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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의 비밀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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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연합의 비밀
구약의 결론이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이라면, 신약의 결론은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다, 그분이 왔다는 말이다. 교회의 마지막 결론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했다고 정의해 볼 수 있다.
구약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내용 속에는 다윗과 같은 임금이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준다는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서에 나온 모든 내용들은 대부분 그런 특이한 왕이 와서 구해줄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렙31:33).”라고 한 것이 특이한 것이다. 이사야서에서는 그분을 가리켜서 어린아이라고 하기도 하고, 임금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버지라고 하기도 하고 신분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한 것 같다.
거기서 핵심적인 중요한 문제는 그분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하러 오셨는가? 이것은 대부분 다 알려져 있는데 좀 아쉬운 것이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성분을 가지고 있는 분인가? 하는 이 문제가 감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 그 안에 있고, 하나님 생각이 마음에 있는 어떤 존재, 그런 사람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사람을 신비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간과하고 넘어간 것 같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주로 그런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이분은 무엇을 하는가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도 저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저런 사람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생각했다거나 저런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메시아는 이런 이런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생각이고 기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게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으로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이 문제를 맞추고 있었다. 어느 때는 그럴 것 같이 보이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전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분을 모른다고 하고 간 것이다.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의 본질이나 그분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접촉한 바 없고, 단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느냐? 여기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때만 그랬으면 다행이지만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하는가? 예수는 어떤 일을 하는가? 여기에 모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예레미야 31장 말씀은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렙31:33).”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 법이 속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마음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요한이 표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명백하게 말하지 못했다고 생각되고, 요한이 그것을 명백하게 말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사람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렙31:33).” 라고 했던 그 사람이다.
생명에 접근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요한만큼 깊이 예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늘 관심이 있고 주안점이 있다. 일 보다는 그분의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하나님 목적 안에서 생각해보면 창조를 하고 구원을 했는데, 창조의 본질, 성질이 무엇인가? 여러 만물들을 지었다는 것보다도 사람을 지으신 것이 중심이다.
사람을 어떻게 지었는가, 어떤 방법으로 지었는가 보다도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으니까 예레미야 31장에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하나님 형상을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인데, 무엇을 보고 그렇게 지었는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려고. 쌀자루를 만들려면 쌀의 모양과 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옛날 쌀자루를 보면 쌀처럼 만드느라고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책가방을 만들려면 책의 형상을 따라 책의 모양대로 만든다. 그래야 책가방이 된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만든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 안에 하나님 자신의 법과 생명을 넣기 위해서다. 사람은 그렇게 지어진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이다. 다른 모든 만물들이 자기 격을 갖고 있다면 사람에게 특별히 인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성품을 담기 위함이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담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생명과 연합하게 하려 함이다. 책과 책가방이 연합하듯이 책과 책가방이 연합되어서 책가방이 된다. 적립금과 저금이 연합해서 적금이 된다. 그와 같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연합시키기 위해서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만들어야 된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연합을 하게 하려는 것은 그렇게 연합을 해야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수가 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땅에 왔는데 있을 자리가 없어서,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배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이다. 이 땅을 회복한 마지막이 무엇인가? 사람을 지어서 사람과 연합하려고, 땅에 내려와서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구체적으로 연합해서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것이다. 땅 위에서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 말이다. 땅 위에서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은 왕궁이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그 말이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 그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 대로 사람을 만들어서 그 안에 자신의 생명을 넣어서 둘이 연합하여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인격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인격이다. 능력으로 말한다면 다른 것이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보다 능력이 많은 것도 얼마든지 있고, 또 아름다운 것도 얼마든지 있다. 자연세계를 보더라도 놀라운 것이 너무너무 많다.
그런데 왜 사람인가?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꼭 사람이어야 된다. 우리는 그런 위치에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벅찬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연합하기를 원한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남자와 여자, 동물 세계를 보면 암수라고 할 수 있다.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라고 말하고 있다. 연합을 말하려고 남자와 여자로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해야 생육하고 번성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이 없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 혼자서는 하나님 백성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백성이 필요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지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을 더 좁혀서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2장이다. 사람을 지을 때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하였다. 산 혼의 정체는 결국 연합을 위한 정체이다.
산 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하나님과 연합을 위한 기능이다. 사람을 영으로 지은 것 같지는 않다. 혼으로 만들었다. 혼이 사람이다. 혼이 떠나면 사람은 없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혼이 떠났다는 말이다. 의식이 없어져버렸다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 없으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안 된다. 사람은 의식을 가진 존재인데 그 의식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특이하다.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거기서 달라지게 된다. 무엇이든지 보면 보는 것을 형상화할 수 있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든지 들으면 그 들은 것을 모두 형상화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의 특색이다. 무엇을 보고 형상을 만드는 것은 다른 동물들은 불가능한데, 사람은 그것이 가능하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혼으로 지어졌다. 혼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끝나면 죽는 것이다. 혼이 떠났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다.
