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힘은 그리스도를 방해함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
말씀 내용
세상의 힘은 그리스도를 방해함
2018년 2월 23일 이현래 목사님 목회자 모임 말씀
지난주에 김치현 목사가 시편2편을 말씀하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말씀 했는데,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있어 간증을 했었다. 지혜를 얻어서 속은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자기 욕심, 집착에 속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다 벗어버리고 속지 않는 원래 모습을 찾자는 것이다. 속은 데서 벗어나려고 평생 수양을 한다. 세상을 볼 때 그 사람들은 우습게 생각한다. 다 속아서 저런 것이다. 아웅다웅하는 것은 속아서 저러는 것이다. 다 맞는 말이다. 그것을 회복하려고 평생을 수양하고 있는데, 수양해서 지혜를 찾으면 무엇이 되는가?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심지어 내 몸뚱이까지도 속은 것이다. 이것도 벗고 갈 것인데, 내 것도 아닌데, 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맑고 밝은 사람이 되겠는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도 다 속은 것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신통하다.
요즘 유명한 스님들이 인기가 대단히 좋다. 대담에 나오면 사람들의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준다. 그런데 목사들은 그런 분이 없는 것 같다. 나와서 대담을 해도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줄 사람이 없다. 스님들이 인기가 대단하다. 인생 문제를 물으려면 거기 가서 물어보면 대답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가는가? 깨달으면 결국 자기 평안을 찾는다. 흔들리지 않는, 무중력 상태와 같은 그런 경지에 간다. 열반이라고 할지 적멸이라고 할지 그런 세계를 찾는다. 세상 사람들 중 괴로운 사람이 그런 분의 말을 들으면 정리가 되고 평안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듣고 보니까 괴로워서 평안을 찾으려고 온 사람이 있다. 교회를 왜 오는가? 자기 인생이 괴로우니까 평안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다는 안 되겠지만 우리 교회에 오면 좀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율법의 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 짐도 벗겨주니까 편안해진다. 그런데 이 평안만 추구하는 사람은 평안만 찾고 가버린다. 또 있어도 더 이상 발전이 안 된다. 자기 평안, 그것이 끝이다. 이 사람은 괴로워서 왔던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인생이 뭐가 그렇게 괴로운가? 나는 돈이 없어서 궁지에 몰렸을 뿐이지 인생이 괴롭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환경이 달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 괴롭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해를 못하겠다. 나는 인생이 괴로워서 교회를 갔거나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 왔다가 가버린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지금도 주변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 있다. 깊이 참여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어가면 괴로운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거의 도사급이 된다.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도 좀 알아들으면 반 도사는 된다. 세상에 나가면 살기 편하다. 직장생활도 그렇게 하면 아웅다웅하지 않고 아주 여유있게 할 수 있다. 한참 그것을 보다가 이것이 종착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하려고 있는 것인가? 그 사람도 뭘 지배하고 있는 힘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 더 이상 나가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나가면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게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속은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종류의 신이다. 우리는 천사라고 말하지만 그런 종류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을 대적하는 어떤 신이다. 우리는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분과의 싸움에서 사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밭 하나를 놓고 씨를 뿌리는 자가 둘이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서도 밀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났다. 밀을 뿌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원수가 와서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뽑아버리자고 하니 그냥 두어라, 지금 뽑으면 밀까지 같이 뽑히니 놔두었다가 추수 때 열매로 구분해서 갈라놓으면 된다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그것을 보면 씨 뿌리는 자가 둘인 것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지배자다. 사람을 움직이는 지배자다. 가라지를 뿌린 자가 가라지를 지배하고 밀 밭까지 지배하려고 하는 것처럼, 밀을 뿌린 자는 밀을 지배하고 밀을 통해서 생산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있는 전쟁터다. 내가 나에게 속은 것이 아니고 내가 지혜가 없어서 속은 것이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이것은 똑같다. 불교에 가면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덜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본 입장에서 성경이 계시한 바에 따르면 사람은 똑같지 누가 더 지혜가 있고 없고가 없다. 그것을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지혜에 의해서 속은 것이 아니고, 전혀 우리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속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
불교는 가능성이 있다. 내가 나에게 속았으니까 나만 잘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를 처리해서는 속은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수양을 해서 어떤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말한 속은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속은 것과는 관계가 전혀 없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속은 것 자체도 모르는 것이다.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주어서 하나님 같이 되게 한다고 속였는데, 이것을 성경을 봐서 아는 것이지 만일 성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기독교인이 많고 신학자가 이렇게 많은데, 거기가 딱 감추어져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차원에 속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고, 재주가 있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전혀 다른 것에서 들어온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 안에 있다. 사람이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선하냐 악하냐, 이런 차원이 아니라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씨 뿌리는 자의 문제이다. 씨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니까 모른다. 내가 속았는지 안 속았는지도 모르고 속은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속은 것은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속은 것이 있다. 그 이야기도 맞다. 그것을 항목별로 정리를 해놓았다. 어디서 무엇에 속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속았는지를 세밀하게 연구하여 만들어놓은 것이 불경이다. 사정진 탐진치 팔정도 등의 많은 술어들이 있는데 그 내용들이 전부 속은 것의 결과를 분석해 놓은 것이다. 서양처럼 학문이 논리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문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깊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알려면 불교에 가면 더 쉽겠더라.
