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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회복
본문: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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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영생의 회복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알려고 하니까 어렵다. 구약의 역사에서 그분에게 굉장히 혜택을 많이 받았지만 그분을 모르는 그것이 구약의 문제이다. 혜택은 많이 받았는데 그분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형체가 없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다.
구약의 숙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이다. 그것을 예레미야 31장에서는 그 숙제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그러면 그날 후로는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다 알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시대는 아무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볼 수 있었으면 우상을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에 그렇게 분명한 역사를 경험하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금새 변심하여 바알을 섬겼다. 지금 기독교인들 중에 누가 그렇게 심한 배신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만큼 분명한 흔적을 본 사람들이 없고, 그들만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없는데,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금방 바알을 섬겼다. 왜 그런가? 혜택은 받았지만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알을 만나니까 이 바알이 바로 우리가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바로 그 신으로 생각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미국 스폰서를 통해서 후원을 받는다. 연필도 오고 크레파스도 오고 여러 가지가 왔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경도 못할 물건들을 선물로 미국에서 보내주었다. 또 돈도 보내주어서 그 돈으로 고아원이 운영되었다. 이 아이들은 후원자와 직접 거래를 못하게 되어있다. 편지가 오면 주소를 오려버리고 편지 내용만 준다. 아이들은 그 편지를 보고 자기를 후원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선물과 편지를 받으면서도 누구인지는 모른다.
꼭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그래도 그것은 사람이 보낸 것이니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떤 할머니가 보냈다거나 어떤 아저씨가 보냈다고 상상도 하기 쉽다. 그러나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분이나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분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분명히 물을 마셨지만 그분을 모른다. 혜택을 받았지만 그분을 모른다.
하나님을 알기 보다 어려운 일이 없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약속을 그렇게 받았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결국은 하나님은 법으로 혹은 생각으로 마음으로 우리 사람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이 체험될 때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경험된 하나님이다. 희랍사람들은 사변적인 신이지만 유대인들은 사변적인 신이 아니고, 철저하게 경험된 역사적인 신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하기는 하지만 막연하니까 자꾸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우상을 만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분명히 혜택은 받았는데, 그분을 모르니까 우리 나름대로 그 하나님을 상상하게 된다. 그것이 우상이 아니겠는가? 내가 혜택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분 자신은 본 일은 없다. 그래서 나 대로 생각하게 되고 각자의 하나님이 생기게 된다. 각 사람마다 자기의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 믿는 사람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내 신과 네 신이 싸우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서로의 하나님이 다르다. 각자 자기대로 아는 것이니까 일정하지 않고 통일이 안 된다. 믿는 사람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해결이 안 된다. 사람들끼리 싸우면 해결이 된다. 왜냐하면 합리성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니까 해결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술 한 잔 먹고 풀자고 하면 해결이 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번 싸우면 해결이 안 된다. 하나님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다. 나도 4년 동안 그런 전쟁을 해보니까 내 하나님을 양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하나님을 볼 때는 내가 옳다. 내 하나님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데, 내 하나님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다. 둘이 서로 다 자기 하나님이 옳다고 말한다. 끝이 안 난다.
알고 보면 이것이 큰 문제이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기독교가 내부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오면서 그렇게 많은 싸움을 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면 간단하다. 그런데 길은 유일하게 그 길뿐이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그 날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종대왕 동상을 광화문에 세워놓았는데, 누구든지 보면 세종대왕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쉬워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 쉬워지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법이 속에 와서 새겨지는가 했더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요한이 표현했다.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예레미야 31장 31절 32절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성취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보다 더 정확한 말씀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는 같은 말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봤을 때, 저 사람이 안에 말씀이 육체가 되었구나.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했던 것이 바로 저런 사람을 가르켜서 말한 것이구나. 이렇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찌하여 또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또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31장 31절 32절의 예언은 결국 요한복음 1장에 와서 적중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예수가 사람인가? 신인가? 이 문제이다. 처음에는 상당히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은 신이 아니면서 괜히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죽인 것이다. 인간이면서 네가 어떻게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것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죄목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어떻게 예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완전히 360도인지 180도인지 뒤집어 진 것이다. 예수님을 죽일 당시에는 분명히 사람이기 때문에 죽였다. 신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사람이니까 죽였다. 그리고 또 신이 죽겠는가? 사람이니까 죽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분명히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해도 물론 베드로나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면 다 믿는다. 또 우리 주변에 순교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인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장 쉬운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삼척동자가 봐도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있지 신이 달려있겠는가? 누구라도 보면 사람이 십자가에 저렇게 비참하게 죽었구나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기도교인들 속에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금 이것이 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것이 걸려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당시에는 예수를 신이라고 해서 죽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뒤집어져서 예수를 사람이라고 하면 죽일 판이 되었다. 거꾸로 되었다. 종교라는 것이 참 문제라고 생각했다. 참 심각한 문제구나. 돌을 보고 돌이라고 하고, 물을 보고 물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종교가 어떻게 되면 돌을 보고 물이라고 하고 물을 보고 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변동이 안 된다. 바꿀 수가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합리성 보다는 믿음을 우선으로 한다. 인간의 생각이나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모든 문제에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믿음은 이성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또 그럴 만한 것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보면 도저히 이성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일이 많다. 이성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일이 많다. 자연히 이성은 무시되고 믿음만 중요하게 된다. 이 믿음이 중요하다 보니까 돌을 보고 물이라고 해도 믿음이 좌우한다. 이성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믿음이 좌우한다. 돌이냐? 물이냐? 이것을 무엇이 좌우하는가? 사람의 이성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좌우한다. 믿음 안에서는 돌이 물이 될 수도 있고, 물이 돌이 될 수도 있다.