2장에 가면 사람을 산 혼이 되게 했다. 하나님과 연합을 위한 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다른 것과 연합한다. 원래 연합하도록 만들어졌다. 병은 무엇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물을 담지 않으면 술이 들어가고,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물이 들어간다. 아무것도 담지 않으면 공기가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혼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들어가서 무엇이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할 것인가? 아니면 마귀와 연합할 것인가? 이것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된다. 다른 동물은 그렇지 않다. 도둑놈이 개를 키우나 공자님이 개를 키우나 개는 매 한가지이다. 키우는 개가 공자님하고 연합할 수도 없고, 도둑놈하고 연합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은 가능하기 때문에 혼으로 지었다. 우리는 철저하게 혼이다. 혼은 끝나버리면 없어진다. 혼비백산이라고 하는데 혼은 나가고 백은 흩어진다고 혼백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연합이다.
무엇과 연합하는가? 많은 만물을 지었는데 왜 끝나지 않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었는가? 그것은 자기와 연합할 존재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와 연합할 수 있는 존재가 원숭이까지 왔지만 원숭이로는 안 되니까 사람까지 왔다. 침팬지나 우랑우탄을 보면 사람과 비슷하지만 역시 사람이 안 된다.
사람이 나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유는 혼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연합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진다.
창세기 2장의 마지막은 결국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고 아담과 하와가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고 끝났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를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에서 가장 좋은 모델이 남자와 여자다. 결혼한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남자 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다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생리적으로도 완전히 다르지만 사람이라는 격은 똑같다. 한 격이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자연현상을 이용해서 하나님 말씀을 계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뒤집어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래서 이렇게 만들었구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생각하면 이런 자연현상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구나를 알 수 있다.
로마서에 보면 지으신 바 만물을 보아서 지으신 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만물을 봐도 지으신 것을 봐도 하나님 생각과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 생각을 알고 만물을 봐도 이것이 그것이구나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다. 우리가 알기 쉽게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을 보라고 하면 어디에 가서 보겠는가? 식물에 가서 본다. 식물처럼 생명력이 강한 것이 없다. 생명이라고 할 때 식물이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있다.
동양사람들은 연합이라가 보다는 합일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 이유이다. 합일이 되어서 신이 되려는 것이다. 신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 연합은 신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합일되는 것이 아니고 연합되는 것인데, 둘이 다르면서도 한 목적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합일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을 창세기 3장으로 해석하면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던 것이 동양에서는 합일로 나타났고, 서양에서는 그 어떤 특수한 능력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동양에서는 신비주의적으로 해석되었고, 서양에서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어떤 것, 또 어쩌면 사람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했다. 서양에서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우월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동양에서는 신비롭게 신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연합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은 끝까지 사람이다. 사람이 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끝까지 사람이다.
하나님과 연합해도 사람이고, 연합하지 않아도 사람인데, 연합하면 온전한 것이 되고 연합하지 않으면 반쪽밖에 안 된다. 그리고 잘못하면 다른 것과 연합되면, 마귀와 연합되면 그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누구와 연합되었는가? 마귀와 연합되었다. 그로 인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바로 마귀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무엇이 만들어졌든지 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마귀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 마지막이 바벨론이다.
그 마지막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다. 그 바벨탑이라는 그 내용 속에 지금 인류가 만들어놓은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고, 별 것이 다 있다. 좋은 것은 하나님 것이고, 나쁜 것은 마귀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전체가 다 사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쓰여져야 할 인간이 하나님 영광이 아닌 다른 것의 영광을 위해 쓰여졌다는 말이다. 그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좋은 것은 하나님 것이고, 나쁜 것은 사탄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야 되는가? 바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이 바벨론이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 갈대아우르이다. 갈대아우르는 바벨론이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다른 세계다.
사람은 같은 사람 같은데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는 바벨론으로 가고, 하나는 이스라엘로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연합에 따라서 하나는 사탄을 위한 것이 되고,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고 했다.
이번에는 출애굽에서 또 한 번 확장이 되었다.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 가나안으로 가는 데는 애굽은 추호도 없어야 된다. 마지막 누룩이 다 없어졌다. 마지막 반죽이 다 없어졌다. 그래서 만나를 먹게 된다. 그 말은 애굽에 있는 것은 없어져야 된다. 바로가 준 양식은 없어져야 된다. 사탄이 준 양식은 없어져야 된다. 이런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데는 사탄이 준 양식이 없어져야 된다. 그 양식이 떨어지고 새로운 양식을 먹어야 된다.
이스라엘은 양식을 바꾸었다. 떨어졌으니까 할 수 없이 바꾼 것이다. 그때는 먹을 것이 없어지니까 하나님을 원망을 했다. 하나님은 원망할 때까지 기다려서 만나를 주었다. 왜 만나를 주었는가? 양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었던 양식을 바꾸어야 했던 것처럼 애굽이 준 양식을 바꾸어야 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준 양식을 먹고서는 무엇을 했는가?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있었다. 그 양식을 먹으면 그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삼성회사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으면 당연히 삼성을 위해서 일해야 된다. 거기서 돈을 주니까.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양식을 주었으니까 애굽의 일을 해야 된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양식을 먹으면 세상을 위해서 일해야 된다. 우리가 직장에 나가면 8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노동시간을 줄이는가가 과제가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해야 될 일 같으면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이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노동을 적게 할까? 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하는가? 놀아야 된다. 직장에 가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 여자들은 집에서 외로우니까 남자들이 직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들은 또 집에 붙어있으려면 답답하니까 돌아다니고 싶다. 무엇인가 지금 있을 것이 없고 채워야 될 것이 없고 헛것이, 다른 것이 채워졌다. 부득이하게 애굽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했던 것처럼, 애굽에서 일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 몇 시간 노동이 꿈 같은 일일 것이다. 하루만 쉬었으면 할 것이고, 일만 조금 적었어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에 살면서 그 일을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좀 적게 하고 인생을 즐길 수 없는가? 이것을 생각한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반대로 시간이 모자란다. 주 몇 시간 하면 되느냐, 이것이 아니고 전 생애를 다 드려도 모자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 천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면 내가 살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내가 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세상 일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천생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일을 해야만 될 사람으로 만들어졌다. 만일 우리 일생의 모든 시간을 전부 주님을 위해서 쓸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다.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면 이해를 잘못했든지 오버한 것이다.
