생명의 연합 안에서
마태복음이나 성경을 보면 마지막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되라(사43:12, 행1:8).”는 말씀도 있고, 마지막에 보면 “복음을 전하라(전파하라)(막16:15).”는 말씀도 있다.
서신서들의 마지막에는 보면 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아마 기독교에는 가르쳐서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설교라는 것이 생긴 것 같다. 천주교는 물론 가르침도 있지만 개신교처럼 설교라기보다는 강론이 많다.
개신교는 예배의 중심이 설교이다. 뭘 가르치려고 설교를 하는데 뭘 가르치는가? 뭘 설교해야 되는가? 나도 8년이나 설교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무엇을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CBS나 CTS 방송을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니까 보아왔다. 무엇을 설교를 하는지를 들어보니까 설교하는 내용이 별로인 것 같다. 설교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을 종합하면 믿음으로 살아라, 이웃을 사랑하라,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것이 대강의 설교 내용이다.
나도 10년 정도 설교를 한 것이 그런 내용을 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굉장히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못한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설교가들이 그 시대에 따라서 다 있다. 한**목사님 같은 분의 설교나 조**목사 같은 분의 파워풀한 설교, 여러 유형이 있다. 다 유명한 사람들의 설교이다. 그런 설교를 본받아서 하려고 애를 썼다.
한때 해방 후 한**목사님이 은퇴하실 때까지 그 이상의 설교가 없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심지어 말투까지도 한**목사님 설교말투를 닮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이북 말씨에 호소력 있고 점잖고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들이었다. 그 시대가 지나고 나니까 순복음교회 설교가 나왔다. 뭔가 힘을 불어넣는 것 같은 설교이다. 나도 순복음교회에 여러 번 가보았는데, 듣다 보면 힘이 생길 것 같았다. 그 시대에는 그분이 제일 설교를 잘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방송에서 들어보니까 여러 사람이 나오는데 별로 특별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김**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대구경북 말씨가 그렇게 감칠맛이 나는 것이다. 특이하였다. 다른 분들에게서는 그런 억양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는데 천천히 말을 하신다. 옛날에 시골에 가면 소복이 올린 밥처럼, 한 숟갈씩 밥을 퍼서 다독다독해서 올린 밥처럼 만두 하나를 입에 넣어주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대구 말이 저렇게 감칠맛 나게 할 수 있는가했다. 타고 나는 것인지,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느꼈다. 물론 내용도 좋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특별하다면 믿음으로 살았더니 이렇게 됐다거나 믿음으로 행했더니 이렇게 됐다는 것만 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꼭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저런 것을 가르치라고 오신 것인가? 마지막에 부탁하신 말씀도 저런 부탁일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는데, 예수님이 분부한 것이 무엇인지가 막막해졌다.
“복음을 전하라.”,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무엇을 얼마나 분부를 하셨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 안 된다. 어록이라는 것이 얼만 되지 않는다. 공자나 석가모니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다. 조금 밖에 안 된다. 시간적으로도 그렇지만 범위가 그 정도 밖에는 안 된다.
이미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진 사람들이다. 거기에 조금 곁들여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는다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이지 무슨 인류를 위한 특별한 서신이라고 받을만한 것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분에게서 정말 남들에게서 들어볼 수 없는 설교를 들었다거나 말씀을 들었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한 마디 해놓으면 전 인류에게 다 퍼져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혹시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있으나 또 별로 그런 것이 없는 것 같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처럼 율법보다 좀 더 강화된 내용이지 특별히 우리를 가르쳐야 될 그런 문제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 사상을 보면 노자 같은 경우에는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그냥 자연히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공자나 맹자 시대에 오면 가르치려고 하고 교화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많이 보이게 된다.