얼마나 이것이 혼란스러운 문제인지 기독교인들이 특별히 잘 생각해보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다 우리는 습관화되고 관념화되어 있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방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사상이나 관념이나 습성이나 어떤 형태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너무 많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과 교통을 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바로 그 문제이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합천 해인사를 갔을 때가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개구리를 밟고 있다. 절에 다니는 불자(불교도)들은 사천왕상을 구별되게 특별하게 생각한다. 우리집 아이는 그때 어렸으니까 막대기를 들고 가다가 사천왕 배를 찌르면서 이게 뭐냐고 물었는데, 내가 속으로 불자들이 보았으며 큰일났겠다 싶었다. 어린아이 눈에는 그냥 이상한 괴물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고 사천왕상이다. 물론 스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징적인 표시라고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 있다면 아주 땡땡이다. 일반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을 보면서 일반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거리가 생긴다. 상징물 같은 것이야 늘 바꾸어지기도 하니까 상관이 없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의식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돌을 보고 물이라고 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물을 보고 돌이라고 해야 될 경우도 있다. 믿음이니까. 이성 우선주의가 아니고 믿음 우선주의이니까.
그러면 이성 우선주의인 일반 사람들에게 믿음 우선주의인 우리의 사상이 통하겠는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신학교 다니는 친구와 밤새도록 토론을 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는데 좀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그 친구는 단순한데 무조건 믿으라고 했다. 믿으면 알게 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뭘 좀 알아야 믿지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믿겠느냐, 그때 내가 완전히 교회를 안 다닌 사람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중간에 가니까 그런 회의가 생겼다. 하나님이 진짜로 있는가? 아주 기초적인 문제가 회의가 생겼다. 신학교 다니는 친구니까 물어보려고 밤에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날 밤을 둘이 꼬박 새웠다.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평행선이 되었다. 알아야 믿지 어떻게 모르는데 믿겠느냐는 것이 내 이야기이고, 그 친구는 믿어야 알지 어떻게 믿지 않고 알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웃을 일이 아니다. 보통 일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에 친구 아버지가 웃으면서 하시는 이야기가 다음에 오려면 초를 사 갖고 오라고 하셨다. 그때 촛불 켤 때니까 밤새도록 둘이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초를 사 갖고 오라고 하셨다. 그때 나로서는 당연했다. 알아야 믿지 어떻게 믿고 안다는 말인가? 이렇게 도저히 벽이 넘어가지 않았다. 경험이 있었으면 알 텐데, 아무 경험도 없는 나에게 무조건 믿으면 알게 된다고 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일을 만나보지 않았는가? 우선 믿으라고 하니까 너무 답답했다. 우선 믿으라. 믿으면 알게 된다. 자연히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밤을 새워도 안 된다.
우리도 지금 순수한 것 같지만 순수하지 않고 사실은 어떤 의식화가 되어있다. 종교 안에서 의식화되어 있다. 지금 세상 문제도 그렇다. 똑 같은 문제인데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사와 지금 의식화된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사는 완전히 딴 판이다. 총을 맞고 온 사람이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다리가 부러져 온 상이군인이 이야기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해보면서 그렇게 다른 줄을 몰랐다. 해방 이후 우리가 다 겪은 것이다. 6.25도 겪고 5.16도 겪고 4.19도 겪고 전두환도 겪고 우리는 다 겪었다. 우리는 겪고서 아는 일인데, 80년 5월 이후에 대학을 다녔던 젊은이들과 만나보면 전혀 다른 데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냥 꼭 운동하던 사람만이 아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 의식화가 되어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를 어릴 때부터 나온 청년과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의식화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고 따라 다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았는데도 안 된다. 그 사람들이 의식화 된 것은 종교적이다. 기독교인 역시 그렇게 의식화 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면 믿어지지 않고,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하면 믿어진다. 완전히 이상한 것이다.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면 믿어지고,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하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인을 옹호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왜 내가 이 말을 하는가? 그 동안 여러분이 들으셔서 알겠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이야기를 하면서 뛰어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뛰어내리지 못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능히 뛰어내릴 수 있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것이지 어떻게 뛰어내리지 못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뛰어내리지 않은 것과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많다. 뛰어내리지 않은 것은 뛰어내릴 수 있었다는 말이니까 신이라는 말이다.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탁 부딪쳤다. 일부에서는 가고, 일부에서는 뒤쳐져 있고, 일부에서는 반대하고 있다. 너무 간단하고 쉬운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다. 우리가 종교인들로서 더군다나 지도자들로서 꼭 집고 넘어가야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사람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그냥 불을 질렀다. 생각해보라. 장작더미 위에 묶어놓고 밑에서 불을 질렀다고 상상을 해보라.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징그러운 일인가? 그런데 그것을 당연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 더군다나 예수의 이름으로 너는 지옥에 가라고 명하고 불을 질렀다.