그런데 사탄이 있어서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는 속은 것이 된 것이다. 성경의 해답은 사탄의 속임수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때 계획한 이것을 회복하는 이 문제이다. 이것은 아주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오는 것이 구속이다. 구속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구속이다. 인간이 잘못되는 그런 차원에서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 다른 데로 팔려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데로 팔려갔다.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돌아온 것이 구속이다. 내가 돈에 팔려가서 종이 되었는데, 거기서는 찾아왔다는 것이 구속이다. 나 대신 누가 돈을 주고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 구속의 개념이다. 나는 빚이 져서 할 수 없이 팔려갔는데, 사촌이 돈을 대신 주고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 구속이다. 내 힘으로는 올 수 없는 것이다.
종살이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종살이가 된 것이다. 누구도 헤치고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와서 자기를 건져주었다, 끄집어내주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본래 위치를 찾게 되었다는 이것이 구속이다. 이스라엘은 그 해의 첫날을 유월절로 정했다고 하고, 그 해의 첫 달을 그 달로 정했다. 자기들의 시작이고, 제2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달력까지 바꾼 입장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거기서 나온 말인데, 도덕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거듭났다고 하면 그 사람 요즘 거듭났더라, 생활이 참 달라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다. 노예되었던 사람이 풀려났다는 말이고, 뺏겼던 것을 도로 찾아왔다는 말이다. 지금 성경의 지론은 우리를 어디서 찾아오는 것이고 건져오는 것이다. 남에게 갔던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고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구속이 필요하다. 새로운 씨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아브라함을 많이 알고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아버지가 물려준 것을 그대로 받아서 산 것이다. 우물도 자기가 직접 판 우물이 아니고,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수리해서 쓰고, 뺏기면 또 다른 우물을 수리해서 썼지 자기가 한 일이 없다. 결혼도 야곱처럼 자기가 좋은 여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고, 그냥 데려다 주는 사람과 결혼했다. 유명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 더군다나 에서와 야곱을 축복할 때도 눈이 어두워서 거꾸로 축복했다.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본받을 만한 것도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본받을만한 것도 있고, 좋은 점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다. 개척자고 믿음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 보다 이삭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이삭을 낳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삭으로 말미암아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이삭이다. 아브라함은 수단이다. 그 수단은 아브라함이 좀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겼다고 했는데 뒤에 가면 믿음이 없어져서 사라에게 태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믿음이 하나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못 믿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을 못 믿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못 믿을 것을 못 믿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수단이고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이삭은 고칠 수가 없다. 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이삭의 후손이다. 여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팔려간 인간을 찾아오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찾아오셨는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는 방법으로 찾아왔다. 우리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사탄의 속임수에서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지혜를 깨달아도 안 된다. 불교에서 그렇게까지 지혜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는 데도 본질로 들어가지 못한다. 자기 차원에 속안 일이 아니고 인간 차원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씨가 오는데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씨가 새로워지는데.. 개선한다면 지혜가 필요하지만, 고친다면 지혜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씨를 받는데 무슨 지혜가 필요하겠는가? 거기에는 생명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지혜가 있다고 아들을 낳고, 지혜가 없다고 아들을 낳지 못하겠는가? 아들을 낳는 것은 지혜로 낳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낳는 것이다. 지혜로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 오히려 지혜 있는 사람들은 아들을 적게 낳아서 문제가 된다. 지혜가 없었으면 많이 낳았을 것이다. 지금 인구가 줄어들어서 문제이다. 생명이 생명을 낳지 지혜가 생명을 낳을 수가 없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후사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삭으로부터 난 자로서 그의 후사가 된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왜 뛰어내릴 수 없는 자리에 갔는가? 이삭을 얻기 위해서다. 아브라함도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갔다. 100살이 되었으니까 돌이킬 수가 없다. 사라도 90살이니까 돌이킬 수 없다. 자기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이삭을 얻었다.
예수님도 뛰어내릴 수 없는 자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다. 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람이라고 해보았자 소용 없는 일이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다는 것도 지금 소용 없는 일이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단지 거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릴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새로운 씨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새로운 것, 전혀 새로운 것!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개선시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거기서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끝나고 다시 시작한 것이 이삭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끝나고 다시 시작한 것이 새 생명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침례를 받고 그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고 그와 함께 죽고, 이 모두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 것이다.