목사들도 휴가 좀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휴가를 왜 가는가? 무엇 하러 휴가를 가는가? 나는 한번도 휴가를 가보지 않았다. 휴가를 가면 아무 일도 없고 정말 심심할 것 같다. 몸이 피곤하면 집에서 쉬면 되고 휴가를 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일은 휴가가 없다. 휴가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생명이 있을 동안, 목숨이 있을 동안,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복된 일이 없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하나님 일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 만일 피곤하다면 일을 잘못해서이다. 일을 했기 때문이고, 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의 표현을 했더라면 노동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을 했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다. 40대에 간경화가 걸렸거나 간암으로 죽은 목사가 많다고 한다. 얼마나 일을 했으면 그렇겠는가.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렇겠는가.
이것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니다. 내 생명의 표현이다. 가수들이나 탈렌트들이 마약을 한다고 하는데, 자기들이 뭔가를 표현해야 되는데 자기만 갖고는 안 되는 모양이다. 마약을 먹고 150% 200%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기에 마약을 먹을 것이 아니고, 소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표현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만큼 내가 즐겁고 영광스러운 것이 없어야 된다.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마음을 표현한다는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어떻게 있겠는가? 무엇을 하면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버러지 같은 인생이 이 속에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 마음이 나온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 아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몸에 땀이 나지 않아야 된다. 제사장 일은 절대로 노동이 아니고 그 자체가 축복이다.
내가 어쩌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내가 조건이 좋았고 능력이 좋았다면 나도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조건이 안 되고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오후 3시까지 아무 일도 못하고 있으니까 길 어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노동시장에 가보면 새벽에 일찍 나온다. 겨울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일꾼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데리고 간다. 봐서 힘도 있고 일도 할만하고 성질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을 차출해 간다.
그런데 차출을 못 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일을 써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 비참하다. 자기 집에는 밥을 기다리는 입이 기다리고 있고, 새벽부터 나갔는데 아무도 자기는 안 데리고 간 것이다. 모닥불은 다 타버리고 해는 중천에 뜨면 갈 데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오후 3시까지 갈 데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후 3시에 온 사람을 불러다가 아침 일찍 온 사람과 똑 같은 임금을 주더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 딱 붙잡힌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에게 붙잡히면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되어서 그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부가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바로 이 사람이다. 거지를 불러다가 자기 신부로 삼겠다는 말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자기 신부로 삼겠다는 말이다.
거지가 왕자의 신부가 된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다. 왕자의 신부가 되면 다음에 누구를 낳는가? 왕자를 낳는다. 거지 신분에서 왕자를 생산하는 왕비가 된다. 하나님과 연합해서 신부가 된다면 물론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존재이지만 우리를 통해서 왕자가 생산된다. 하나님 나라를 이어 갈 왕자가 생산된다.
이것이 신분상승이다.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신분이 금방 상승된다. 트럼프 대통령 부인을 보니까 원래 패션계 모델인데 대통령 부인이 되었기 때문에 영부인이 되었다. 공부를 잘해서 영부인이 된 것이 아니고 트럼프의 마음에 들어서 눈에 들어서 영부인이 된 것 같다. 잘생기고 미인이니까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딸을 봐도 키도 크고 미인이다. 부인도 역시 마찬가지다. 모델 출신이 신분 상승이 되어 왕비가 되었다. 전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시집만 잘 가면 신분 상승이 된다. 금방 신분이 상승된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남편을 잘 만나면 신분이 상승된다. 오후 3시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만 잘 만나면 신분 상승이 된다. 아침 일찍 와보았자 주인 잘못 만나면 별 볼일 없다. 아침 일찍 가서 부름을 받았는데 청소만 하고 가라고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후3시까지 기다렸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데리고 갔는데, 굉장히 귀한 일을 시키고 돈도 많이 주었다면 얼마나 땡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지어져서 하나님과 연합한다면 그보다 완전한 것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나도 젊은 날에 사람이 되려고 생각했으니까 사람 되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이 볼 때 저 사람 참 괜찮다는 말을 듣게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는데, 내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기는 어렵다. 나도 나름대로 칭찬 받고 자랐다. 그런데 내 속에서 내가 만족이 안 되는 그것이 어렵다.
사람이 완전해지려면 그런 차원에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연합을 통해서 완전해진다. 여러분들은 다 목회를 하시니까 대상이 성도들이다. 성도들과의 연합이다. 성도들과 연합이 되면 내가 온전한 목사가 되는 것이고, 연합이 안 되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반석을 쪼개는 은혜가 있다고 해도 불완전하고 쓸모가 없게 된다.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성도들과 연합이 되면 행복하다. 성도들이 다 훌륭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내가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연합하는가? 전혀 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과 연합이 되면 더 행복하다. 더 완전하다.