이것이 인간이 한 짓인가? 마귀가 한 짓인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는가? 로마의 폭군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많이 박해하고 죽였다. 그 숫자보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 이단 혹은 이교도 사람들을 죽인 숫자가 훨씬 많다고 한다. 나는 통계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쓴 사람이 그렇게 써놓았다.
어떤 목사님이 노년에 쓴 책이다. 여러분도 보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이 있다. 전후 2권인데 두껍다. 전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그 의식화된 상식으로는 그것이 당연했다. 불을 질러 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달에 죽이거나 아무 가책이 없다. 가책이라고 보다는 반성이 없다. 지금도 반성이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너무나 무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있는데, 우리가 한 번을 겪고 넘어가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서 어떤 세계가 만들어진다면 정말 무서운 세계를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심하여 유럽인의 결론은 무엇인가?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되겠다. 같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역사적인 문제를 기독교인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방인들이 이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태리에 가면 바티칸 시티가 있다. 순수한 로마이다. 무솔리니가 캐톨릭을 바티칸 시티로 영토를 제한하여 버리고 이태리를 따로 세웠다. 기독교 안에서 반성한 것이 아니고, 외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이것이 흐르고 흘러서 미국에 가면 아예 헌법에 정교 분리를 박아놓았다. 지금도 만일 정교가 분리가 안 되고 옛날처럼 합해 있으면 옛날보다 훨씬 잔인할 것이다. 그때는 불 질러 죽이는 것밖에 몰랐었는데, 지금은 별별 방법이 다 있지 않겠는가. 잘못하면 사람들을 불러다가 지옥으로 보내겠구나. 자기도 못 가고 남도 못 가게 한다는 말이 이런 데서 나온 말이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이것을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은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는 또 근원으로 돌아가서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려고 했다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누가 갑자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고쳐지지 않는다. 갑자기 우연히 잘못 되었으면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근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네가 신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저들이 영생할까 한다고 말씀하시고 동산을 가로 막아버렸다.
화염검으로 막아서 못 들어오게 했다. 그러면 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동산에 못 간다는 말이다. 에덴동산, 에덴동산, 꿈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못 들어간다. 막아버렸으니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화염검이 있다는 말은 호랑이도 못 들어간다는 말이다. 아무도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영생을 못하게 해버렸다는 말이다. 이 영생이 무엇인가? 길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주신 축복 안에 사는 삶이니까 하나님과 합해서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연합한 삶이 영생이다.
옛날 어렸을 때는 영생이라고 하니까 한 없이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절에 있으면서 스님과 이야기를 해보았다. 스님은 지금 70세가 넘으셨는데 아직 성불을 못하셨는데 언제 성불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왜 묻느냐고 하셨다. 나는 지금 나이가 20살인데 지난날을 돌아보니 꼭 엊그제 같은데, 스님께서는 70세가 되셨으니까 좀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매 한가지라고 하셨다. 20살 먹은 것은 짧고, 70살 먹으면 긴가? 그렇지 않고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그때 언뜻 스쳐가는 생각이 시간이 길다고 해서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것은 아닌 것 같다. 길게 산다고 길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나이 70과 20은 3배가 넘는 차이다. 그런데 똑 같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똑같다. 20살 때 뒤로 돌아보았던 것이나 지금 돌아보았던 것이 똑같은데 달라진 것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도 그냥 살았으면 똑 같을 뻔 했는데 뭔가가 달라졌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한 이것이 달라졌다. 다른 것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시간 차이는 없다. 내가 만일 하나님과 함께 한 삶이 아니었더라면 20살 때 뒤돌아본 것이나 지금 뒤돌아 본 것이나 똑같을 뻔했다. 그러면 인생은 짧다는 그 말밖에 더 나오겠는가?
영원한 생명, 이것은 결코 시간이 긴 것이 아니고 질적인 문제이다. 이런 생명은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인가? 먹는 것 때문에 온다. 양식 때문이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아담이 만일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다면 그는 영생할 뻔 했다. 양식의 중요성이 생각된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바로의 양식을 먹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바로를 위한 국고성을 건축하고 있었다. 바로의 양식을 먹고는 국고성을 건축하는 것은 당연하다. 양식을 거기서 먹었으니까. 삼성에서 월급을 받으면 삼성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가 주는 양식을 먹었으면 바로의 일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광야에 나와서 양식을 바꾸었다. 여호와께서 그대로 두지 않고 양식을 바꾸었다. 만나를 주었다. 만나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만나라는 말이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 양식을 먹고 무엇을 했는가? 성막을 건축했다. 이 양식은 성막을 건축하는 양식이다.
이 둘을 비교하면 바로의 양식은 육적인 양식이고, 광야의 양식은 영적인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고, 다른 한 가지 양식은 여호와의 성막을 건축하게 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바로의 양식도 없고 하늘의 만나도 없었다. 그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고 살았다. 같은 땅에서 같은 씨를 심어서 같은 족속들이 먹고 살았다.