우리 회복의 목표는, 하나님 회복의 목표는 우리가 인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왜? 그래야 새로운 씨가 뿌려지게 된다. 밭으로 비유한다면 엉겅퀴 밭은 다 정리하고, 포도를 다시 심는 것과 마찬가지다. 씨로 말한다면 옛날 그 씨를 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씨를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없애고, 믿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순수하게 은혜를 준 그 이삭을 통해서 다시 시작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딱 생긴다. 우리는 지금 자기 평안을 찾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구나. 나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 문제에 뭐 필요한가? 그렇게 하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말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속으로 눈치가 보인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평안을 얻는 것은 나와 관계 되지만 하나님 일에 내가 말려들어갈 일이 뭐가 있는가 하고 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표면적으로 들으면 하나님 일에 사람이 말려들어가는 것처럼 들려서 깊이 참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모르니까 무조건 하나님 일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전적으로 내 일이 아니고 완전히 그분의 일인데, 어떻게 그분의 일에 뛰어들었다. 왜 뛰어들었는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안 되는 것 같다. 말씀을 들어도 안 되는 것 같다. 하나님 일에 뛰어들려고 하는 생각 자체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교회에서 알고 하든지 모르고 하든지 그렇게 뛰어들려고 하는 사람이 귀하게 생각이 된다. 뭣도 모르지만 하나님 일에 뛰어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을 좀 싫어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 안 될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구나.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구나. 모르고 한 말이지만.. 서원도 하고 기도도 하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저렇게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부르심이 있어서 그랬나 보다. 100%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에게서 뭐가 나온 것 같다.
부르심이 있는 사람! 우리는 지금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왜 불렀는가? 하나님의 근원적인 위임 안으로 부르셨다. 그리스도 안으로, 위임 안으로, 기름부음 안으로 부르셨다. 우리를 기름 부어 놓았다. 기름 부음 안에서 창조를 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는 이것이 기름 부음이다. 이것이 근원적인 기름 부음인데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이것을 그 위임을 잃어버렸다.
불교에서는 그 위임이 없으니까 자기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라는 것이 없다. 위임을 뺀 나라는 것은 없다. 위임을 뺀 인생은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동물은 얼마나 평안한지 모른다. 사람보다 훨씬 편하다.
나는 늘 이야기했지만 옛날에 부산을 다니면서 갈매기를 보았다. 가끔 부럽다. 육해공군을 다 잘한다. 바다에서도 파도 따라 둥둥 떠 다닌다. 얼마나 편리한 놈인가. 그 놈이 도덕적으로 말하면 굉장히 도덕적이다. 짝짓기를 하고 나면 평생 일부일처제라고 한다. 짝짓기 하고 새끼를 키우고 나면 헤어지는데 1년 만에 다시 만난다. 어디로 갔다가 오는지 모르지만 돌아오면 자기 짝을 찾는다고 한다. 만일 돌아왔는데 짝을 찾지 못하면 혼자 산다고 한다. 이렇게 도덕적인 갈매기가 있겠는가. 짝을 찾느라고 목이 터져라 운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는가? 어떻게 저 놈은 저렇게 복을 타고 났는가 하고 해석하면 진짜 복 있는 놈이다. 마음대로 날아다니지 물에 가면 물 대로 자유롭지 육지에 가면 육지대로 자유롭고 꺼리길 것이 없다.
하나님의 위임을 사람에게서 빼면 동물만 못하다. 우리가 위임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평안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다. 위임을 이행하는 문제는 평안하냐 평안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평안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괴로우면서도 이행할 수 있고 평안하면서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평안이냐 평안이 아니냐 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 평안이 종착역이고 더 이상이 없다. 그것은 자기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위임을 하신 분은 자기가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위임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이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임이다.
위임 때문에 사람을 지었는데, 위임을 빼고 나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섯 째날 언제 창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레 되는 날은 안식한 날이고, 여섯 째날까지 창조가 마쳐졌다. 그런데 사람이 제일 늦게 창조되어서 그런지, 때는 잘 모르겠지만 제일 늦게 마지막에 창조된 것은 맞는 것 같다.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니까 구조적으로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거기에 위임을 빼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계도 값싼 기계도 고장이 나도 되고 잘못 사용해도 별로 큰 손해가 없다. 엄청나게 비싸게 만든 기계가 딱 한가지가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되면 너무너무 억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구조적으로는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만들었는데, 위임 하나를 빼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엄청난 무기도 평화를 위해 쓴다면 유용하게 될 수 있는데, 거꾸로 다른 데로 쓰여진다면 살상무기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위임 안에서 쓰여지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가 되고, 위임을 떠나서 사용되면 이것은 마귀를 대신하는 자가 된다.
우리의 목표는 위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아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위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위임을 회복시키지 못하면 그냥 수양관 밖에 되지 못한다. 그것도 해결이 안 돼서 마지막 천당으로 가는 것보다는 불교가 더 낫다. 적어도 불교에 가면 이번에는 안 되고 천당에 가서 해결해 준다는 말은 없다. 거기서는 지혜로 사람 문제를 해결하니까 다음에 보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다음에 보자는 것이다. 지금은 안 되니까 천당에 가서 보자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 허망한 것이 많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임을 회복시키지 못하면 사람들 데려다 놓고 절간에서 염불하는 것 보다 못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결국 사탄의 힘이다. 사탄의 힘에서 하나님의 위임이 있는 인간을 끌어다가 다른 데로 투입시켜서 자기 필요한 데로 집어넣어서 써버리고 말았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속여서 뺏어다가 쓴 것이다.
하나님도 사람이 있어야 자기 일을 할 수 있고, 사탄도 사람이 있어야 자기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밭이다. 씨를 가진 자는 무슨 씨를 가졌든지 간에 밭이 필요하다. 엉겅퀴를 뿌리더라도 밭이 필요하고, 포도를 뿌리더라도 밭이 필요하다. 한 밭에 밀을 뿌렸는데 또 가라지를 뿌렸다. 사람 속에서는 밀도 생산될 수 있고, 가라지도 생산될 수 있다.