불교에서는 깨우친다는 것이 목적이니까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강문도 하고 참선도 한다. 어떤 인간적인 수양을 하기 위해서라면 불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오히려 저것이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배(절)를 하는데 그때마다 기도할 내용을 부르더라. 이웃에게 거짓말한 것을 자복하는 마음으로 절을 합니다. 라고 하거나, 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마음을 자복하는 마음으로 절을 합니다. 그런 기도문이 나오면 그것에 따라서 절을 하는데, 중언부언 하는 기도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맨날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수양하는데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한 생각인지 못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데, 오다가 보니까 처음에 약 10년 동안은 그런 식으로 설교를 했다. 내 인생의 어떤 전환이 오면서 대구에 와서는 한 번도 설교를 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설교라고 생각하고 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내용도 성서강해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이면 요한복음을 강해하는 식으로 했지 설교를 일부러 생각하고 한 적은 거의 없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인지 그분들이 설교를 하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이 설교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는 그 내용이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겼다. 그 중에서 제일 나에게 맞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증인이 되라.”는 것도 옛날에는 어떻게 증인이 되라는 것인가 하고 막연했다. 이적을 행한다거나 하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 호소력이 있었다. 봐라,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느냐?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면 봐라, 하나님이 여기 계시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그렇지 않고 예수가 나의 증인이 되라고 했는데 어떻게 증인이 되는가? 상황을 통해서 증인이 되는가?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증인이 되는가? 이런 문제가 막막하다고 생각된다. 예수의 증인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떤 이적이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증인이 될 방법이 없다.
나는 그 동안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100살에 가서 아들을 얻는 아브라함,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아버지의 유업을 받아서 복을 누리는 이삭. 장자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꾀를 썼지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완전히 20년 동안 연단을 받고 바로 앞에 서게 되는 야곱. 내 나이 130세에 험한 인생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의 자기 인생을 완전히 진흙 밭에서 씨름하는 결과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은 것 같다. 내 나이 130세에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험한 세월을 보내고 눈도 어둡고 다리도 저는 데도 불구하고 바로를 축복하고 나왔다는 것이 나에게 특이하게 연결되었다.
그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런 흐름을 내가 찾았던 것 같다. 모세가 80세가 되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양을 치러 갔다가 여호와를 만났다는 것도 연결이 되었다. 어쩌면 그런 것이 내가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 능력이 없는 자리에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게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어떤 성향이나 운명이 맞으니까 그분들과는 좀 다르지만 나는 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연결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오다 보니까 그 길이 결국 예수께로 왔다. 이것은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줄이 있구나. 그런 계통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태복음 1장에서 다섯 여자에 대한 나의 관점도 좀 특이한 것이 그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다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여자들이 다섯 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 족보에 왜 넣어놓았는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설교를 많이 한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고 나대로 보여지기를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보여졌다. 사람이 어쩔 수 없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다말이 어쩔 수 없었구나. 시아버지와 상관한 그 일은 비도적적이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유대인 사회에서는 아들이 없으면 자식이 없으면 기업이 없다. 기업이 없다는 말은 땅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고아이고 과부가 되는 것이므로 평생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업을 얻으려고 그런 짓을 했다. 아무리 그럴 지라도 아마 우리 사회 같았으면 용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있다.
기생 라합을 보더라도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적군을 살려주고 옹호한 여자이다. 어느 민족 앞에 내놓아도 민족 반역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의 족보에 들어있다.
룻 같은 사람도 우리가 생각할 때 굉장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방 여자이다. 그 족보를 따지면 자기 아버지와 상관하여 근친상간으로 낳은 모압과 암몬의 자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인데, 예수 족보에 들어와 있다. 그래도 룻은 효성이라도 있어서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된다고 하면서 따라 온 사람이니까 기특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유대인의 관념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람이고 인간 취급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야의 아내도 또 그렇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충성스러운 군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윗에게 갔는가?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끌려간 것이다. 왕이 오라니까 끌려갔는데, 이런 여자가 예수의 족보에 들어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대해서도 보면 세상이 생각하는 대로 성모 마리아가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혈통이나 계통을 보면 여자들이 모두 그런 여자들이 아니다. 마지막에 와서 처녀 마리아로 나온다. 왜 처녀 마리아인가? 왜 처녀일 수밖에 없는가? 다말로부터 시작한 여자들은 전부 처녀일 수밖에 없다. 그냥 여자일 수가 없다. 어떤 특이한 남편을 가진 사람들이지 일반적인 남편을 가진 여자들이 아니다. 마지막에 오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사야 7장에 나온다. 왕이 구해보십시오. 하늘로 구해도 안 되고 땅에서 구해도 안 된다. 나는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고 아하스 왕이 이야기할 때 이사야가 하는 말이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처녀라도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왜 못 구합니까? 여호와께서 뭘 못하시겠습니까? 이런 말이다.
