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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유일한 길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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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십자가 유일한 길
안녕들 하셨습니까? 삼일절에 만세는 부르셨습니까?
우리는 삼일절 집회를 했는데 만세를 부르지 못해서 제대로 지키지를 못했다. 어제 찬송가를 부르다가 주님께로 가는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하지만 영원히 찬송하겠다는 노래가 있다. 그 찬송의 내용은 십자가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인데, 그래도 끝까지 주님을 찬송하며 따라 가겠다는 내용이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오는 동안에 십자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고난의 길인데 참고 가야 된다, 참고 이기고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불교에 가면 모든 것을 벗고 자기의 본 모습을 찾아야 된다고 한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야 된다는 것이 주제이다. 그것을 빼면 기독교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
성경 말씀에도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리로 들어가는 길은 협소해서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도 있다. 기독교 하면 믿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인가?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무엇이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란 무엇인가? 자기 십자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 성질이나 자기 집안 싸움 같은 것을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또 교회에서 대로 사역자의 십자가가 있다. 모든 것이 다 십자가다.
공원묘지에 가면 다 십자가가 있고, 교회마다 또 다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는 종교이다.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누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이 있는가? 물론 순교자를 보면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교자가 진 십자가가 예수의 십자가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 십자가는 예수 십자가이고, 순교자가 진 것은 순교자의 십자가이다. 베드로가 십자를 졌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구속을 받은 것도 아니다. 바울이 목이 잘렸는데 로마에 가니까 목 잘린 자리를 기념으로 그려놓았다. 목이 3번 뛰었다고 해서 3번 뛴 자리를 만들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예수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와 다른 것이다. 극형인데 고난이지 쉽겠는가? 그때로서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가장 부끄럽게 하는 형벌이다. 그 이외의 것도 물론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십자가 이상의 저주가 없다고 봐야 한다. 십자가는 고난인 것은 당연하고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진 분을 우리가 따라 가겠는가? 우리는 그 십자가를 져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 일수록 십자가를 어떻게 하면 지고 갈까를 생각한다. 찬송가에도 전부 그렇게 되어있다. 일반 찬송가를 보면 십자가에 대한 노래는 대부분 그렇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저녁에 내 몸인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과 다른 말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했으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만일 그렇게 해서 예수를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쉬운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과연 예수를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이 문제가 생긴다. 고통의 문제가 아니고 또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로 가려면 고통이 있어야 가는 것은 아니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지고 따르는 것은 아니구나. 그러면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했을까? 그 배경을 보면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하던 배경과 다른 배경이다. 율법주의적인 배경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것을 잡아서 예수를 따라 가려고 하면 나는 역시 율법주의적인 예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이 홀로 지신 십자가이지 결코 누구도 그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없다. 유월절 양은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다. 오직 한 분밖에 질 수 없는 십자가이다. 왜 같은 십자가인데 예수 밖에는 질 수 없는가? 그 십자가이지 무덤에 가 있는 십자가나 말끝마다 나오는 그 십자가가 이 십자가는 아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유일한 십자가다. 그분이 홀로 지신 유일한 십자가다. 아무도 그 십자가를 흉내 낼 수도 없고, 따라 갈 수도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관계가 없다는 말은 내가 그것을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그런 십자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