대학부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도 초창기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나도 평안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고, 평안이 너무 좋았다. 그것을 처음에 전했더니 그것을 보고 따라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단계를 넘어가니까 떨어져 나갔다. 지금 남은 사람들은 그 단계를 넘어서 온 것이다.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왔다. 어떤 영리한 사람들은 그 단계로 가니까 다른 데로 갔거나 있어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다 도사다. 밖에 나가면 상담자로서 훌륭하다. 우리 교회 출신이 몇 명 있다. 처음에는 나에게서 왜 저런 사람들이 생산되었나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서 평안만 먹고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평안이 나도 좋았고, 그때까지가 내 한계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사람은 인도자를 따라 간다. 인도자의 수준만큼 따라 간다. 내가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따라 오지 더 가지를 못한다. 내게 오는 사람은 적어도 내 이상 갈 수 없다. 그래서 나 이상은 안 되기 때문에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전진해야 된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끊임없이 전진해서 궁극적인 길까지 가야 되지 중간에 멈추어 버리면 나와 똑같이 되어 버린다. 내가 8년 간 목회하던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끝나버렸다. 지금 만나면 미안하다.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그것밖에 되지 않아서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 사람들을 다시 모을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만 되는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 마귀의 힘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것을 세상 기독교에서 죄를 벗겨준다고만 생각하고 있다.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맨날 죄, 죄 한다. 기독교만큼 죄 이야기를 많이 하는 데가 없다. 맨날 죄 죄 한다. 죄라는 것은 다분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 같다. 근본적인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자리를 이탈했다는 문제는 없고 그냥 잘못한 것, 율법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오늘 내가 죄가 끝났다고 해서 내일 죄를 짓지 않는가? 내일 또 죄를 지을 수 있다. 오늘 잘못했다고 오늘 끝날 수 있는가? 내일 또 죄를 지을 수 있다. 끝이 없다. 맨날 사람 잡아놓고 회개하라고만 하니까 언제 끝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구원파가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이유가 그것이다. 계속 회개하라고만 하지 답이 없던 판에 구원파가 들어왔다. 성경을 봐라. 우리 죄를 이미 다 사했는데 왜 또 지금 죄 이야기를 하느냐고 해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영 끝이 없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도 하는 것이지 어떻게 완벽하게 하겠는가? 오히려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것이 낫다. 그러면 훨씬 덜 할 것이다. 시장바닥에 살면서 돈 생각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이 사회에 살면서 욕심 없이 누가 살겠는가?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해도 해도 안 될 일을 하고 있구나. 물론 다 잘하면 좋다. 그러면 차라리 공자님에게 가거나 석가모니에게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지 그것이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옛날에 참 답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명심보감까지 배웠다. 그리고 더 배우려고 서당에 갔다. 그래서 한학을 좀 맛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회개할 죄가 별로 없었다. 부흥회 가면 첫날부터 회개하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회개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젖 먹었던 때부터 다 회개하라고 한다. 젖 먹었을 때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내가 깨끗한 백지장이라는 말은 아닌데, 나 때문에 죽을 만큼의 죄, 하나님 아들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만한 그런 죄를 못 찾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흥회를 가보면 회개하라고 하면 대성통곡을 하고 난리다. 통성기도 하고 난리다. 나는 뭘 회개해야 할지를 몰라서 애를 먹었고 답답했다. 물론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고 고치고 새롭게 해야 된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 위임을 버렸다는 것은 몰랐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을 모르고 했으니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안 된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시장바닥으로부터 벗어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위임을 뺏어버린 그 자로부터 내가 벗어나야 된다. 이것은 하나님 목적과 관계되기 때문에 하나님 목적을 헝클어버리는, 혼돈시켜버리는 거기서 내가 나와야 된다. 그 세력이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공산주의 통해서, 또 자본주의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것은 무슨 방법을 통해서 그것을 못하게 막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그렇지만 또 다른 것도 많다. 오락도 많고 많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 결국 위임과는 관계 없는 자리로 끌고 간다. 인생을 소모 시키게 만든다. 그것이 사탄의 작전이다.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자로부터 벗어나려면 예수를 따르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거기서 내 인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밖에는 나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뛰어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참 인간이다. 그가 내 원래 있을 자리다. 그분이 그렇게 하고 있는 자리가 남의 자리가 아니라 내 자리이다. 그분이 부활해야 되는 자리가 내가 부활해야 되는 자리이다.
나는 그분이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길이 옛날부터 시작되어서 왔다. 마지막에 예수님에게 와서 결정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창세기 1장 2절부터 시작되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고 거기에 빛이 있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100살에 이삭을 주었다. 다 같은 말이다. 모세 80살에 하나님이 부르셨다. 다 같은 말이다.