그리고 9장에 가면 한 어린아이를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신 아버지라는 엉뚱한 말이 나오게 된다. 있을 수 없는 말이 나온다. 어떻게 어린 아이가 왕이 되며, 어떻게 전능자가 되며, 어떻게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런 말이 전부 그때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이스라엘이 포위되어서 죽게 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옳으냐 그르냐, 선이냐 악이냐, 이 세계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세계이다. 전쟁 판과 평화 시는 완전히 다르다. 전쟁 판에 가면 옳으냐 그르냐가 없다. 죽느냐 사느냐만 있다. 전쟁 통에서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으면 전쟁이 아니다. 전쟁 판에는 죽느냐 사느냐, 이것밖에 없다.
6.25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백병전 육박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밤에 벌어진다고 한다. 밤에 벌어지니까 캄캄해서 누가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그때 인민군은 머리를 빡빡 깎았고, 우리군은 스포츠머리 정도를 했기 때문에 밤에는 머리를 만져보고 찔렀다고 한다. 총도 소용이 없고 대검 밖에 없다. 깜깜하니까 총을 쏠 수가 없다. 거기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밖에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잘했다거나 못했다고 해석할 수가 없다. 누가 선하냐 누가 악하냐로 해석할 수가 없다. 죽으면 끝나버린다. 어떤 절체절명의 상황과 연결된 것 같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가 다 그런 상황에서 있는 역사이지 평범하게 있는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의 혈맥을 이루고 있는 것인가? 사실 창세기로 돌아가면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그런 상황이다. 빛이 있으라 했다. 그 상황도 그런 상황이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너풀거렸다는 뜻이다. 땅을 찾아보았지만 있을 곳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사람을 지으신 것을 보면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했다. 흙으로 빚었다는 것은 막판이다. 흙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썩어서 되어지는 마지막이 흙이다. 그 흙으로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벨 대신에 셋을 주었다. 죽었으니까. 노아시대에 홍수가 났는데, 노아 여덟 식구가 구원을 받았다. 그냥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절체절명의 시간이라는 상황 안에서 그렇다.
이것이 연결되어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연결되니까 우리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지만 성경의 역사라는 것이 더 구체적으로는 애굽에서 노예되었던 이스라엘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면 결국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나 역사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옳으냐 그르냐가 먼저가 아니고, 모두가 다 죽느냐 사느냐는 이 문제에서 나온 말씀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내가 분부한 가르침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했을 때, 무엇을 분부했는지 모른다. 복음서를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분부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 무엇을 분부했는가? 예수님은 무엇을 분부했고,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가? 이것을 생각해보면 별로 없다. 우리 안에 특별히 분부한 것이 별로 없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것도 증인이 된다면 예수를 만났는데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물위로 걸어갔다고 하더라.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더라.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눈 뜨게 하더라. 이런 것밖에 증거할 수 없다. 본 대로 하니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유대인들에게 새삼스럽지 않다. 마찬가지로 유교권이나 불교권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구경한 것만 좀 다르다.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다. 기이한 분이다. 이렇게는 되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복음이 되겠는가? 죽느냐 사느냐에는 별로 관계가 없다.
결국은 우리가 그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객관적인 것을 보고 말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는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분이라는 것을 전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 자신에 대한 증거이니까 그분 자신을 알지 않고서는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분과 하나되지 않고서는 그분을 증거할 수 없다.
설교의 대부분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맞기는 맞지만 신문기자가 보도한 것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따라 다닌 기자가 보고 쓴 것처럼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거기에 조금 더하면 자기의 체험을 조금 섞을 수도 있다.