고를 것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면 이것이 내 배필이구나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내가 보기에 흠이 없도록 만들어야 된다. 신부는 내가 만들어야 된다. 만들어진 신부를 데리고 오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만들어진 신부를 데려다가는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 잘 만들어진 신부는 데려다 놓으면 나를 무시한다. 미인은 자기를 사랑하지 남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미인을 좋아해보았자 행복하지 않다. 미인은 자기만 위하라고 한다. 내가 미인을 만들어야 된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내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행복이다. 거지를 데려다가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때가 끼어서 보기 싫던 사람이 목욕을 시켜놓으니까 하얀 살결이 나왔다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뭘 가르쳐 놓았더니 머리가 트였다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집에서 쫘악 갖추어서 온 신부가 있으면 이 집에 와서 행복하겠는가? 남자를 볼 때 행복하겠는가? 그런 남자들은 일생 동안 종살이 하다가 만다. 뒤치닥거리 하다가 만다. 만족이 없으니까 계속 만족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해 줄 밑천이 있는가.
하나님 목표는 연합이다. 우리는 연합으로 완전해질 사람이다. 내가 연합으로 완전해진다고 생각하니까 짐이 확 풀어졌다. 내가 홀로 완전하게 되어서 주님을 잘 믿고 충성도 하고 마음에 모든 것이 주님만 향한다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되더라. 내 속에 통일이 안 된다. 갈등이 통일이 안 된다.
그런데 둘이 연합해서 한 육체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쉽다. 하나님과 연합해서, 둘이 연합해서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완전해야 하나님과 연합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내가 완전하다고 하나님과 연합이 되겠는가? 내가 얼마나 완전하면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을 하겠는가? 반대로 내가 온전치 못하니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내가 행복해진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접촉하면서 살아보니까 이렇게 좋은 분이 없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너무너무 딱 맞는 분이다.
어제도 <주의 손에 이끌려> 원고를 정리하다가 한참을 울었다. 너무너무 감사해서 울었다.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너무너무 행복하더라.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을 이끄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함 몰랐으며~’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눈물이 나오더라.
뒤에서 아내가 다른 것을 하고 있었는데 ‘여보 나 지금 이러고 있는데 눈물이 나네.’ 옛날 일을 생각하니까 그러더라. 내가 잘 났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 자기 이름을 위해서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내가 혹시 불의했을지라도 내 불의한 것이 드러나면 자신이 부끄러워지니까 자신이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나를 감춰줘야 된다. 자신이 의로워져야 되기 때문에 내 허물을 덮어줘야 되는 것이다.
내가 해봐도 우리 교회 어떤 형제나 자매가 어떻게 잘못을 했다고 하면 그것이 누구에게 돌아오는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그 형제는 이러이러하더라 하면 그것은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욕이다. 그러니까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덮고 싶다. 내 이름을 위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내 이름을 위해서 나는 그것을 덮고 싶다.
여러분도 자녀들을 키우면 그렇다. 자녀가 나쁘다고 동네에 까발리고 다니겠는가? 다른 사람이 혹시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떻게 하든지 나는 변명을 해서 덮으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저거 아무개 아들일세, 저거 아무개 딸인데 저래. 이럴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니까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위해서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더라. 자기 이름을 위해서, 시인들이 선지자들이 좋아했던 여호와 하나님, 제자들이 사랑했던 예수, 다 그런 분이다.
내 허물을 왜 덮어주는가? 자기 이름을 위해서. 그런 일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하다. 내가 어떻게 완전해지겠는가? 내가 어떻게 내 모든 짐을 벗겠는가? 그런 주님을 만났으니 내 짐을 벗는 것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나를 다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그분 앞에 내가 자유가 생긴다. 진실로 나를 아는 분 앞에서 나는 자유가 생긴다.
연합의 비밀은 무궁무진하다. 그분이 나를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너무너무 행복해진다. 그분이 나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안다면. 전에는 내가 그분이 필요했다면, 어떻게 끌어당길 수 없는가? 어떻게 좀 가까이 할 수 없는가? 이렇게 하니까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오시는 분 같지만 그렇지 않고 자기가 필요해서 오시는 분이다. 필요한 분은 행복하다.
어떤 자매가 있다. 너무 재미있는 말인데,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든지 안 하든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내가 좋으면 됐지, 내가 사랑하면 됐지, 사랑 안 해주면 뭐하고 해주면 뭐하냐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데 와 저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저런 여자의 행복을 누가 뺏겠는가? 아니 그 사람이 잘해주면 뭐하고 못해주면 뭐하겠나. 내가 잘해주면 되고 내가 좋으면 되지. 우리교회에 그런 자매가 하나 있다.