우리가 이 맥락을 따라서 왔다. 왔으면 어디로 가야 되는가? 당연히 십자가로 가야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된다. 나는 처음에 아브라함이 좋아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좋아서, 이삭이 좋아서, 야곱이 좋아서 말씀에 취했다. 나는 그때 십자가로 간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고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십자가까지 왔는데 이제 보니까 딱 맞는 길로 왔구나. 그때부터 길을 잘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나를 인도하신 분이 정확한 길로 인도하셨다. 내가 다른 길로 갔으면 다른 길로 가버린다.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나에게 인도해 준 어떤 인도자를 만났다면 나는 믿음의 길을 갈 것이다. 믿음! 그러면 십자가에 가서 못 뛰어내리느냐는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지금 나는 왜 아브라함이 100살에 이삭을 낳았는지에 대해 대답이 된다. 이삭이 왜 중요한가? 대답이 그것이다. 내가 왔던 길이 그 길이다. 내가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다. 인생이 가는 길이 이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걸어왔기 때문이다.
길 자체가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게 되어있다. 경부선 타면 부산을 가듯이 이 길에 들어서면 그렇게 가게 되어있다. 첫째 시작이 중요하다. 생명나무냐? 선악나무냐? 이렇게 시작한 것이 이렇게 진행을 해왔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왔다. 온다고 오니까 십자가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따라 가다 보니까 가는데 거기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 자리다. 역사적으로도 예수님은 거기서 끝난다. 예수를 추적하면 거기밖에 갈 데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임을 회복하려고, 기름 부음을 회복하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자기 평안이냐? 아니면 위임회복이냐?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Q1. 목사님 질문 있는데요. 계속 안식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하신 평안과 안식이 같은 것이라고 하면 지금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거든요.
이현래 목사님:
안식은 우리의 안식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여호와의 안식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해야 되는 사람들이다. 그 말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만족하셔서 안식하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안식에 참여해야 한다. 왜? 지으신 자가 완전하다고 하면 나도 ‘아! 완전하구나.’ 이러면 행복이 된다. 그런데 지으신 자가 완전하다고 하는데 ‘나는 아닙니다.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는데요.’라고 하면 불행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안식하게 하는 것인가? 내가 만족해야 하나님을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제일 불행한 말은 무엇인가? ‘나를 왜 이렇게 낳아놓았습니까? ’이것이 부모의 심장을 가장 찌르는 것이다. 부모를 제일 기쁘게 하는 말은 반대다. ‘나를 이렇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부모를 제일 찬양하는 말이다. 내가 부모이면 그 말을 들으면 안식한다. 자녀에게 대해서 ‘아버지 나를 이렇게 낳아주고 이렇게 해서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고 하면 부모가 안심이 된다. 그것이 부모의 안식이다. 그런데 ‘아니 나를 왜 이렇게 낳아 놓았습니까? 다른 사람은 키가 큰데 나는 왜 이 모양입니까?’라고 하면 정말 기막힌 일이다.
형제들 중에 여유가 생기면 추석이나 이럴 때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나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한다. 부모들이 생전 그런 말을 못 듣는다. ‘나를 낳아줘서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 없다. 부모로서는 그 말을 들으면 편안해진다. 그것이 안식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 안식에 나도 참여가 된다. 부모가 참 고맙다고 하면 나는 평안하다. 평안이 괴로움이 전혀 없다는 그것만이 평안이 아니다. 괴로움은 또 생길 수 있다. 오늘까지 괴로움이 아무것도 없었더라도 내일 또 갑자기 생길 수도 있다.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전에도 한번 말씀 했을 텐데, 열 계명 가운데 저주가 붙은 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다.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는 것이다.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인데 그것을 못해서 죽게 된다. 그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일을 하라고 해도 문제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문제이다.
교회를 해보니까 처음에는 나한테 얘기를 듣다 보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말씀 열심히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다. 그런데 뭔가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허탈해지기 시작한다. 뭐하는 거냐? 뭐 하려고 하는 거냐? 초창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좀 많았다. 뭘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뭘 하라고 하지 않으니까 참 좋다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서 시달리고 일하던 사람들은 참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니 뭣 좀 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먹고 놀라고 하니까 그것을 답답해하더라.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하나님이 내게 해놓은 것을 내가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다. ‘100% 감사합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아서 참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다. 내가 키가 작은 것이 나는 왜 키가 작은가, 이러면 부모의 안식을 깨는 것이다. 키가 작은데, 아버지 너무 키가 작았는데 오늘 키 작은 것 때문에 이렇게 이익을 봤다고 아버지 앞에서 이야기하면 부모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이 되겠는가. 야 참 너 고맙다, 내가 너를 낳기는 조그마하게 낳았지만 네가 그렇게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다니, 그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흡족하겠는가. 부모는 작게 낳고 싶어서 낳았겠는가. 자기 키가 작으니까 작게 낳은 것인데 맨날 앉아서 다른 애들은 다 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크냐고 하면서 조상 탓하고 있으면 그 부모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갔다 오더니 내가 키가 작아서 이런 덕을 봤다고 자랑하면 부모가 얼마나 재미가 있겠는가.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내가 만족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에 속은 인간은 만족이 안 된다. 왜 인간은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나는 왜 이런가? 결국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조상을 원망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왔겠는가.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말이 그 말이다.
알고 보면 대부분이 자기 문제로 괴롭다. 자기가 무엇을 좀 하려다가 안 되니까 괴로운 것이지 뭘 하려는 생각이 없으면 괴로운 것도 없다. 나는 특별히 잘하려는 일도 없고 잘하는 일도 없어서 그런지 괴로울 일도 없더라. 내가 잘하는 것은 잘하고, 못하는 것은 못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었다.