이것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것만으로는 된다고 볼 수 없다. 우리의 구속자이신, 나를 원점으로 돌려주신, 사람의 자리로 돌려주신 그분과 우리가 연합이 될 때만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문기자도 아니고 전기작가도 아니다. 또 그것을 위해서 평생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도 아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보니까 다 실망하고 가버렸다.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가버렸다. 바로 희망이 없었던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말이다. 대통령이 다른 사람에게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겠는가? 다 보았는데 왜 증인이 되라고 했겠는가? 억울하기 때문이다. 너무 오해가 되었으니까. 우리가 본 그대로 증거하려면 이러고저러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죽음이 기이하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이다.
기적을 행한 그것이 쭉 연속되었더라면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본 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는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 너무 허망한 일일 뿐만 아니라 또 어떤 편에서 보면 너무 거짓말쟁이 같고, 또 너무 참람하다는 것이다. 그분 자신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 아닌 것을 너희가 변호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변호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사명이다.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다 거부하는 그 사람을 변호하는 일이 우리 일이다. 어떤 사람이 속에서 너무 너무 억울해서 나는 절대로 그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어서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누가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 없는가, 나의 진심을 말해 줄 사람이 없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말로 하면 억울하다는 것인데, 억울하다는 것이 아니다. 나타낼 본질이 있는데, 그 본질은 감춰져 버리고 바깥 모양만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대로를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 소용이 없다. 좋은 점만 전해졌으니까 누가 봐도 다 좋은 점이고 신기하고 놀라운 점을 우리는 전했다. 그런 예수님은 전할 필요가 없다.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겠는가?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전해달라는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까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사역자의 사명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다 아는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르는 그 사람이 참 사람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증거하지 않으면 사역이 안 된다. 예수님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억울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잘 모르고 엉뚱한 소리하면 그렇지 않겠는가.
3년 반이나 제자들과 같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나가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것만 봤다는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복장 터질 일이다. 속된 말로 하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예수님을 속 시원하게 해명해드려야 한다. 다 위대하다고 전했다. 예수님이 대단히 훌륭한 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바라고 있겠는가?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나 이런 분들은 그분들을 만난 사람들이 그대로 전했다. 그것은 당연하고 훌륭한 것들이다. 그분들 속에 나쁜 것들이 있었을 리 없는 일이다. 제자들이 도망간 사람들이 없다.
예수님 제자들만 도망을 갔다. 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전한다고 무엇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왜 쓸 데 없는 말을 성경에 써놓았는가? 그것이 아니다. 돌아와서 보아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수라는 한 인격을 내가 연합한 후에 와서 보아야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다거나 장님을 눈뜨게 했다는 것이 다 새로운 시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눈으로 봐서 그렇게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보면 그보다 이적을 행한 사람이 많다. 엘리야도 있고 엘리사도 있고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사건과 똑같이 되어버린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다고 하더라도 모세와 엘리야와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예수와 연합한 후에 연합한 자리에서 와서 다시 볼 때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써놓았다. 처음부터 써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버리고 갔다. 아무리 보았어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이 다 버리고 갔다. 그런데 한 바퀴 돌아와서 보니까 그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엘리야가 한 것과 다른 것이구나. 모세가 한 것과 다른 것이구나.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다시 써놓은 것이다. 기사로 써놓은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만난 그 예수를 표현하기 위해서 써놓았는데 그것을 통해서 표현한 것일 뿐이지 다른 사람이 행한 기적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과 연합된 자리에서만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분과의 연합만이 우리를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되기를 연합을 해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홀로 도를 닦거나 수양을 해서 완성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둘이 연합하여 완성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둘이 연합하여 온전해지려면 너무너무 쉽고 당연한 것이다. 홀로 서려고 하니까 어렵다. 수양이 왜 어려운가? 홀로 서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둘이 연합하여 아기를 낳으려고 하면 쉽다. 그런데 홀로 아기를 낳으려면 가능하겠는가? 안 된다. 억지로 만들어야 되는데, 요즘 말하는 알파고 인간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생명은 그렇다. 연합하면 아주 쉽다. 혼자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를 읽어보면 다 연합하여 완성된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되게 했다.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전부 연합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의 질서와 그 방식은 연합이다. 너무 쉬운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연구하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알 수가 없다. 각기 나가니까.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가고 추구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열심히 가고 있다. 그런데 갈수록 길이 넓어지고 멀어져 버린다. 처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하고 따라 갔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하고 엎드리고 떠났다. 뒤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점점 두 사람 사이는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 동문서답하는 관계로 벌어진다. 서로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 그분이 다시 찾아와서 연합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증인들이 되게 되었다. 우리가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우리는 전해야 한다. 꼭 거기서 죽었다고 전해야 한다. 죽었다고 전하지 않고는 나하고 하나 되는 자리가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으로 전하는 것이니까 내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니까 예수 증거와 내 증거가 다르다고 볼 수 없다. 하나로 결국 증거되는 것이다.