가나안의 생활은 아주 다르다. 같은 땅에서 같은 씨를 심어서 같은 족속들이 먹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동족이라는 말이다.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연합체이다. 이것이 나라가 된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같은 생명끼리 모여서 동족을 이루게 되고, 동족이 모여서 나라를 만들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도 한 생명이 모여서 연합하여 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2장에 예시되어 있는 말씀이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서 한 몸이 되게 한다. 한 육체가 되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같은 생명이라야 된다. 생명이 다르고 서는 하나님과 연합될 수가 없다.
가나안 양식! 이 가나안의 양식을 먹어야 된다. 이 가나안 양식을 어떻게 먹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같은 땅을 경작해서 먹고 살았다. 그 사람들은 땅의 지계표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어놓았다. 특별한 법이다. 예를 들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갈라놓아서 경상남도는 베냐민 지파, 경상북도는 유다 지파라고 해놓으면 영원토록 그 땅은 변경할 수 없다. 아주 특이한 법이다. 아무리 팔았더라도 50년이 되면 도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베냐민 지파에서 혹시 병이 나서 병원비 때문에 땅을 팔았다고 할지라도 50년이 지나면 도로 베냐민 지파로 돌려주어야 한다. 국법도 이런 것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양식이 도대체 무엇인가? 한 생명이 먹고 한 동족을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루는 양식이 무엇이겠는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은 유월절이었다.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마셔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린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신다. 아마 초기에는 떡과 잔을 같이 먹었는데 요즘은 잔은 먹기가 거추장스러우니까 떡만 주는 것 같다. 그것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신부에게 그 떡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거추장스러워져서 지금은 그냥 받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입에 넣어주었는데 입을 벌리고 있으니까 그것도 문제이니까 지금도 입을 벌리는지는 모르는데 간단한 과자로 주고 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 예수의 몸을 먹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 화체설에 대해서 개신교는 반대하고 있다. 상징설이고 기념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떡을 먹는다고 해서 몸이 되는가? 그렇게 해서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기념식을 하나 미사를 하나 어차피 상징적인 것이니까 기왕 상징적일 바에는 내 생각에는 떡을 먹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목으로 들어가니까 실감이 있다. 개신교는 성찬식을 하면서 굉장히 거룩하게 만들어놓았다. 다 흰 옷 입고 음식을 만들어서 이렇게 주어서 사람이 감동이 되도록 개신교에서는 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서 이 사람들은 매주 와서 그 떡을 받아먹고 있다. 이 떡을 받아 먹지 않으면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대죄에 속한다. 연말 정산을 할 때 만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고해성사를 해야 되고, 그냥 맨 입으로만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고 벌금을 내야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철저하다. 우리는 회개할 때도 맨입으로 한다. 자기 혼자 몰래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몰래 자기 혼자 한 것은 소용이 없다. 신부님 앞에 가서 해야 한다. 그리고 말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벌을 받아야 한다. 성당 청소 열흘이라든지 현관 청소 열흘이라든지 벌을 주고 벌을 지켜 내야 용서를 받는다.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실감난다. 그러면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제 벌을 받았다고 된다. 개신교에서는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니까 항상 찝찝하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신부가 정해줘서 정해준 것을 해버리면 끝났으니까 시원하다. 나는 종교적으로는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실제적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차피 2개다. 상징일 바에는 그것이 더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 받아먹으라. 이는 내 피다. 받아 마시라고 하셨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물론 생각하시고 하신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먹는 문제이다. 선악과를 먹고 빗나갔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한다. 이것은 먹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너무나 완전한 표현이다. 어떤 것보다도 완전한 표현이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확실한 표현이 없다.
왜 사람은 빗나갔는가? 먹기를 잘못 먹어서이다. 그렇다면 회복은 어떻게 되는가? 또 먹어야 회복이 되지 않겠는가. 먹어서 잘못되었는데 안 먹고 회복될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를 꼭 먹어야 된다. 안 먹고는 회복될 길이 없다. 맨입으로만 믿어서 안 되고 먹어야 된다.
요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자는~” 이것이 계속 되풀이 된다. 그런데 5장 이후에 먹는 문제가 나온다. 왜 믿는다는 말을 계속 하지 않고 먹는다는 말을 했겠는가. 믿는다는 말이 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믿는다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구나. 그래서 먹으라는 말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먹어야 할 것인가? ‘나를 먹고 살아라.’ 이것이다.
예수를 어떻게 먹을 것인가? 나는 참된 양식이다. 내 살을 먹고 영생할 것이다. 내 살은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이다. 사탄이 준 양식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이다. 이 양식을 먹으면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 것이다. 맞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 것이다. 우리가 밥을 인하여 산다. 먹는 것을 인하여 산다. 선악과를 먹고 선악과로 인하여 사는 그것이 양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하는데 생명나무 열매를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먹었다면 예수로 인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다.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선악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의 양식을 먹었으니까 바로로 인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다. 만나를 먹었으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다. 먹는 것으로 산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로 인하여 산다. 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그러면 영생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예수를 먹으면 회복된다. 잃어버린 영생이 회복된다. 화염검으로 가려진 동산, 그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된다. 양식 때문에 쫓겨났으니까 양식을 바꾸면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나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듯이 양식을 먹고 산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했다. 우리가 영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믿는 사람은 많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많고 많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자기 살을 놓고 먹으라고 하겠는가?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지 않겠는가. 물론 믿는다는 것도 잘 믿으면 되겠지만 믿는다는 말에 한계가 있다. 믿는다고 할 때는 나와 대상과의 거리가 있다. 그런데 먹는다고 하면 먹어버렸으니까 거리가 없어져버린다.