정말로 사랑하면 불행이 없는 것 같다. 잘 못해주어도 불행이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그분의 이유가 나보다 많다.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보다 그분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훨씬 더 많다. 배짱을 내라. 하나님이 더 나를 필요로 한다. 남편이 나를 정말 더 필요로 한다면 자매님들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나보다 더 나를 남편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을 하면 행복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보다 더 필요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한 것은 정말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좌편에 앉을까 우편에 앉을까, 이런 소리나 하고 다니는 그런 필요였다. 해보았자 장관이고 잘못하면 쇠고랑 찬다. 어제 국방장관 하던 사람이 오늘은 묶여서 가는데,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그런 수준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이 속에는 영원한 친구다. 나는 내 이유 때문에 따라 다니다가 수틀리니까 달아났지만 그분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 그분과의 연합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덮어버리고 해결해버리고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간다. 전혀 다른 세계로.
그래서 계시록 마지막은 연합이다.
계시록을 사람들이 예언, 점쟁이 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모양인데 점쟁이 책이 아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사람들이 모두 싫어 버린 예수, 자기들도 무시했던 그 예수가 이제 아름다운 신부를 맞아 신랑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 영광스러운 신랑, 그 영광스러운 신부, 그것이 마지막 결론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더라. 그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버려졌던 어린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린양이다. 자기들의 주님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또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있으면서 “내가 주의 날에 영안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영안에 있었더니 하고 본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그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이 혼인을 하는 자리이다. 결혼을 불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다 걷어지고 아름다운 신부가 예비 되니까 그 신부와 만나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른다는 것이 계시록의 결론이다.
성경 전체의 결론은 마지막에 가면 결국 연합이다. 우리의 행복은 연합에 있다. 둘이 하나로 연합되는. 둘이 똑 같아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니고 연합하는데 다 짝이 필요하다. 주인에게는 종이 필요하다. 아까 말한 오후 3시까지 못 팔려간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주인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도 혼자 있을 필요는 없다. 다 짝이 있으니까.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한다. 부부간도 보면 객관적으로 보면 잘 안 어울린다 하는데 행복한 부부도 있고, 저 부부는 멋있어 보이지만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연합은 비밀이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은 신기한 비밀이고 그 결혼은 신기한 결혼이다. 그래서 교회는 별 사람이 다 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남을 걸리게 하는 사람은 계속 걸리게 하고 욕을 얻어먹는 사람은 늘 욕을 얻어먹는다. 하도 욕을 계속 얻어먹고 하니까 다음에는 욕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욕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다 필요하다. 나도 처음에는 학생 선교를 했으니까 젊은 학생들로 모이면 얼마나 좋겠나 했다. 좋을 것 같은데 충주에 있을 때는 고등학생과 공전밖에 없어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처갓집이 그 가까이에 있었는데 한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딸이 삐쩍 마른 전도사에게 시집간다고 하니까 그것도 한심했는데, 반대하다가 안 되어서 승낙을 했다. 장인어른은 하도 속이 상해서 결혼식장에 나오시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내가 하필 그 동네로 발령을 받았다. 바로 그 앞이다. 그런데 C.C.C.라고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큰 교회의 장로가 C.C.C.를 보면 우습다. 그런데 사무실이라고 가보니까 고등학생들 몇 명이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장로교 장로님이신 장인어른께서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한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하는데도 전혀 나는 꿀려 본 적이 없다. 장인어른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엑스폴로 74의 비전에 가슴이 벅차고 있을 때이다. 금방 대한민국이 복음화 되겠구나 하는 소망이 차 있을 때인데, 나를 무시하고 뭐하고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뒤로 들으니까 그렇다.
집사람이 지혜롭다. 결혼 전에는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전혀 몰랐다. 환영해서 시집 온 줄 알았는데, 상당히 반대가 있었던가 보다.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서 이래서 되겠냐고 했는데, 집사람이 담대하게 대답을 했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아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로님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다가 청주로 가게 되었는데 청주는 대학생이 많고 아이들이 질도 좋고 순수하다. 다 준비되었는데 막상 발령이 날 때는 충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충주로 왔다. 어떤 사람이 청주를 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대구로 밀려났다. 대구로 온 것도 사실은 밀려난 것이다. 대구 C.C.C.가 별로 안 좋은 곳이다. C.C.C. 간사 중에 대구에 왔다가 다시 살아 올라간 간사가 없다고 한다. 다 여기가 종착역이다. 나는 그때 그것을 모르고 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렇더라. 나를 청주로 보내줬더라면 나는 기분 좋게 갔을 것인데, 대구로 보냈기 때문에 뭔지도 모르고 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라고 하니까 간다고 하고 왔다. 나중에 들으니까 그렇던데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가 좋은 데인가 나쁜 데인가 이런 것은 나하고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단 몇 명이라도 말씀을 들으러 오니까 그것이 너무 좋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60명 정도 있었는데 다 떨어져 나가고 15명 정도가 남았다. 그런데 전혀 불안하지 않고 어째야 되나 걱정하지 않았다. C.C.C.에서는 그러면 쫓겨나야 한다. 60명의 학생이 15명이 남았으면 월급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 이 생각이지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거기서 하나씩 둘씩 불어나서 50명쯤 불어나는 판에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 그때 15명 남은 그 사람들이 몇 사람은 나갔지만 거의 다 지금 교회에 남게 되었다. 말씀을 좋아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 하더라.
그래서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줘도 말씀이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힘이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소용이 없다. 갈 때가 되면 다 가버린다.