구속! 이것이 우리의 출발이다. 그것이 출발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구속이 출발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시작도 구속이다. 유월절이 그들의 첫 달이 됐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속이 첫발자국이다. 그것이 없는 것은 공중누각이나 마찬가지다. 꿈속을 헤매는 것과 똑같다. 꿈속에 만난 예수이다.
이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의 사랑이라고 한다. 너무 깊기 때문에 표현하는데 있어 한량이 없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무엇을 찬양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찬양하는 것 이상으로 찬양한다. 찬불가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우리 찬송가보다 더 짙게 부처님을 찬양하고 있다.
사역하는 길을 다시 재고해 볼 때, 그냥 핵심이 없이 변죽만 울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정말 나 같은 사람에게 곧은 길로 인도해주셨는지, 왜 그렇게 받았는지, 그 은혜를 측량할 수 없다. 내가 다른 사람처럼 기도를 많이 해 본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처럼 의지를 가지고 힘써 해본 사람도 못된다. 사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들어가 보니까 내가 다 역부족이다. 기도하는 세계를 가보아도 역부족이고, 선교하는 세계를 가보아도 그것도 역부족이다. 다 역부족이다. 남이 하는 대로 못하겠더라. 그런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길을 보여주었는가? 그것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리고 이 길이 이렇게 나 같은 사람에게도 쉬운 길이 있었구나. 그래서 나는 길이 없어 헤매는 사람들, 힘쓰는 사람들,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이 길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런 길이 쉽고 편한 길이 있더라. 무거운 짐이 아니고 짐이 없는 길이 있더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셨다. 어떻게 사람을 쉬게 하겠는가? 지금 종교 안에 들어가면 사람을 쉬게 하는 것이 아니고 더 어렵게 만든다. 짐을 하나 더 진다.
세상에 살면서 양심이라는 짐을 지고 사는데, 기독교 안에 들어오면 양심이라는 짐에 믿음이라는 짐을 또 하나 져야 한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죄라고 한다. 짐을 하나 더 진 것이다. 율법이 없을 때는 범함도 없었다. 율법이 오니까 범함이 생겼다. 그러면 율법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율법이 있는 사람은 짐을 하나 더 진 것이다. 그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적어도 여기 오신 분들은 앞으로 예수를 알고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지 않는 분들이 될 것이다. 짐을 지고 온 사람을 쉬게 해야 한다. 그 많은 짐을 지고 온 사람이 짐을 벗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짐을 하나 더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많은 짐을 지고 가면 그것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 안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선교사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차를 다고 가다보면 시골길에 어떤 아줌마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니까 차를 세워서 태워주었다. 운전을 하다가 뒤로 돌아보니까 아줌마가 차안에서 머리에 짐을 그대로 이고 앉았다. 그래서 아주머니 왜 그것을 이고 앉았습니까? 하니까 나를 태워준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이 짐을 내리고 있겠느냐고 하더란다. 사람은 뭔가 자기가 짊어지고 있으면 자기 의가 남아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좀 편하다. 차를 타서 보따리까지 차에 놓으면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님 은혜를 입고서 가만히 있으면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또 짐을 지고 또 짐을 지는데, 그런 짐은 져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분의 증인이 되는 그 짐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짐이 아니다. 왜? 내 살이니까. 건강한 사람은 내 몸에 자기 체중이 전혀 짐이 아니다. 자기 체중이 짐이 되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아무리 뚱뚱한 사람도 짐이 안 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빼빼해도 자기 체중이 짐이 되면 그것은 병이 든 것이다.