여러분도 다 경험하셨겠지만 신앙생활, 믿음생활의 궁극적인 문제는 예수와 내가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를 해도 무엇을 해도 하나가 안 된다. 여기서 이제 일차적인 해결방법이 율법 때문에 그렇다. 율법으로 인하여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 해결이고 해결 방법이다.
율법을 벗어나면 은혜 안에 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율법이 가려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히니까 안 된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는데 율법이 오니까 오히려 죄가 죄로 더 드러나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죽고 죄만 드러났다는 것이다. 죄가 있는 한 하나님과 내 사이는 연합이 불가능하다. 나는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려고 하더라도 거리가 있어서 안 된다.
왜 남자들이, 여자들이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는가? 연애를 아무리 해도 하나가 안 되니까 결혼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결혼하지 않고 둘이 관계를 가지고 살고 하는데 원래 생각하면 연애한다는 것은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는 말이다.
요즘은 아이들의 생각이 바꿔졌지만 육체로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연애한다고 한다. 결국은 만나봐야 만나보면 외롭기만 하고 만나면 될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까 더 외로우니까 결혼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목사님들이라 거룩한 생활만 하느라 연애를 해보지 않은 모양이다. 연애하면 할수록 더 갈증이 난다. 고기는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아예 모를 때는 괜찮은데 이것이 알기 시작하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할 수 없이 결혼을 하는 것이다. 후회할지라도 또 결혼을 하게 된다.
하나 되지 않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 문제이다. 사람마다 더 착한 사람도 있고 덜 착한 사람도 있는데,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도 있고 덜 지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이다. 잘못한 것도 잘한 것도 다 여러 가지다. 그런데 다 각자마다 다 만족이 없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가 안 되기 때문에 만족이 없다. 하나 되지 않는 한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다. 해보니까 안 되더라.
기도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 기도하면 갈증만 더 난다. 곧 주님이 옆에 계실 것 같은데 안 된다. 기도가 끝나면 달아나버리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분은 내가 붙잡으려고 하면 달아나버린다. 기도한다고 정성 들여서 딴생각을 하지 않고 하면 옆에 계신 것 같다가 눈을 떠버리면 어디로 달아나버리고 없다. 사실은 이것이 환장할 일이다. 그러니 한번 기도한 사람은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한다.
하나 되는 길이 다른 것이 있어야지 기도로 하나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방법 자체가 틀린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 된다는 이것도 역시 틀린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믿음으로 하나 될 방법이 없다.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먹으라고 했다. 오죽하면 이것은 내 살이다. 먹으라. 이것은 내 피다. 마시라. 이렇게 하겠는가? 안되니까 이렇게 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이 문제에 심각하게 고민을 했겠는가. 3년 반 동안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왔다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헤어져버렸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이 나는 모른다고 해버렸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써 놓았을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였으면 도망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른다고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고 갔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내놓고 먹으라.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마실 때까지는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를 먹는 문제, 누가 예수를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 이 문제이다. 감당하기 어렵다. 어떻게 우리가 선생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이냐? 그렇게 제자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답을 하셨는데 나도 그때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참 좋았다. 그렇구나. 그분이 하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니 어떻게 예수를 먹겠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물론 아주 좋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좋았다.
그러나 역시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었다. 먹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좋은 예가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광야에 세워진 놋 뱀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15절에 나와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6). 이것을 슬쩍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하는구나.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구나.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도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인줄 알고 믿었는데 영생은 없다. 나는 영생을 누린다고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앞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 들려야 하는 예수를 내가 못 먹었다. 왜 들렸는가? 광야에서는 뱀 독을 빼느라고 뱀을 달아놓은 것이다. 독 있는 뱀에게 물렸기 때문에 그 독을 빼내려면 또 다른 뱀이 필요했다. 독 없는 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것을 메달아 놓았다는데 어떤 조화로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면 뱀 독이 빠져나간다는데 우리는 그것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 경험을 통해서 아하 내가 예수를 쳐다보았더니 내 안에서 그 독이 빠져나가는구나. 그것을 이 말씀을 통해가지고 알게 된다. 뱀을 쳐다보았는데 나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셨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러니까 들려있는 예수를 먹는 것이다.
유월절에는 떡과 잔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 와서 이루어지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분을 쳐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일이 없다. 이분을 쳐다보는 것이다. 광야에서 뱀을 쳐다보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는 것이다. 쳐다보면 무엇을 알겠는가?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네. 간단하게 누가 봐도 이것이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제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가 차이가 있다.