연합은 결국 연합할 사람끼리 연합이 된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그것이 자기에게 좋은 사람, 그 사람은 나와 연합이 가능한 사람이다. 내가 전한 말은 무엇인가? 내 자신을 이야기한 것이니까. 내가 성경을 이야기하고 뭘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용을 보면 다 내 자신이다.
설교하는 사람이 설교를 하면 설교는 듣는다. 그 설교가 아니고 설교하는 그 사람 자신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 사람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연합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설교와 사람은 분리된 줄로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을 통해서 말한 것뿐이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내 자신이다. 왜냐하면 내 자신으로밖에는 예수를 모른다.
내가 예수를 아무리 말을 해도 내 자신으로 본 예수밖에는 말할 수 없다. 사도들이 증거한 예수는 다 사도들이, 자기들이 본 예수이다. 실제로 예수가 어떠했는지는 우리는 다 모른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보고 만나서 그가 연합해서 알아진 예수다. 사도들의 말은 다 사도들의 말이다. 베드로서를 읽어보면 베드로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그것은 바울이다. 예수를 말하지만 다 바울이다.
우리는 연합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린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어떻게 그 연합이 가능한가? 이것이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필요하다. 그 안에서 밖에는 우리는 하나로 연합될 데가 없다. 왜 예수님은 그 자리로 갔는가?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이다. 그분도 연합하고 싶지만 우리와 연합이 안 된다. 제자들과 얼마나 연합하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안 된다. 십자가에서 밖에는 연합이 안 된다. 그 사람밖에는 연합할 사람이 없다.
십자가에서 연합이 없으면 멸망이고 연합이 있으면 생명이다.
생명과 멸망, 남자와 여자가 연합을 안 하고 못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멸종된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멸종이다. 종자가 없어져 버린다. 만약 이 우주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없어져 버린다면 우주 안에 모든 생명체는 없어져 버리고 만다.
어떤 생명이든지 간에 연합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는 이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연합이 되면 영원히 번성하게 되고 연합이 되지 않으면 멸망이다. 동물의 세계로 보면 없어지는 것이지만 이 생명은 멸망이다. 멸망이라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완전히 쓸모 없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인간은 인간인데 하나님에게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창조된 것은 창조된 것인데 쓸모가 없는 피조물이 되어버렸다. 멸망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생물로 보면 목숨이 없어지고 씨가 없어지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보면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연합이 안 되면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 그러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텐데 하나님 나라는 안 된다.
예수는 유일한 우리의 희망이다. 온 인류의 희망이다. 우리의 희망이다. 그 안에서만 연합이 가능하다. 다른 데서 연합이 가능하면 누구든지 말해주라. 나도 그리로 가겠다. 다른 것으로 연합이 가능하면 나도 지금까지 한 말을 모두 취소하고 그리로 가겠다. 신비주의에 빠지든지 그런 길밖에 없다. 아니면 천당으로 가든지 이 길밖에 없다. 이 연합이 안 되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천당을 만들어버렸고, 한쪽에서는 신비주의로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그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욱 연합을 더욱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모른다. 연합을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우리는 몰랐다. 그분의 갈망 속에 들어있다. 그분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 나와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구나.
그런데 하나님을 보고 불완전하게 말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귀가 무엇 때문에 뚫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그럴 것이다. 하나님이 갈망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더니 아니 하나님이 완전하신데 무슨 갈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냐고 한다. 하나님이 배 고프시다고 했더니 하나님이 무슨 배가 고프냐고 한다. 물론 말도 좀 잘해야겠지만 귀가 제대로 열려 있어야 된다.
성경은 다 그렇다. 눈도 중요하지만 귀가 중요하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귀 있는 자는, 계속 그런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귀가 아주 필요하다. 귀가 어두워지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된다. 나이가 먹으면 귀가 제일 먼저 어두워진다. 그러면 말을 옆에서 해도 못 듣는다. 눈으로 못 보는 것도 답답하지만 귀로 못 듣는 것도 답답하다.
우리는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안에서 연합의 길이 열려있다. 그분에게로 가는 길, 그것은 연합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이 천당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분과 내가 연합하는데 이것을 천당과 바꾸겠는가? 천당이 좋은 사람은 그곳으로 가고 그래야지만 별수 없다.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계7:9).” 계시록에 그렇게 나온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복음을 전해서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완전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그 말이다. 나라와 민족과 방언과.