어떤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데 점수를 못 맞으면 자기가 못 견딘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슴을 치고 운다는 것이다. 그 놈은 공부 좀 잘하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고 꼴찌다.
Q2. 목사님이 위임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의 경우는 80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것이 구체적으로 위임을 받았는데, 현재에 사는 저는 특별히 목회자도 아니고 특별히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저는 위임을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해해야 될지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그리고 위임 받은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사는지, 그 두 가지를 좀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현래 목사님:
꼭 목사만 되면 위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위임을 말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근원적인 위임이다. 사람을 만들 때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고 만들었다.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는 그것이 위임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운데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떤 특별한 항목을 지정해서 위임 받는 것도 있겠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인격회복>이라고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인격을 회복하는 것은 그 위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위치에서 내 위치가 회복되면 사람은 내 위치대로 살게 된다. 그 위치에 맡도록 살면 그 위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개는 개만큼 살아야 되고 소는 소만큼 살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살 것이 없다. 개가 원숭이처럼 못해서 죄 지을 것도 없고 멸망 받을 일은 없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 자리, 하나님이 정해준 자리만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도 세상이 거꾸로 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이 은혜를 입게 된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이 살아난다. 한 사람이 잘못되면 주변 사람이 많이 잘못되고, 한 사람이 잘 되면 주변의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게 된다.
목사도 내가 잘되어서 내가 인격이 온전히 회복되면 내 주변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다. 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니까 복을 못 주는 목사는 목사를 할 필요가 없다. 복을 주려고 목사를 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것이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이 어디 따로 있는가? 따로 갖다가 준다는 것은 아주 교리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기독교가 된 것이다. 복된 소식은 나와 그리스도가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시끄러운 곳에 가도 한 사람이 조용한 사람이 있으면 조용해지게 된다. 조용한 곳에도 시끄러운 사람이 한 사람 들어가면 시끄러워진다. 우리 사회도 지금 그렇다. 지금 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저절로 그런 것이 아니다. 촛불을 저절로 들고 나온 것이 아니다. 태극기를 저절로 들고 나온 것이 아니다. 다 부추겨서 나온 것이다. 조용한 사람이 있으면 조용해지고, 시끄러운 사람이 있으면 시끄러워진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사가 문제가 없어야 교회가 문제가 없다. 목사가 문제가 있으면 교회가 저절로 문제가 생긴다. 없던 문제가 생긴다. 내가 해보니까 그렇더라. 나는 내 문제가 아닌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까 내 문제더라.
내가 교단에 있을 때 상당히 교회 안으로 시끄러운 문제가 생겼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알고 보면 나 때문에 시끄러워진 것이다. 내가 객관적으로 봐서 잘못을 해서 시끄러워진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시끄러운 인자를 제공했다. 그러니까 시끄러워졌다. 나만 빠졌으면 조용할 것인데, 그 교회를 가보니까 다른 사람은 다 좋은데 한 사람이 까다로운 사람이 있더라. 저 사람만 없으면 참 좋은데,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사람에게 내가 당한 셈이다. 나는 늘 은근히 그 사람을 어떻게 좀 하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결국은 당하고 나왔다. 암투를 하다가 당했다. 잔꾀를 부리다가 당한 셈이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기 안에서 원인을 발견해야 된다.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 안에 문제가 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니까 적이 생기더라. 그러니까 목회자는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적이 생긴다. 왜냐하면 내가 내 생각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무엇을 하려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면 둘이 충돌한다. 나는 그냥 복음만 주어야 한다. 누가 들어도 복될 것만 주어야 한다. 그러면 조용해진다. 뭔가 하려고 하면 적이 생긴다.
간증1:
목사님! 지금 **형제의 질문을 통해서 제가 새롭게 깨달은 것이 복음은 객관적으로 어떤 사실이 복음이 아니고 실제로 복음을 사는 사람이 전하는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이현래 목사님:
내가 복음이어야지 복음이 되지 내가 복음이 아니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교리를 전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들은 객관적인 교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못 준다. 복음을 전해서 복이 갔는가? 안 갔다.
간증1:
그래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동안 우리 기독교계에서는 설교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구교회에 와서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설교로 사람이 변하더라. 설교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 변한 사람이 백날 설교를 해도 안 변하고 변한 사람이 설교를 하면 변하더라구요. 설교가 문제가 아니고 설교하는 사람이 문제더라구요. 목사님도 사실 설교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일요일에 하시는 것이 다 설교거든요. 간증적인 설교죠. 그래서 핵심이 설교 여부가 아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변했느냐 안 변했느냐 그것이 핵심이더라구요.
이현래 목사님:
그러니까 설교를 안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해야 한다.
간증1:
아니 목사님 설교를 해도 설교를 하는 사람이 변해서 설교를 하면 사람이 다 변하더라구요.
이현래 목사님:
그렇지. 설교를 하는데 설교 하는 것처럼 하면 안되고 설교 안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설교를 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편안한지 모른다. 성경 말씀을 보면 복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무엇 때문에 설교를 하겠는가.