뛰어내릴 수 있는데 안 뛰어내린 것이 아니고 못 뛰어 내린 사람을 보고 내가 뭘 해석하는 것이다. 뛰어내릴 수 있는데도 안 뛰어내린 사람을 보고 내가 그분을 관계하려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져 버린다. 더 멀어져 버린다. 나는 박아놓으면 죽을 사람인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니까 안 죽는다. 이것이다. 그리고 안 죽을 사람이다. 이것인데 그러면 나하고 그 하고는 아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물고기와 날짐승과 차원이 다르듯이 뛰어내릴 수 있음에도 안 뛰어내린 사람하고 못 박아 놓으면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나와 그 차이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겠는가. 물고기와 날짐승의 차이와 같겠는가? 아니면 더 하겠는가? 그러니까 점점 더 멀어진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너무 멀어서 손이 닿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너무 먼 당신이 되어서 사모하고 바라보고 경배하고 이런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 되는 것 하고는 다르다.
연합과는 다르다. 연합은 콩 조각이 둘이 붙어서 사는 것처럼 이렇게 서로가 없으면 안 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으니까 그저 기도하고 바라보고 사모하고 그것밖에 더 되겠는가. 죽으면 어느 날 만날 것이다. 아니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면 그때 주님이 오시면 만날 것이다. 그런데 또 만나면 무엇 하겠는가. 만난들 그분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와 그분은 종교적인 관계밖에는 안 된다. 경배의 대상밖에 안 되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을 많이 해봤다. 많이 해봤는데 해보면 해볼수록 갈증만 더 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갈증만 더 난다. 그냥 사랑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있으면 구경할만하다. 그렇지만 그게 진짜로 참 좋아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견우직녀처럼 건너가 보기나 하지 이것은 건너가 볼 수가 있는가? 쳐다볼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관계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래서 수도원이나 이런데 있는 수도사들은 고행 하면서 주님과 하나 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 주상성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돌기둥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금이 썩어서 구더기가 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거기 와서 순례자들이 경배를 하고 가는 것이다.
왜 그러고 있겠는가?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그러니 그 사람이 과연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을 맛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해볼 수 없다. 나는 처음부터 못할 사람으로 알기 때문에 아예 나는 그런 생각도 못해봤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해보고 다리가 다 썩기 전에 내려오면 다행이다.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는 우리는 같은 예수다. 이 말이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던 분과 내가 같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던 그분과 내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능력이라면 십자가에서 왜 뛰어내리지 못하겠는가? 그분과 뛰어내리지 못한 분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일을 내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이다. 따로다. 길이 다르다. 나와 연합하는 길이 아니다. 다른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나와 연합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다. 예수는 어떤 분인데 예수님을 비하 시키느냐고 이런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아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보고 하는 이야기이지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인 그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한 그분은 나를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만일 이 구속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달렸다고 하더라도 구속이 없다면 하나의 순교자로 처리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구속이 필요하다면 그분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내 위치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신이 되려고 이탈한 사람이다. 신이 못 된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어야 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다.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고 다 그대로 있지만 나를 원위치로 구속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참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른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신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이전의 나를 모른다. 우리도 지금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는 능력은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가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사람마다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절에 가서 내가 누구냐고 물어봐라.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만큼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 그것이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미친 사람이 한 말이 아니다. 자기를 아무리 봐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우리가 아는 데로 ‘나는 나다. 이것이 나야.’ 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평생을 절에 쭈그리고 앉았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진짜 내가 있다. 진짜 나를 찾으려고 떠나려는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
우리는 나를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자기를 모른다. 그런데 나, 그 나를 찾아 떠나는 나가 누구냐는 것이다. 누구를 찾아 떠나는 것이냐 이것이다. 평생을 수도를 해서 자기를 찾았다고 해보았자 그것이 완전한 자기가 아니다. 아주 다 찾은 듯이 이야기하고 앉았는데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만든 자기다. 자기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자기다.
나를 진짜로 알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봐야 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것을 봐야 된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러면 내가 하나님 같이 됐을지라도,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일 만큼 신과 같이 됐을지라도 그 말이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우리의 시시한 이것 말고 내가 신과 같이 됐을지라도, 예수는 그렇지 않은가. 신과 같이 됐을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니까 못 뛰어내렸다. 왜 그런가? 사람이기 때문에 못 뛰어내린 것이다. 신과 사람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신은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지만 못 박아도 죽지 않는 것이 신이다.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이 신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 이상의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다. 사람은 못 뛰어내린다. 그분이 능력이 없는 분이라는 말이 아니고 능력이 많아서 사람들이 보기에 심지어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다.”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큰 희망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람이지만 하나님 같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 같이 되었어도 사람이라는 그 말이다. 알고 보면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심히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가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많이 죽었는데 예수만이 나의 구속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내가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지만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면 다 가지는 것이다. 내가 바람과 바다만 잔잔케 해보라. 다른 것이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다. 그렇게 많던 갖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가장 좋은 것 하나를 만나면 그전에 좋던 모든 것이 다 시시해져 버린다. 좋은 애인을 하나 만나면 그전 애인은 그전 애인대로 좋았는데 진짜 애인을 만나니까 그전 애인들이 너무 시시한 것이다. 여자는 항상 그래서 거짓말을 한다. 무슨 거짓말을 하는가?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왜? 여자가 바로 사람이다. 그전 남자한테는 그전 남자대로 당신 같은 남자가 없다고 했는데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나니까 당신 같은 남자는 처음 만난다고 한다. 그것이 여자의 몸이다. 그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만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다. 남자는 거짓말을 한다. 당신 최고라고 해도 거짓말일수 있다. 그런데 여자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이것도 있었으면 저것도 있었으면 하는 모든 것이 많았지만 엄청나게 많아서 끝도 없었지만 내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사람이 딱 돼보면 다른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보라. 다른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을 필요가 없다. 무엇 때문에 선악과를 먹겠는가. 부러운 것이 없는데 천사가 부럽겠는가. 천사가 부럽지 않다.