그것은 천로역정처럼 고난의 길인가?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십자가의 길은 그렇게 고난의 길인가? 그것도 아니다. 오랜 역사를 지났으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택해서 굉장히 시간이 지났다. 자기를 위해서 사람을 부르셔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우리까지 왔는데 얼마나 오래 왔는가? 아직도 그렇게 되면 누가 예수를 따라가겠으며, 누가 하나님께로 가겠는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성전에 가서 양을 잡아다가 제물을 드렸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께서 우리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대신 져주었다는 말인데, 대신 져주었다는 말이 굉장히 어렵다. 예수께서 어린양 대신에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은 내 생각 같으면 가장 쉬운 길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겠는가? 모든 사람 누구에게라도 가장 쉬운 길을 주시려고 지금까지 노력하시지 않았겠는가? 내가 우리 교회에서 해보니까 아무리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다. 마음으로 안타깝기는 어떻게 가장 쉬운 길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구라도 들으면 아멘 할 수 있는 그런 쉬운 길은 없을까? 불교에 가도 어렵고 유교를 가도 어렵고 다 어려운데 하나님만이라도 좀 쉬운 길을 줄 수 없는가?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교회 사역을 해보면 무슨 말을 하면 제일 쉽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나는 옛날에 교회를 할 때,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능력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있으면 정말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해도 안 되는데 그것만 있으면 그냥 믿는다. 너무 쉽다. 내가 아는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기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고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 중풍이 걸려서 의식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완전히 뇌자체가 마비가 되어 있는 판인데, 근처에 있는 **교회라고 그 교회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교회이다. 그 교회에서 와서 매일 기도를 하러 와서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어서 그냥 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까 아내가 말을 못했는데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 교회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백마디 말보다도 천마디 말보다도 이렇게 쉬운 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이것을 안 주시는가? 나도 뭣 좀 달라고 상당히 기도를 해보았다. 도저히 안 되었다.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복잡하게 전도하고 설교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저렇게 완고한 사람도 자기가 완전히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한방에 녹아버리는데, 이런 생각이 불같이 났다. 여러분도 다 한번씩 해보았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은사도 없고 재주도 없다. 40년을 말씀을 했는데도 아직도 깜깜한 사람은 깜깜하다. 아직도 전혀 깜깜한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도 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아마 하나님 같아도 나보다 더하지 않겠는가? 나는 불과 40년인데 하나님은 수천년인지 수만년인지 모르겠는데, 사람에게 복음인데 좀 쉬운 것이 없겠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 없을까? 한방이면 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그런 방법이 없을까?
나는 잔꾀인지는 모르겠는데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쉬운 길이구나. 찬송가를 부르는데, 가장 쉽고 또 가장 곧은 길이고 또 가장 완전한 길이구나. 이 생각이 딱 들었다. 가장 쉽고, 가장 곧고, 가장 빠르고, 그래서 유일한 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십자가가 쉬운 길인가? 세상에서는 가장 어려운 것이 십자가인데 어떻게 가장 쉬운 길인가? 이것이 역설이다.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어떻게 가장 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나도 그 안에 있다.”고 한다. 너무 쉽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어려운데 어린양을 잡아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하여 나온 것이 출애굽이다.
하나님에게는 참 쉬운 길을 우리가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쉬운 길~! 일반적인 십자가 같으면 모두가 다 져야 한다. 어느 종교를 가든지 꼼짝할 수 있겠는가.
예수 십자가는 내가 질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한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답이 없다. 그것이 답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한 것이 십자가뿐이다. 예수님을 똘똘 뭉치면 십자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전부를 다 검사를 하면 십자가 하나 밖에 남지 않는다. 너무나 단순하다.
늘 말씀 드린 것처럼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구속을 받는다. 우리가 지고 있어서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서 내가 구속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서 나는 구속을 받았다. 이사야 53장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4,5).” 그래서 내가 구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서 우리가 뭘 못 찾으면 아무것도 못 찾는 것이 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내 구속을 못 찾으면 아무 것도 못 찾는다. 성경을 백날 읽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십자가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고, 교회를 백날 다녀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와도 문 밖에 와서 서성거리다가 가는 것뿐이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우리 구속, 우리가 원 위치로 회복하는 것, 그 하나가 유일한 길인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가 아니고,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내가 죄사함을 받을 다른 방법이 있는가? 내가 회개하면 죄사함이 되는가? 내가 정신을 차리면 구속이 되는가? 어떤 것도 우리를 구속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어떤 종교도 좋은 말은 너무너무 많지만 나를 구속해 줄 말씀은 없다. 예수님이 지신 이 십자가 한 자리에서 밖에는 우리가 구원(구속)을 받을 수가 없다.