예수와 내가 하나면 짐이 아니다. 그런데 왜 짐이 생기는가? 나와 분리될 때 짐이 된다. 그분과 내가 다르면 짐이 된다. 우리 사역자들은 짐이 되면 안 된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봉사할 때 세마포 옷을 입는다. 왜냐하면 땀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땀이 나면 하나님을 봉사할 수 없다. 내 사역에 땀이 나면 안 된다. 땀이 난다는 것은 저주다. 아미에 땀에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 그 이마에는 뭐가 있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에 가니까 그 이마에 ‘하나님의 종’ 이라는 것이 붙어야 한다. 대제사장의 관에는 여호와 성결이라고 붙인다. 땀이 붙으면 안 된다. 어린양의 이름, 그 이름이 붙어야 되지 땀이 붙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는 땀나지 않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뭔가 성취한 사람들은 땀이 나서 성취하지 땀나지 않고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예수 증인이 되는 것은 땀나고 증인이 될 수 없다. 땀이 난다는 것은 내가 다른 물건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분과 내가 하나면 무게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땀이 안 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도 무게가 안 느껴진다. 가볍다. 내가 무거우면 다른 사람도 무겁게 느낀다. 내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내가 편안한 척 해도 내가 짐을 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를 보기가 힘든 것이다. 내가 짐이 없는 사람은 남이 보면 자기도 짐이 없어진다.
어떤 사람이 바깥에서 소문을 잘못 듣고 나에게 잔뜩 긴장하고 온다. 그런데 내가 짐이 없으니까, 내가 짐이 없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조금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만히 보면 무장해제가 된다. 자기 속에 무장을 하고 왔다가 싹 풀어진다. 그래서 그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어느 잡지사 기자가 나를 취재하러 왔는데, 올 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이다. 이단이라고 하니까 뭔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왔는데 조금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 가방 안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그 다음에 가스총을 꺼냈다. 그때 가스총을 처음 봤다. 이것을 자기가 준비해왔다고 하면서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다.
내가 짐이 없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짐이 없게 할 수 있다. 내가 짐을 잔뜩 지고 있으면서 ‘내려놔, 내려놔, 짐 지지 말라’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미안해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 사람이 내가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면 미안해한다. 내가 짐을 지고 있는데 자기는 짐을 지지 않고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예수와 하나 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생명은 둘이 연합함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콩 조각이 둘이 붙어 있어야 싹이 나지 떨어져 있으면 싹이 안 난다. 싹이 나는 것은 너무 쉬운 것이다. 둘이 붙어 있다가 수분만 적당히 공급해 주면 싹이 난다. 아주 쉽다. 내 짐은 가볍고 쉽다. 내 멍에는 쉽다. 그것이 구속에서 일어난다.
이 구속은 우리 복음의 중심이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고 다 헛일이다. 다 일은 한다고 하겠지만 예수님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일이다. 기독교적인 일은 되겠지만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면 내 인생이 허무해진다. 내가 평생 예수, 예수 했는데 그분과 관계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했습니다.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리라. 이러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것을 보고 성경에서는 멸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멸망이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멸망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멸망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합당한 증인의 노선으로, 얼마나 다 할지는 모른지만 그런 노선에 우리가 들어온 것만도 축복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그 노선에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것을 죽을 때까지 전해야 될 것 같다.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전해야 될 것 같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150:6).” 시편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150:6).” 우리가 호흡이 있을 때까지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에게 찬송을 돌려야 하겠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