사람과 사람의 연합, 이것을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로 비유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초대교회도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연합이라는 말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받아서 신부로 삼았어야 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배척해서 모두 홀아비 생활을 하는 것이다. 홀아비 생활을 하면 냄새만 난다. 이상하다. 남자는 여자와 같이 살지 않으면 이상하게 고약한 냄새가 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잘난 맛에 자기들에 관한 좋은 신부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것이 최종적인 연합이고 여기서 새 예루살렘이 일어났다. 우리를 이런 자리로 부르신 것을 나는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4년 동안 성경을 배운다고 배웠는데, 어디서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몰랐다. 조그만 신학교이니까 성경 강의밖에 없었다. 신학시간은 별로 없는 데도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모르고 들었다. 우리 선생님은 일제 시대 사람이라 일본말밖에 모르니까 이분이 참고할 수 있는 서적은 일본 책밖에 없다. 그러면 일본에서 유명한 성서학자가 우찌무라다. 그분의 책을 늘 보시더라. 대본이었다. 내가 우찌무라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배웠던 성경의 주석이 대부분 그분에게서 나왔을 것 같다. 동양이 낳은 세계적인 성서학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이 어디고 시작이 어딘지 모르고 들었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신학적으로 정리하려고 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최소한도는 알아야 한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 영생이 연합이라는 말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3).” 원문이 조금 다르지만 그런 뜻이다. 영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연합하면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영생이고, 형제가 연합하면 영생이다. 다 연합이다. 연합이 안 되어서 다 문제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로 연합이 안 되어서 문제이다. 촛불과 태극기가 맞붙었다. 촛불이 이겨도 곤란하고, 태극기가 이겨도 곤란하다. 촛불이 이기면 태극기가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기인데 태극기가 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지금 그것이 불이 맞붙었다고 한다. 뉴스에 안 나와서 그런데 태극기 집회가 주말이 되면 버스를 빌려서 서울에 엄청나게 올라간다고 한다. 예전에 촛불집회 하듯이 그런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모르겠다. 오나가나 연합이 안되어서 문제다. 어디 가든지 둘이 하나가 안 되니까 그것이 불행이다.
이제 영원한 연합의 길을 찾은 것이다. 영원한 연합의 길! 누구하고도, 누구와도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로 만나지면 전혀 남이 아니고 나하고 무관한 사람이 아니고 보기 싫은 사람도 아니고 보기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와 연합할 대상이고 생육하고 번성할 대상이다.
좌우간 결혼하고 나니까 애기를 낳더라. 좌우간에 좋으니 나쁘니 해도 결혼을 하니까 애기를 낳더라. 좌우간에 연합을 하면 무엇이 나온다.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애기를 잘 낳는가? 그렇지 않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결혼을 하니까 애기를 낳더라. 우리도 좋은 사람이든지 나쁜 사람이든지 연합을 하면 무엇이 나온다.
특별히 우리 사역하는 분들은 교회를 해보면 교회 안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다. 속 썩이는 사람은 계속 속을 썩이고 그렇다. 그런데 다 신부로 생각을 해라. 신부로, 나와 연합할 대상으로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갈 곳이 많은데 하필이면 나에게 오겠는가. 어디 교회가 없어서 나에게 오겠는가. 자기는 내가 필요해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좋은 교회 많이 놔두고 하필이면 나에게 와서 이단소리 들어가면서 오겠는가. 자기는 갈 데가 없어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갈 데 없는 사람을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에게 온 사람을 여러분이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받아서 평생 같이 살 배필로 생각하면 거기서 뭐가 생산이 되어도 다 생산이 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신묘막측 하고 놀랍다. 놀라우니까 주신대로 받고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삶이 되게 된다.
어떤 자매는 하도 열망이 강해서 내가 그랬다. 너와 나는 할 수 없이 지옥까지 같이 가야 되겠다고 했다. 내가 지옥이라도 같이 가마. 다른 사람은 다 시끄럽다고 난리인데 그 사람은 그래야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을 시끄럽다고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디로 가겠는가? 내가 지옥이라도 같이 가줘야 안 되겠는가? 어제도 집에 왔다 갔다. 왔다 갔는데 하여간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가 너와 지옥까지 같이 갈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누구라도 자기를 안심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다 정상화 될 수 있고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 사역자 되신 분들은 이런 책임이 있다. 내게로 온 자를 내가 내쫓지 않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다. 공연히 오지 않는다. 저런 사람은 없으면 좋은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공연히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이 넓은 세상에서 누가 내게 오겠는가? 그래서 정말 그 사람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나에게 꼭 맡겨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한테 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볼 때는 아주 형편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까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다.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도 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고 이런 사람들인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그런 사람들이 남아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했다. 똑똑한 사람은 다 가버리고 그런 사람이 열두 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사도가 된다. 누가 어찌될지 모른다.
하여간 내게 주어진 대로 받으면 다 복이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찾아온 사람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여러분이 필요하겠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 어디 가서 좋은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려고 찾아봐라. 없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놓으면 그 사람은 얼마 안 가서 배신한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다니려고 하지 마라.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좋다고 온 사람이라야지 내가 좋다고 찾아간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결혼을 할 때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렇게 잘 안 된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안 된다. 남자들은 그것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닌다.
몇 년을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7년을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2년을 쫓아다녔다고 하는데 와서 얼마나 싸우는지. 하도 싸워서 어떻게 결혼을 했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어떤 가게의 점원을 하는데 2년을 쫓아다녀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얼마나 싸우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좋다고 쫓아다녀서 결혼을 했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문제가 생겨서 몸살을 앓고 있는 젊은 아이들도 있다.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해도 말을 안 듣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몸으로 때워야 한다. 몸으로 때워서 고통을 받아봐야 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택하면 좋지만 목회하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택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택해 온 사람들을 내가 잘 보살피면 된다. 그 사람이 내 사람이고 내게 맡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이 예전부터 생각이 나더라. 왜냐하면 전도를 해보면 안 올 사람은 아무리 해도 오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쉽게 오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사람이 없구나 이런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 사람을 내가 홀대하면 되겠는가? 존중하고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도 그런 일로 인해서 문제는 많이 생긴다. 내가 원하는 사람만 온다면 문제가 안 생기겠지만 자기가 나를 필요로 해서 온 사람은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이다. 내가 감당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감당을 해주겠는가? 그러니까 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운명이다. 목회하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일을 또 하시니까 우리가 거기서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에게는 필요한 사람이구나로 알게 된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때 진짜로 그런 사람이 나를 더 필요로 한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떤 환경이 올 때 그런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내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연합이 비밀이다.