그런데 아담은 왜 먹었는가? 천사가 부러워서 먹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되면 천사가 왜 부럽겠는가? 안 부럽다. 그런데도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내 참모습을 발견하고 그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내 생각은 다 헛것이고 내 꿈도 헛꿈이고 내가 거짓말하는 자에게 난 속았구나. 그러면 진짜로 속은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알게 하고 싶다. 이 사람을. ‘예수님이 신이다 하나님이다.’ 이것은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왜? 너무 많이 말해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거꾸로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사람을 신이라고 해버리니까 사람으로서 나타난 계시가 죽어버리고 만다. 사람인 예수, 사람으로서 오신 이유가 없어져 버린다. 그분이 나를 구속하기 위해서 죽지 않았으면 그분은 사람으로 오실 필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데 왜 기도 하겠는가? 나는 예수를 알기 전에 그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하나님에게 혜택을 받았다. 아주 분명하게 혜택을 받았다. 너무나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까 예수가 필요하지 않다. 그 하나님만 있으면 되니까 필요하지 않다.
나는 처음에는 예수와 하나님과 문제가 생겼다. 내가 처음부터 예수를 안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분명하게 혜택을 주었다. 나를 독수리 날개로 인도한 것이나 그 이후의 일이나, 앞으로 내가 내는 자서전에 다 써놓았는데 하나님이 하셨다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나는 그 하나님에게 혜택을 받고 내가 형통하게 되었다. 그 하나님에게, 내가 예수님에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보고 기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을 몰랐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는 그분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예수가 필요하게 되었는가? 사람이 되려니까. 혜택을 받으려면 지금도 그 하나님은 나를 다 알고 계실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기도하려다가도 생각하면 아이고 하나님이 나를 다 알고 계실 텐데,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해서 받은 일이 없다. 내가 기도하기 전에,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필요를 다 채워주었다.
그것이 너무너무 생생하다. 몇 번의 절망을 겪었는데 그때 나는 기도도 못했다. 기도도 못했는데 꼭 준비해 놓은 것처럼 완전하게 준비해 놓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묶어놓고 죽이려고 하는데 양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꼭 그런 것을 경험했다. 어떻게 일이 이 자리에 이 시간에 딱 준비해놓았는가.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옛날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뒤범벅이 되어서 그것이 그것인가 보다 했다.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다르고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다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님한테 홍해를 갈라달라고 하면 갈라주겠는가. 물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이니까 하시겠지만 그래서 그분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여기밖에는 먹을 수 없다. 그분이 뛰어내릴 수 없는 사람으로서 그 진실한 사람으로 모든 것을 갖췄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 자리에서 나와 동일시된다. 거기서는 같다. 다른 데서는 다 다른데 거기서는 같다.
나는 그 후로 거리감이라는 것을 못 느꼈다. 주님과 나와의 거리감을 못 느끼게 되었다. 하나면 되는 것이다. 늘 다른 예수와 나를 비교하니까 안 되지 나와 다른 예수를 놔두고 하나 되려니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수 안에서 나오 똑같은, 지금 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지만 그 참 사람, 그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나도 저 사람이구나. 나도 저 사람이구나. 그렇게 알아진다. 그분이 내게 이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도 저 사람인 것을 그랬구나. 이렇게 알아진다. 나도 저 사람인 것을 그랬구나.
나도 무엇을 좀 갖춰진 사람으로서 또 완전하게 갖춰 계신 분과 둘이 서로 만나니까 이것이 만나지겠는가? 나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도 나대로 갖춰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완전하신 분하고 만났으니까 그것이 해결이 되겠는가?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라. 여러분도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이다. 소원인데 소원대로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되신 분도 계시겠지만 소원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그분이 완전하게 진실하신 그분의 그 완전하게 사람이기만한 그분을 보여주시니까 내가 나도 그런 인간이구나 하고 알아진다. 나도 그런 사람이구나.
나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도 십자기에 못 박아 놓으면 당연히 뛰어내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가 안 보인다.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메달아 놓으면 죽지 뛰어내릴 수 없다고 누구든지 그렇게 안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내 정체가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의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봐야 내 정체가 밝혀진다. 그리고 내가 거역했던 사람인 것도 발견되고, 내가 이탈한 사람이라는 것도 발견되고, 나는 쓸데없는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구나. 이것이 발견된다. 사람은 다 무엇인가로 다 무장을 하고 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무슨 소문을 듣고 오던지 오는 사람이 있는데 처음에 올 때 내가 봐도 단단히 긴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완전무장을 하고 온다. 그런데 내가 무장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자기가 무장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니까 슬슬 자기 짐을 내려놓는다. 나갈 때는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간다. 내가 무장을 하지 않으니까, 자기에게 해를 줄까 해서 무장을 했는데 내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으니까 가면서 예전에 알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고 간다.