아담을 보면 아담 한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우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한다. 예수 한 사람이 십자가를 졌다. 그런데 우리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았다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우리가 다 주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예수님이 혼자서 십자가를 졌는데, 우리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았다. <그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혜택을 준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이다. 그 십자가를 지신 그분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그분이 나에게 어떤 혜택으로서 구속해주신 것이 아니고, 그분 안에 구속이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내 구속이 된 것이다. 내가 그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있는 그 안에 구속이 있다.
이것은 교리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방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이런 방법은 나올 수가 없다.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 민수기에 나온다. 뱀을 쳐다보면 된다. 창세기에 가면 먹음직도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먹었다는 것이다. 간단하다. 보고 먹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문제가 된다.
우리가 만일 직장 안에 우리 구속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아담이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그렇게 보인다면 간단하게 바로 즉시다. 이것만 보여준다면 이렇게 쉬운 일이 없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자기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시겠는가?
우리도 목회를 하면 누구를 만나면 이 사람이 언제 온전한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오죽하시겠는가? 절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주거나 어려운 숙제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숙제를 하나님이 주시겠는가? 가장 쉬운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십자가는 하나님께로 가는 최선의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고, 가장 바른 길이고, 가장 완전한 길이구나. 이 생각을 하면서 너무너무 좋았다. 늘 그런 것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기뻤다.
이 곧은 길로 내가 왔구나. 이 쉬운 길로 내가 왔구나. 내가 안 되고 어려운 사람인 줄 알고 하나님은 늘 쉬운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이 생각을 하니까 감사가 넘친다. 내가 뭐가 좀 있었으면 그런 쪽으로 갔을 것이다. 능력이 있는 것만큼 간다. 자기만큼 하나님께서 눈높이만큼 그렇게 그 사람에게 준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해도 해도 안 될 것이니까 가장 쉬운 길을 주신 것 같다. 내가 책을 쓰고 있는데, 나의 하나님은 말하기 전에 내가 청구하기 전에 내가 요구하기 전에 미리 다 준비해놓으신 분이더라고 쓰고 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해야 되고 다 해야 된다. 안 하면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내게 이루어진 일은 기도해서 이루어진 일이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오죽했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 오늘 길에 생각해 보니까 기도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목사라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면 교회가 되겠는가? 사실이 그렇다. 내가 얻었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것이지 내가 달라고 구해서 준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했던 것은 다 안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나를 특수 학생으로 취급하신 것 같다. 보통 학생이 아니고 특수반 학생으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선생님을 따로 붙여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뭘 해 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기도하라고 강조도 못한다. 그것이 안 된다고 해서 안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라는 말을 못한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하는 말이 이 교회는 기도가 없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들어도 할 수 없다.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와서 다 좋은데 성령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내가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말도 맞고 저 말도 맞지만 내가 안 그랬으니까 어찌하겠는가?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어이 없기도 하고, 어쩌면 아주 쉽기도 하다. 잘 보면 아주 쉽고, 잘못 보면 아주 걸림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책을 쓰긴 썼는데 누가 사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되었다고 해야 사람들이 관심이 갈 텐데,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되었다가 없고, 내가 필요할 때 길목에서 딱 기다리다가 딱 그 자리에 튀어나온 것 같다.
나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나 나를 앞서서 알고 계셨다.