질문:
오늘 목사님 말씀을 만일 신학교에서 강의하신다면 영락없이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영혼육 삼분설과 영육의 이분설이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혼과 육의 이분설을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질문이고, 두 번째는 목사님께서 사후세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이 연합의 비밀과 연합 자체가 영원한 것,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아마 이것을 불신자 세계에 가면 100% 공감하고 박수를 칠 것인데 우리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기존에 형성된 것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이대로 사라져버리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가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는 우리 의식의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잠재의식의 세계도 있는데,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3~4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을 의식의 세계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목사님께서는 의문을 낳게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답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현래목사님:
속 시원할지는 모르겠는데 영과 혼과 육이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데살로니가인가 어디에 나오는 말이다. 장로교는 전통적으로 이분설을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삼분설로 봐서 이것이 워치만니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대목이다. 이분설인데 삼분설이라고 말한다고.
지금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로교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이분했다. 나도 그때 처음 들을 때, 영혼과 육체는 애매한 것이 많다. 영혼 Sprit이라는 것을 오순절쪽에서는 Ghost로 번역한다. 정신과 영을 구분하기 위해서 Holy Ghost라고 한다. 왜 워치만니는 삼분설을 이야기했는가? 영과 혼이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많은 일이 혼으로 하면서 영으로 한다고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가 안 되니까 하나님의 일은 다 영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3권까지 봤는데 지금은 무엇인지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혼의 일을 영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갈라졌다. 이것이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다. 더군다나 C.C.C.에 있을 동안에 일이 많았다. 작정기도도 많고 작정행사도 많다. 이런 것을 다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 영적인 일이 아닐 수도 있고, 혼적인 일일 수도 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삼분설이냐, 이분설이냐 보다는 나는 여기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영어성경에는 이분설로 되어있지 않고 3가지로 번역되어 있다. 영과 혼과 육이 3가지로 갈라져있다. 다른 장로교는 모르겠지만 한국 장로교가 이분설을 주장한다. 영혼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Sprit라고 하거나 Ghost라고 해야 한다. 둘 밖에 없다. 영어 성경을 보면 다 3가지로 갈라져 있고, 희랍어 성경에도 3가지로 다 갈라져 있다.
삼분이냐, 이분이냐는 문제는 아니다. 다 갈라져 있다. 그것은 아마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있는데, 희랍철학이 이분설이다. 거기에 맞추니까 성경도 이분으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좌우간 삼분설을 믿거나 이분설을 믿거나 그것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구별해야 될 것은 영과 혼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혼을 만드신 것이지 영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영은 뒤로 보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되어있다. 새 영을 준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사람 자체가 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물이 아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번역할 때도 “산 혼이 된지라.”를 “생령이 되니라(창2:7).”로 번역했다. 생령이 아니고 산 혼이다.
나는 사람은 혼이라고 생각한다. 혼이 끝나면 죽은 것이다. 요즘 뇌사나 심장사를 말하는데, 이번에 내가 죽어보니까 의식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없다. 목구멍에 뭘 씌웠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몇 시간을 있었다. 깨어나니까 이것도 보이고 저것도 보였다.
죽은 후의 사후세계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부인한다거나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모르겠으니까 가보지 않은 것을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사후세계는 나는 말을 못한다. 마지막 숙제가 있다면 그 세계가 숙제이다. 이 사후세계는 어떤가? 이것을 확실하게 알고 속 시원하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죽을 날이 머지 않으니까 더 심각하게 관심을 갖고 있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 지금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모른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무엘서나 이런 데를 보면 죽은 혼을 불러들였다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 갖고는 안 되겠고,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는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주님과 함께 산다면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니까 어디를 가도 내가 주와 함께 있지 주와 떨어져 있겠는가? 이 생각은 늘 하고 있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주님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자리에 나도 있으니까. 그분이 부활하신 자리에 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분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고, 그분이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있다.
내 혼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주님이 잘 되면 나도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주님이 영광 받으시면 나도 그 안에서 영광 받는다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상은 내가 모른다.
두 번째, 의식 문제도 다 같은 문제다. 영혼육이나 사후세계나 의식문제는 나를 만난 사람은 다 의문이 된다. 나도 알고 있다. 나로서는 아직 모르기 때문에 답을 못한다.
시원하게 답이 안 되죠? 나도 역시 시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자기 죽을 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자손들을 불러놓고 유언하고 그리고 자기 간다는 시간에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가? 나도 저래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죽을 시간을 딱 알아서 자손들을 다 불러놓고 준비 다하고 나는 몇 시에 간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도 모르겠다. 경험할 수 있다면 나도 정말 경험하고 싶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기 때문에 보고를 할 수도 없다. 하여간 지금 내가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는 이것만이 나의 유일한 위로이고 유일한 소망이다.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 초창기에도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교회에서 만난 어떤 장로님이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예수와 함께 있으니까 그것 밖에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되겠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한번 시원하게 대답해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