인도자는 인도자 같지 않게 인도를 해야 한다. 인도자 같게 인도를 하면 안 된다. 인도자 같지 않게 인도를 해야 한다. 숨어서 인도해야 한다. 표가 나면 안 된다. 늘 봉사하는데 인도가 된다든가 이러면 인도자가 아니다. 인도하는 것처럼 깃발 들고 나서면 안 된다.
간증2:
목사님 저도 목사님 말을 들으면서 설교를 이제 내가 안 해야 되겠다, 또 주일날 말씀 전할 자격이 없다고 인식이 되니까 이제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포기하고, 가르치는 어떤 식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너무 좋습니다. 이제는 내가 아는 것만 전하니까 이상하게 새로운 일이 생겨요. 새벽이나 밤 11시고 12시고 찾아와서 같이 말씀을 나누자고 하는 일도 생기고, 설교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안 생기거든요. 설교 끝났으니까 다 집에 가라, 내가 쉬어야 된다고 하니까 전혀 관계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는 것만 이야기하니까 서로 더 먹고 싶어서 들어오더라구요.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왜 성경을 가르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을 포기하니까 이제는 생명의 말씀이 나오니까 이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이다.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그런 것들이 나오니까 이것은 샘솟듯이 솟아나오는 것이고 저절로 나오는 것이고 흘러가는 것이니까 이것이 너무 좋더라구요.
이현래 목사님:
아멘 아멘 아멘입니다.
간증3:
오늘 목사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모세가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은 흙으로 지은 것과 상통한다. 그들이 흙이 되었을 때 생명의 씨이신 여호와로 인해서 생명을 산출했다는 그 말씀이 너무 감사합니다. 창세기에 돌아가서 사람을 흙으로 지어서 그 흙에 생명의 씨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연합해서 하나가 되는데, 하나님이 동산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셨잖아요.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지 아니면 생명나무 열매 자체가 씨이신 하나님의 생명인지 그것을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현래 목사님:
생명나무는 비밀이다. 창세기에서 한번 나오고 욥기에 가서 생명나무가 한번 나오고 거의 없다.
생명나무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한 사람이 없다. 주석 같은데 보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선악을 알게 하는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그것이 죄라고 말을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여러 분이 어디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생명나무 열매가 무엇인지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사람이 두 사람이 나왔다. 박태선은 복숭아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복숭아를 먹지 않는다. 제일 천년성이라고 하는 소사에 있는 오만제단이 원래는 복숭아밭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치우고 거기에 신앙촌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상하게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해서 먹지 않는다. 생명나무를 얘기하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얘기했다. 그리고 문선명 선생께서 그것을 인간의 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명교리가 나오게 된 원인이 선악과이다.
그런데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성경에 있는 대로 먹으면 사는 것이고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하고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임의로 먹되” 거기에 다 들어간다. “임의로 먹되” 이것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선악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으니까 선악과의 정체, 오늘도 아까 말을 했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정체가 바로 선악과이다. 선악과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생명나무 열매도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나무 열매다.
왜냐하면 그를 먹으면, 그를 먹으면 내가 산다. 먹으면 사는 과일은 그것밖에 없다. 생명나무는 결국 그리스도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생명나무인 그리스도를 어떻게 먹는가? 이런 문제가 있다. 예수를 어떻게 먹는가? 그래서 성찬식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심심하면 나는 설교 하는 방송을 듣는데, 차라리 나는 여러 가지 설교 하는 사람들을 들으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려면 차라리 천주교에서 하는 대로 떡을 먹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상징적인 것이지만 맞는 것이다. 떡을 먹으면 몸에 들어가서 화체가 된다는 것이다.
방송 설교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수를 먹는다는데 예수를 먹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전부 다른 이야기만 한다. 예수는 없고 모두가 다 다른 이야기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미사를 드려서 떡 한쪽씩 먹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더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상 설교의 99%는 예수 자신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생활할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전부 이런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도덕 강의가 되기도 하고 종교 강의가 되기도 하고 알고 보면 이런 식이다. 왜? 예수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으라고 했지만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하는 그런 방식으로 기념을 한다든가 기념식으로밖에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어디서 먹는가? 십자가에서밖에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이야기한다. 예수를 먹을 방법이 없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왜냐하면 알면 알수록 더 놀라운 분이다. 우리가 배운 대로 하면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다. 그러면 거기서 생명의 무궁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해보았자 나와는 관계가 안 된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분이다. 놀라운 양식을 주신 분이라고 해보았자 나와는 하나가 안 된다. 어디를 가도 우리가 예수를 만날 자리가 없다. 그냥 존경의 대상으로, 경이로운 대상으로는 만나지만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상징적으로는 떡을 먹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는 말씀을 마지막에 하셨는데, 상징적인 것을 가지고는 안 된다. 우리가 상징적인 떡을 받아먹고 예수가 내 안에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다.
천주교인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대죄에 속한다. 미사에 참여하면 설교가 중심이 아니고 미사의 중심이 그 떡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떡이 없고 설교를 한다. 떡 대신 설교를 한다.
그러면 그 설교가 예수인가? 그러니까 배고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딱 먹을 수 있는 분이다. 뛰어내릴 수 없는 분이 바로 내가 먹을 수 있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분이 있다. 그러니까 먹는 것이다.