모세에게도 하나님께서 내가 앞서 가겠다고 하셨다. 나는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이 알고 계실 텐데, 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좀 이상하다. 지난번에 조금 답답하여 밥 먹고 잠자고 또 일어나면 밥 먹고 잠자야 되고, 하나님이 살려준다고 살려놓고 이러려고 살려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녁에 안 하던 기도를 했다.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고 교회에 가서도 그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집에 와서 다시 생각을 하니까 아차 언제 내가 구해서 주었던가? 그 생각이 팍 들어왔다. 언제 내가 달라고 해서 주셨는가? 내 필요한 것을 다 알고 주셨는데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저녁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 기도는 끝나버려서 저녁에 기도할 일이 또 없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준비하신 하나님이다. 나는 나대로 살면, 나대로 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리만 제대로 잡으면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곧은 길, 가장 곧은 길은 십자가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외의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다 같다.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십자가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불교와 다르고 유교와도 다른 이유가 바로 그분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내게 주신 것이라면 그 짐이 가볍다. 내 짐은 가볍고 쉽다. 그렇다고 결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잔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이 준다면 쉽다. 그분이 준 것은 다 쉽다. 내가 하려는 것은 어렵고 그분이 준 것은 다 쉽다.
내가 어려우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땀이 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제사장은 땀이 나지 않아야 된다. 세마포 옷을 입고 땀이 나지 않아야 된다. 어렵다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봐야 되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 사는 일은 내가 극복해야 될 일이 많다. 돈을 벌려고 해도 그렇고 내 필요를 채우려고 해도 노력을 해야 되지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내 필요가 채워지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필요를 채우는 일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고, 나는 그 짐이 아주 쉽다. 누가 나에게 수고를 많이 했겠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수고한 일이 없다. 너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십자가의 길은 가장 쉬운 길이다. 어떤 사람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나 같이 아무것도 못한 사람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자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주님 자랑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전혀 못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청년들에게 마음을 잡고 뜻을 정해서 하나님께 바칠 생각을 하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못했지만 청년들에게는 말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이번에 말을 했다. 그래도 몇 사람 못 듣는다. 다 할 것 같지만 그렇게 안 되고 그 중에 한 두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생긴다. 그것도 사실은 내가 말해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그런 사람이 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보시면, 잘 모르면서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뭘 해야 되겠다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해도 그것과 상관 없는 사람이 많고 자기가 편하면 끝이다.
처음으로 절기 집회를 해 보았다. 나는 40년 동안 3.1절이나 8.15나 이런 절기에 특별히 집회를 해보지 않았다. 이번에 처음으로 청년부에서 3.1절 집회를 자기들이 준비하겠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 것이다. 젊었을 때 결단을 하라고 강조를 했는데 얼마나 따를 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그렇게 해보았다.
십자가의 길은 가장 쉬운 길이다. 너무너무 쉬운 길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복음이다. 우리에게 복음이다. 영원히 이것밖에 전할 것이 없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바울이 말했다. 그때는 그런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했다. 하도 여러 가지 말이 많으니까 그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말 때문이 아니라 어려워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렵게 생각해서 힘든 모든 사람에게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가장 쉽게 하는 것이다. 나를 쉽게 해준다. 그가 죽어주었으니까 가장 쉽다. 내가 죽을 것을 그가 죽어주었으니까 그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가 해주었으니까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내 대신 죽었다거나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나를 위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분이 내가 못한 것을 하셨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다. 그분을 먹기만 하면 된다. 그보다 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볼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세상은 전부 그것이 너무 좋아서 따라 다닌다.
지금 우리나라가 좀 걱정된다. 양편 싸움이 또 붙었다. 촛불과 태극기가 붙었는데, 쉽게 넘어가려는지 모르겠다. 만일 6.25때 조금만 잘못했으면 우리는 내전을 겪을 뻔했다. 조금 전에 6.25가 났더라면 내전이 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군대까지 남로당이 다 침투했었다. 여순사건을 보면 남로당이 그랬는데, 만일 6.25가 1년 전에 났더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지금 내전상태에 휘말려 든 나라를 보면 내전 상태가 참 무섭다. 우리는 다행히 6.25때 일사불란하게 반공을 했기 때문에 정말 다행이다. 세상은 지금 멋모르고 싸우고 튀고 뭔지 모르고 서로 싸우고 서로 옳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을 보고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안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쉬운 길이신 주님! 우리를 쉽게 하신 그분을 우리가 영원히 찬양하도록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