내가 예수를 만나니까,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 거기서 참 사람을 보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위장되어 있던 것인지 나는 왜 쓸데없는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거기서 알아지더라. 그러니까 짐이 다 풀어져버린다. 그분을 보고 아! 저 사람이 사람이구나 하고 보여지니까 내 짐이 놓여져 버린다. 쓸데없는 짐이 다 놓여져 버린다. 안 져도 될 짐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그 짐을 괜히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적이 온 것처럼 내가 누구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든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는데도 누가 내게 어쩌나 하고 생각한다든지,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나니까 전부 무장해제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 내가 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자기도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 그런데 내가 무장을 하고 있으면 지지 않으려고 자기도 단단히 무장을 한다. 한두 마디 이야기를 해봐서 안 되면 그냥 접어야 된다. 기어코 설득하려고 하면 그쪽은 더 중화기를 들고 나온다. 지지 않으려고 내가 권총을 들고 있으면 자기는 칼빈총을 들고 나오고 내가 칼빈총을 들고 있으면 M16총을 들고 나온다. 문제는 내가 무장을 해제해야 다른 사람도 무장 해제 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 참된 양식이다. 실제적인 양식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겠는가? 살과 피는 예수님 자신이다. 전체고 자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먹으면 그 사람 전체를 먹은 것이다. 통째로 다 먹은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양식은 한 씨족이 먹는 양식이다. 한 땅에서 난 양식을 한 씨족이 먹는다. 그래서 그들은 연합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 참된 양식을 우리가 함께 먹는 것은 한 씨족이다. 한 씨족이다. 그리고 그분과 내가 같은 양식을 먹고 있는 것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한 양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한 땅에서 난 음식이다. 그 예수는 한 땅에서 난 음식이다. 같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그 예수 안에서 발견되면 예수는 자기 양식이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인해서 살게 된다. 그가 나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나 따로 그 따로 아니다. ‘인하여’ 살 것이다. 같은 사람들이다.
한 콩에 두 조각 연합체 교회는 연합이다. 하나님의 최종목표는 연합이다. 창조의 최종목표는 연합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그 연합체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연합되지 않는 복음은 헛일이다. 계시록까지 못 가는 복음이다. 마지막까지 못 가는 복음이다.
누가 먹는가? 광야에서는 쳐다보는 사람이 먹었다. 유월절에는 떡과 잔을 먹었다. 지금은 십자기에 못 박힌 예수를 먹는다. 그분이 참된 양식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이다. 그것이 안 되니까 이상하다. 알고 보면 너무 쉬운데 어째서 안 되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 쉬운 것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너무 쉬운 것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데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리 없다. 우리가 다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게 만들어 버렸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된다. 왜 쉬운 것은 모르고 어려운 것은 아는가? 너무 쉬운 것은 모르고 너무 어려운 것은 알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공부 10년씩 했는데 어려운 단어는 아는데 아주 쉬운 단어는 모른다. 아이들은 100단어 200단어만 가져도 하루 종일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는 몇 천 단어를 알아도 말을 못한다. 말할 단어는 없고 이렇기 때문에 못하는 것과 똑같다. 교육을 잘못해서 그렇다.
지금 사람도 분명히 무언가에 잘못되었다. 잘못되어서 어려운 것에는 쉽고 쉬운 것에는 어렵게 되었다. 나는 쉬운 것을 찾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힘이 없으니까 쉬운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내 소원은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듣도록, 만민이 다 알아듣도록 할 수 있는 복음, 하나님의 복음, 영원한 복음,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영원한 복음이 되겠는가. 아주 간단하고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영원한 복음이 되지 않겠는가.
어린아이도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날이 와야 되지 않겠는가? 신학자들이나 알고 이런 복음을 가지고 언제 인류를 구원하겠는가. 이렇게 쉬운 것도 안 되는데 더 어려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도 생각해보니까 너무 어려운 것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쉬운 것을 놔두고 하나님 말씀을 인도한다고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때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때는 바쁘니까 섣달 큰 애기 개밥 퍼주듯이 한다고, 그냥 시집은 가야 되겠는데 그믐날은 다가오고 하니까 개밥 퍼준다고 제사 지내려고 만들어 놓은 것을 다 그냥 개밥 주고 마는 것처럼. 나도 지금 바쁘니까 가장 쉬운 것은 뭔가 그 생각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들으면 그냥 아멘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안 올까? 올 수 없을까? 그것이 하나님 소원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갈망이 있다면 그것이 갈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리 모임에서, 여러분들 속에서 복음이 더 개발되고 개발되어서 가장 쉬운 복음으로 만민이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복음으로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못했을지라도 여러분이 그것을 더 했으면 좋겠다. 더 쉽게 더 쉬운 것이 있다면 더 좋겠다. 그러면 지금 안 된다는 사람도 다 될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많이 해버렸다. 이것이 이렇게 쉬운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해버린다. 이 너무 쉬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너무 오래 하는 것이다. 마치겠습니다.