참 사람! 나도 원래는 참 사람이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인데 오병이어로 떡을 먹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참 사람이 변질되어서 어땠는가? 세상 종이 되었다. 원래 재료가 변한 것은 아니다. 원재료는 그대로 있는데 선악과를 먹었기 나는 그것이 되어 버렸고, 그분은 생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을 만나려면 어디 가서 만나는가? 바로 원래 그 자리에 가면 만나게 된다. 나도 그 자리에 있고, 그도 그 자리에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난다. 나도 뛰어내릴 수 없는 그것이 진짜 나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것도 내가 아니고, 이것도 잘못하고 저것도 잘못하고 그것도 내가 아니고, 그 뛰어내릴 수 없는 그것이 나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바람을 잔잔케 했느냐 안 했느냐 이것이 그 사람이 아니고, 뛰어내리지 못한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동일시된다. 먹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먹으라는 말은 하나 되라는 말이다.
예수와 내가 하나 되는 것, 그것은 그분을 먹는 길인데 그분을 먹으려면 입에 들어갈 수 있어야 먹을 수 있다. 음식은 통째로 들어가면 안 되고, 내가 잘게 씹어야 소화가 된다. 잘게 씹을 수 있는 음식이라야 소화가 된다.
나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위대한 이적을 볼 때는 그냥 존경스럽고 경이롭고 믿음의 대상이 되었지 나와 하나라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보니까 ‘아 이미 하나구나. 또 따로 하나인 자리가 있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지금도 그분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고, 나는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 그것은 다르다. 완전히 다른데 그 자리에 가면 그분과 나는 하나다. 그것이 참 인간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분과 하나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 그분과 나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면 그분은 누구인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분은 누구이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한 것은 그분 자신이 아니고 그분의 능력이고 그분의 은사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분이 그분 자신이다.
너무 지금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너무 많은 예수 외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예수님은 내 믿음의 대상인데 그분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분은 그분이고 그분은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 지금도 그분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그렇게 능력 있는 분에게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은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아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사람의 병을 고쳤다는 것은 은사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든지 고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다. 어떤 목사님이 젊었을 때는 팔팔했던지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했다는 것이다. 나이가 좀 들었는데 길가에 가다 보니 앉은뱅이가 있어서 옛날에 고쳤던 생각을 가지고 손으로 일어나라고 기도를 했는데 안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못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팔을 잡고 기도하고 확 일어나라고 했더니 뭐라고 하겠는가? 욕만 하지 뭐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은사니까 있을 때는 있지만 없을 때는 없는 것이다. 젊었을 때, 젊었다는 것도 은사다. 젊었을 때는 내가 쌀 한 가마니도 들었다면 늙어서도 들 수 있는가? 못 든다. 그러니까 쌀 한 가마니 든 내가 내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가 진짜 사람이다. 진짜로 사람이다. 하나님 아들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 천사들은 그것을 조롱하는 것이다. 네가 무슨 능력도 없으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느냐? 이것이 천사들의 말이다. 하나님 아들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천사들의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실 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라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해보라. 예수 만날 자리가 딱 한 자리뿐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만나려면 지성소에 가서 만나는 그 한 자리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만날 자리도 한 자리뿐이고, 또 알고 보면 나와 여러분이 만날 자리도 이 자리뿐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로 만날 자리는 그 자리, 한 자리뿐이다. 인류가 하나로 만날 자리도 이 자리, 한 자리뿐이다.
기독교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류 통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 안에서 통일 될 수 있다. 그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한 그 사람 안에서 우리 인류는 하나다. 그리로 우리는 사람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지 다른 데로 불러들이면 하나가 안 된다. 교회를 여러 분이 하시니까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불러들여야 하나가 된다. 다른 데로 불러들이면 다 제각기 나가버린다. 다 다른 사람이다.
한 몸!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라는 말인데 어떻게 우리가 한 몸이 되겠는가? 그 자리밖에는 우리가 하나 될 자리가 없다. 불교고 기독교고 할 것이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될 자리는 이 자리 한 자리밖에 없다.
나는 이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복음에도 참여를 못하면 그것은 멸망이다. 가령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거기에 참여를 못하면 멸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나와 한 자리에 계신 분과 참여를 못하면 바로 멸망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마지막 복음!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선지자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이 모든 마지막 날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아들로 표현했다는 그 말이다. 히브리서에는 이 아들로 말하면 이러이러하다고 되어있다. 천사보다 낫고 누구보다 낫고 누구보다 낫고 누구보다 낫고 누구보다 낫고를 열거를 한다. 이 아들에게서 빗나가면 우리는 영원히 빗나가는 것이다. 영 다른 데로 가버린다.
그리스도는 생명나무고 생명나무 열매이다. 하나님이 준 마지막 선물이다. 인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다. 거기에 가면 죄 사함이고 다른 문제는 다 해결이 된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다. 구속, 죄 사함, 다 하나다.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구속 따로 있고 죄 사함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간 예수 아닌 것은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해보라. 내가 예수만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 예수만 증거하고 예수의 증인이 되겠고 생각하면 간단해진다. 다른 것은 할 사람이 많으니까 안 해도 된다. 설교를 들어보니까 오만 소리를 다하고 내가 안 해도 다 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